현철은 언젠가 – 아마도 마지막 인사를 전할 때쯤 – 내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그걸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정의 내릴 수가 없다. 무엇이 어떻게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인지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철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떠올릴 뿐이다. 그에 반해 나는 현철을 전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현철을 생각할 때면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번거롭고 사치스럽고, 말하자면 슬픔에 가까운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때마다 귓가에는 서걱서걱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소리를 혼자서 파주 소리라고 부른다. - P155

가끔 정호의 퉁퉁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을 보면 현철을 정말 잊은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묻는다면 정호는 다 지난 일이라고, 재수없다고 말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서 현철에 대해서 또 그렇게 말을 붙이겠지.
등신 오타쿠 새끼. 그 씨발놈 때문에 개고생한 거 생각하면……
정호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호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역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 P157

애들 얘기 하지 말라고. 싫다고, 난.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정호는 내가 매일 학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눈빛들을 마주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매번 나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사람인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꼭꼭 숨겨둔 것이 무색하게 나의 지저분한 면모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언젠가 나 스스로 순순히 그 치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 같은, 처형을 기다리는 염소의 마음을 정호가 알 리 없었다. - P166

현철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정호의 말은 틀렸고, 현철의 말은 진짜였다. 현철은 시시하게 찾아왔지만 끈질기게 괴롭힐 준비가 된 사람 같았다. 현철은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현철이 찾아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현철은 증거의 일부를 정호에게 보냈다. 얻어맞은 사진과 의사의 소견서도 삼 년 전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진짜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게 불쑥불쑥 꺼내도 미울 만큼의 미움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미움은 어떤 것일까. 시시해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명이 긴 미움은 어떤 것일까. 현철은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정해진 입금일이 되었거나, 날짜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현철이 무섭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철이라면 분명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현철은 그저 시시한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호는 달랐다. 정호는 현철과 비슷한 그림자만 보아도 소름 끼쳐했고, 그럴 때면 머리가 무거운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 떨구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 P168

정호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현철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정호가 박차고 나간 자리로 옮겨 앉아 현철을 바라보았다. 현철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 내가 비쳤다. 대신 죄인이라도 된 듯이 버석버석한 머리로 어깨를 웅크리고 있는 나. 현철은 나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뻥긋거리면서 말했다.
가세요, 같이. 나는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서 현철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입에서 쓴맛이 나는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어딘가 쓸쓸한 풀벌레 소리가 나는 것 같은 그 표정을. 그래, 풀벌레 소리…… 그러나 그 표정을 풀벌레 소리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그 소리는 풀벌레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너무 시시한 소리가 되어버리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 소리는 개같이 쓸쓸하고, 파주의 한겨울철 뿌리내린 단단한 얼음 같아서 아직까지 나는 그때와 비슷한 소리를 한 번도 다시 들어본 적이 없다. - P171

나는 현철이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철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현철은 시시한 복수를 하려고 온 사람도, 시시한 복수를 해온 사람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현철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볼수록 어떤 허무한 기운이 몰려왔다. 내가 절대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맑은 눈동자 속의 허무함이 현철의 눈 안에서 넘실댔다. - P177

……모르겠네요. 그냥 매일 그 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으니까. 아니, 이미 죽은 거라고 생 각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 새끼 전역하면 진짜 다 끝이다, 생각하면서 버티고. 근데 진짜 끝이더라고요. 허무하게. 허무해서 더 화가 나더라고요. 사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근데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나는 다음번에 또 이렇게 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상상하니까 내 다음이 무서워지고, 내가 무서워지고. 무서워지니까 또 밉고…… 미치게 밉고. 이해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랬어요. 전역하고 나서 매일 생각했어요. 목 조르는 생각, 칼로 찌르는 생각. 그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골라내다 보니 이렇게 시시해진 것도 같고. 그땐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한테는 삼 년이 어저께 같아요. 그 생각에 묶여서 시간이 안 가요. - P180

한편, 무서우니까 미워하는 거라는 현철의 말은 현철 또한 재회한 정호 앞에서 무서움을 계속 견뎌야 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철이 이 복수극의 원고이자 그 자신의 변호인이며 복수를 승인한 행정관이라는 점이다. 입금이 이행되지 않으면 고용된 유령처럼 정호의 주변을 배회하는 일도 현철 자신의 몫이다. 스스로 부과한 현철의 복수적 지위와 역할은 그가 짊어져야 하는 감정의 무게를 또한 짐작하게 한다. 가해자를 다시 대면하여 죄를 묻고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자신의 무력함과 수치심을 다시금 대면하게 되는 일, 결국 자기 자신을 벌주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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