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번 더 활을 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번 더 해봐." - P10
할머니는 개수대에서 주전자를 헹구며 화살 얘기를 꺼냈다. 때가 묻고 좀 더러워져야 씻을 맛도 나는 거라고, 너도 알다시피 화살을 잃어버렸을 땐 한번 더 같은 방향으로 쏘면 그만이라고 했다. 쏠 때 어디로 날아가는지 화살 끝을 째려봤다가 얼른 가서 뒤져보면 된다고. 그 말은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 P11
손끝으로 곡선을 그리는 레인코트에게서 어떤 위엄이 느껴졌다. 위옹의 다른 모든 크루를 포함해 레인코트가 이 클럽의 중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컴퍼스로 그린 원의 중심이랄까. 종이 위에 바늘로 찍은 자국. 레인코트가 바로 그 중심이었고, 어쩐지 나는 그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레인코트가 앉거나 일어설 때 레인코트의 반듯한 어깨와 널찍한 가슴이 내 앞에서 비스듬하게 기울어 졌고, 나는 눈앞에서 오래된 흙벽이 무너지는 것처럼. 차가운 천이 이마를 덮는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마치 관속에 누워 내 위로 흙이 뿌려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깊은 곳으로 내려가 어둠에 잠기는 것 같았다. - P18
나는 나를 잊게 해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느리고 모호한 쾌감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실의 고전문학 서가에 앉아 책을 통해 누군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글로 쓰이고, 종이에 인쇄된 인간의 욕구가 나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만 생생했고, 그렇기에 안전하게 나를 열 수 있었다. - P30
나는 할머니가 말한 『이방인』을 읽었다. 책 속의 정확한 표현은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이었다.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이 내린 결정은 신뢰할 수 없다는 말. 나는 그 페이지의 모서리를 작게 접었다. 그뒤로 다른 책을 읽다가 속옷이나 팬티라는 단어가 나오면 종이 끝을 세모나게 접었다. 등장 인물이 슬퍼하거나 우는 장면이 나올 때면 할머니에게 그 구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할머니, 이 사람은 슬퍼할 자격이 있어? 울어도 돼? 할머니는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함부로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뫼르소는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카페오레를 마신 거라고. - P31
"오래 살아라. 보리야, 오래 살아." 할머니는 이응이 발달하는 만큼 수의학 기술도 좋아져 개의 수명이 늘어날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뭐든 다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좋아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줘야 한다고. "차차 가리겠지. 차차 배우겠지.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하지만 보리차차는 차차 배우거나 달라질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S자 곡선을 그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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