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신을 찾아서 中


이곳이 추락 직전의 비행기라면 버려야 할 것은 1. 몸 2.마음 3. 영혼 4. 과거 가운데 하나이고, 또 우리는 뱀과 새와 원숭이를 데리고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저 웃으며

어둠 속을 걷던 그런 날도 있었지

아직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때 어둠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보았으며

그것이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 비밀이 영원히 비 내리는 숲의 가장 어두운 곳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 P53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中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 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때때로 눈도 비도 내리겠지요

우리는 이 동네로 떠밀려왔고, 어느새 짐을 풀고 있었을 뿐이지만

깨어도 꿈결 속아도 꿈결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가 늙었을 때,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동네에서 곱게 늙은 두 노인이 되었을 때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누구에게 해 끼치는 일도 없이 계속되어온 그저 선량한 우리 삶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깊어가는 가을

밤마다 옆집에서는 잘 익은 감들이 하나둘 떨어졌고
그때마다 사람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P66

철거비계 中


계속 말해줘
남김없이 알려줘

(모노드라마는 독백과 방백,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독백과 방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지?)

가장 미워하는 것과 가장 부끄러운 것에 대해서 갑자기 떠오르는 아무것도 아닌 생각에 대해서

지금 손에 든 물건에 대해서 살면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더는 말할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말해줘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다 이야기해줘

(조명이 꺼지며 공연은 끝나지만 저녁에 다시 공연은 오른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에도 슬픔을 모른다)

사랑이 끝나고 삶이 다 멈추면
이제 내가 말할 차례가 온다 - P69

중계 中


커피는 검고 그 맛은 물에 한없이 가깝습니다 - P81

바지를 입은 사람은 바지를 입고 떠난다


퇴근하고 집에 누워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방에서 나와 당신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여름 저녁의 거리가 너무 밝아서 몸 숨길 곳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 하나 모르는 개가 여길 보고 짖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홀로 걷던 천변의 풍경이 무심코 아름답게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이 내 몸 누일 곳이 없다면 어째야 하나

산책 나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사를 해야 하나 산책중이시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야 하나 알긴 아는 데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세계의 밤이 오고 늘어선 집들에 불이 켜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름밤 물가의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기 시작하는 데 반팔 티셔츠 한 장뿐이라면 어떻게 하나

속절없이 집에 돌아가니 따스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모든 것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방에서 나온 모르는 사람이 내 등을 두들기며 사랑한다 말하는데 나도 그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면 어째야 하나 - P88

벽해


텅 빈 벌집만 혼자 여기 있으면

이 모든 것이 은유가 아니라면

꿈조차 아니라면

어쩌나

침대에 누웠더니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두운 밤 그러다 눈뜬 채로 아침이 왔고

꿈이 없어서 꿈에서 깨지도 못하는 삶이

어쩌나

덜컹거리는 문이 자기 혼자 그러는 것이라면 인과가 깨진 것이라면

하지만 사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나만 그걸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와서 어쩌나

쓸쓸해 보이시네요
그렇게 자기 얼굴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로

나는 천장에 비치는 빛을 헤아리고 있었다 - P90

자율주행의 시 中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아도
오프닝 음악이 흐른다거나, 커다란 타이틀이 화면을 채운 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

사람 가득한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네

긴 하루를 보내고 같은 집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잠들어도
우리 삶에 펼쳐진 무수한 난관을 모두 이겨낸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함께 밥을 먹었지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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