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하는 동안 벅트라우트 씨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떠안은 나이 든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디 슬레인의 한탄을 아주 의아하게 여기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레이디 슬레인이 세상의 보편적가치에 동의하지 않음을 그저 사실로서 받아들였고, 따라서 연신 세속의 가치를 강요받아야 하는 친구의 고충을 자연스 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이디 슬레인이 어렸을 때 어떤 꿈을 꾸었는지, 실제로 살아온 삶과 얼마나 다른 꿈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단순한 성격인 벅트라우트 씨였지만 –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약간 미쳤다고 생각했다. – 그에게는 그만의 명료하고 편견 없는 지혜가 있었다. 그는 규범 을 개인의 삶에 맞춰야지, 개인의 삶을 기성의 규범에 욱여넣기란 흔하기는 해도 부조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레이디 슬레인은 몸이 마비된 운동선수만큼 안타까웠다. 분명 일반적인 관점은 아니었지만, 버트라우트 씨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P196

그녀는 세상사에 초연한 노인으로서 이런 사소한 사건들을 저 먼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곱씹었고, 그러자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덩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참 피곤하고, 단편적이고, 고루하고, 허무하지." 그녀는 지팡이와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했고, 그 와중에 인생의 막바지에서 굳이 셰익스피어 말고 다른 것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 지 고민했다. 아니, 그렇게 치면 인생의 초반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생명력과 성숙함을 모두 이해하는 작가였으니까.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심오한 통찰은 나이 든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 P200

그녀가 보기에 즐거움이란 전적으로 사적인 행위이자 은밀한 농담이었고, 가드니아 꽃잎처럼 화려하고 향긋하지만 멍들기 쉬웠다. - P202

레이디 슬레인은 담담하지만 철학적인 제누의 인생사를 들으며 마음이 동했다. 그간 제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제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다니! 그러나 제누의 다부진 가슴 속에는 풍부한 경험이 깃들어 있었다. 짚단을 깔고 자다가 두들겨 맞던 푸아티에 농장에서 휘황찬란한 총독 관저와 근사한 저택으로 오게 되었으니, 극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제누의 인생에 비하면 증손주들의 인생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레이디 슬레인의 인생도 얄팍한 데다 과도하게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진정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느껴졌다. 이루지 못한 꿈에 남몰래 애태운 그녀였지만, 새로 묻은 무덤에 몸을 던진 언니를 일으켜 세운 경험은 없었다. 가만히 서서 덤덤히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제누를 바라보며, 레이디 슬레인은 자문했다. 현실이 찢어 놓은 너덜너덜한 자상, 그리고 상상이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멍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일까? - P205

지금 느끼는 기쁨은 특히나 사적이었다. 예전처럼 또렷하지는 않았다. 또렷하기보다는 뿌옇고, 강렬하지만 막연했다. 그래서 그 정체를 밝혀낼 능력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이 그저 흠뻑 취할 뿐이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인생의 황혼기, 빛이 저물어 가는 노년기에서 돌연 요동치는 청년기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강가의 갈대처럼 흔들렸고,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저 멀리 나아가다가도 어귀의 잔잔한 물결 속으로 자꾸 밀려 들었다. 젊음! 젊음!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죽음에 이토록 가까이 다가선 지금, 그녀는 또다시 자기 앞에 위험한 모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번에는 더 용감하게 직면하겠다고,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더 굳세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다짐했다. - P213

그녀가 보기에 할아버지와 전 약혼자에게 재산과 귀족 작위는 1야드, 2야드, 100야드, 아니 1마일만큼 크고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1인치, 어쩌면 0.5인치만큼 작고 보잘것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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