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정말 희한했다. 죽기 전에 이런 막간의 즐거움을 맛보다니, 평생 살아온 삶에서 – 맡아 온 일에서, 자식들에게서, 헨리 에게서 – 멀찍이 물러선 끝에 이토록 흡족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새로운 생활을 얻다니! 이 같은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은 레이디 슬레인 자신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는 것이 인생인지도 몰라." 그러고는 오래된 책 하나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펴고 읽기 시작 했다.
맹세하지 말라, 거창하게 장담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 과시하지 말라, 증오하지 말라, 모독하지 말라, 악행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분노하지 말라, 음탕한 짓을 하지 말라, 사기 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혀를 놀려 험담하지 말라.
레이디 슬레인이 유념해 온 덕목들을 벌써 – 누군가가 그녀는 날짜를 확인했다. – 무려 1493년에 정리해 두었다니, 분명 굉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음 연도 읽었다.
피상적인 허위를 피하라, 혹독하게 휘발하는 혹취이므로. 포식자의 환심을 피하라, 희번지르르하므로. 버스러질 호감정을 피하라, 허황한 환담이므로. 패배자들의 폭력을 피하라, 편견이 흔하므로. 흥분한 폭군을 피하라, 표독함으로써 행복하므로. 허수아비의 허위를, 호의적인 환상을 피하라. 허무맹랑한 해찰을 피하라, 편녕하는 허구이므로. - P155
이토록 기이하고 무례하고 바보 같은 사랑 고백은 레이디 슬레인의 마음에 연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남편을 향한 충심을 거슬렀고 노년의 평화를 방해했다. 유년의 혼란을 되살렸다. 그녀는 작은 충격을 느꼈고, 동시에 그것보다 큰 기쁨을 느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무수한 회고와 단 하나의 바람으로 채워지고 있었으니까. 피츠조지 씨는 마치 무엇을 느껴야 할지 이미 정해 놓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침입한 듯했다. - P164
케이를 좋아하시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물었다. "좋아하냐고요?" 피츠조지 씨는 놀라서 되물었다. "글쎄요. 난 케이가 익숙하지요. 맞아요,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서로를 잘 이해하니 공연히 귀찮게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서로 익숙한 사이입니다. 이쯤 해 두지요. 우리 나이에는 익숙한 것 말고 다 성가신 법이니까." - P171
과거의 나날은 세월이라는 장막을 드리우고 바라보아도 그녀의 약해진 시력에는 지나치게 밝았지만. - P172
케이는 우물쭈물 창가로 가서 피츠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비교했다. 두 사람은 실로 다른 삶을 살았다. 피츠는 세상을 비웃었고, 자기만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삶을 살았으며,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아무한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웬 신문에서 런던의 괴짜들에 관한 기사를 냈을 때였다. "세상에!" 그가 말했다. "사생활을 지키며 산다고 괴짜라니?" 그는 자기 이름이 포함되었음을 발견하고 분노했다. 사람들이 흔히 타인에게 표하는 호기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박하고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피츠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 세상사에 전연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세상에 침잠해서 자신의 소장품과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만의 종교였고 사색이었다. 그러니 그의 외로운 죽음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삶과 완전히 부합했으니까. - P179
"가장 작은 행성도," 벅트라우트 씨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좋든 싫든 부와 지위와 소유물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나는 피츠조지 씨가 현명한 줄 알았어요. 벅트라우트 씨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 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절박하게 공감을 구했다. "나는 마침내 그런 것들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츠조지 씨가 다시 그 속으로 날 밀어 넣었어요. 어쩌면 좋지요, 버트라우트 씨? 난 어떡해야 하나요? 피츠조지 씨는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했으리라 믿어요. 그렇지만 난 그런 것에는 깜깜하다고요. 난 항상 인간의 작품보다 신의 작품을 더 좋아했어요. 신의 작품은 백만장자든 빈털터리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열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작품은 백만장자만 누릴 수 있지 요.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든 못 하든 훗날 값을 치를 백만장자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물론 피츠조지 씨가 값을 따지면서 고가의 예술품만 모았다는 소리는 아니지요.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을 감정했어요. 게다가 구두쇠였잖아요. 시장 가치에 맞게 값을 치르기는커녕 훨씬 싼값을 내야 즐거워했다고요. 그러면서 인간의 작품이 아닌 신의 작품을 손에 넣은 양 느꼈을 테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려나요."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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