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살아오면서 저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아주 많지만, 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인생은 순식간이에요, 레이디 슬레인. 그래서 사람은 한없이 과거로 날아가는 현재의 꽁무니라도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어제나 내일을 생각하는데 몰두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어제는 영영 갔고, 내일은 물음표뿐이니까요. 장담합니다, 심지어 오늘조차 위태롭지요. - P93

그들과의 관계가 선사하는 위안과 해방감은 참으로 기묘했다! 노년기의 피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소망이 이루어진 듯한 벅찬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모든 결정과 책임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어린 시절로, 세상은 따뜻하고 상냥한 곳이라고 굳게 믿으며 마음껏 꿈을 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온과 사색을 위해 살리라고, 분투하고 계획에 얽매이고 애써야 하는 삶은 거부하리라고. 그런 삶은 거짓이었다. 그래! 거짓이고 말고, 하고 외치며 레이디 슬레인은 한 손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반대쪽 손바닥을 때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기력이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저 세상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예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신에게 열의가 부족하다고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색을 통해서는 (그리고 오래전에 선택했다가 단념하고 말았던 어떤 애호를 통해서는) 결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의 자식들보다 진정한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0

여자의 마음속은 적막했다,
거리의 소음과 군중에도 개의치 않고.
손에 서두름이 없었으며
발에도 서두름은 없었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04

늦여름의 햇살 아래, 햄스테드 집의 남쪽 벽을 따라 늘어선 잘 익은 복숭아 밑에서, 그녀는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앉아 헨리와 약혼했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는 날이면 날마다 여유가 넘쳐서 방금 지나온 산책길을 뒤돌아보듯 자신의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마침내 삶의 기억은 외떨어진 밭뙈기들이나 파편화된 사건들이 아닌, 거대한 풍경이자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서 밀려왔다. - P105

그때 헨리가 백조 이야기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술수였다는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어느 틈엔가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자기가 긴장했음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 몸을 앞으로 굽힌 채 그녀의 드레스 한쪽을 만졌다. 꼭 두 사람을 하나로 엮으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헨리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긴 듯했고, 손을 뻗어서 헨리 볼 위의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을 만져 보고 싶은 욕망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 반드시 진중한 목소리로 전해야 했던 말들, 그 무거운 의미가 어조에 오롯이 실려야 했던 말들. 마음속 어느 진지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만들어 낸 듯한, 마음의 우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듯한 말들. 버겁고 성숙한 영역에 속한 말들. 그런 말들이 번개같이 그녀와 헨리의 유대를 끊어 버렸다. 독수리가 두 발로 헨리를 낚아채서 하늘로 날아갔더라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았으리라. 헨리는 사라졌다. 그녀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열심히 헨리의 얼굴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이미 그가 멀리 멀리 사라졌음을 알았다. - P106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정확히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스스로를 돌아보는 늙은 여자로서 자문했다. 이러한 궁금증은 아주 편안하고 아련한 심심풀이였지만 결코 멜랑콜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최후의 사치, 궁극적인 사치였다. 한평생 누리고 싶었던 사치였다. 이제야 죽음을 유예한 채 이 사치를 만 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 아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