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텐트를 돌고 또 돌았다. 다시 돌고, 또 돌고, 그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버려서, 땀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리넨 원피스 여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서로를 살피는 저 친절들이 자꾸 나를 건드려서, 나는 그곳에 더 있지 못하고 비칠비칠 로비 입구로 걸어나갔다. 손 조심이라고 쓰여 있는 유리문의 잠금장치를 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 앞에 섰다. 내가 밀폐된 공간에 있다는 자각이 그제야 한꺼번 에 밀려오며 갑자기 호흡을 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린 비상 상황이 되자 나는 내게 또렷하게 새겨진 그 감각을, 계곡물 소리가 주던 두려움을, 내가 움켜쥐었다 놓친 로프의 감촉을, 순식간에 다시 나를 감아올리던 누군가의 안간힘을 그대로 다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 P158
멜로와 로맨스는 닮은 얼굴을 한 다른 성격의 형제와 같다. - P198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가 그녀와 친구들 앞에 앉았다. 남자는 커피잔을 밀 어내고 사주 책과 노트, 펜을 늘어놓았다. 커피가 남자의 노트에 흘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와 친구들은 차례로 생년월일시를 읊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애처롭고 무기력한 기운이 무방비하게 새어나왔다. 죄를 저지르고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나중에 그녀는, 그것이 진부할지언정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운명 앞에서는 겁에 질리기 마련 이니까. 아닌가, 겁에 질리니까 죄를 짓게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걸 따지는 건 아무래도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았다. - P217
그 이듬해 그녀는 사립 중학교에 기간제 미술 교사로 취직했다. 스물한 살, 미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녀는 선생님이 되는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사주 보는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전시회에서 그림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런 소망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가느다란 줄의 끝에서부터 힘없이 타들어가다가 결국엔 꺼지고 마는 불꽃처럼. 너무 적은 양의 기름, 너무 가느다란 줄, 너무 약한 불. 삼박자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 P219
"돌아가요. 개는 죽을 겁니다. 죽을 거라고요. 당신 때문에." 수의사는 화난 듯 내뱉었다. 유감이나 위로의 표현은 없었다. 보름 후, 작은 개가 죽었다. 그녀는 자신이 수의사의 이름을 잘못 기억해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기억해냈다면 개가 죽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좀더 흐르자 이름을 잘못 기억한 건 문제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죄는 교만이었다. 잘못 떠올린 이름을 그대로 믿어버린 것. 더 나아가서는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으리라고 자신을 과신한 것. 그것 때문에 개가 죽었다. - P252
무용담이 될 거라던 선장의 말이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맞았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방금 자신들이 겪은 일을 서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허세, 과장, 술회하는 듯한 태도. 모두가 함께 겪은 일이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아무도 (의도된) 오류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세부 사항을 추가하고 부풀리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질 것이었다. 모든 일은 그런 식으로 축소되고 쪼그라들 것이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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