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젤다는 계절과 관련된 표현들을 짚어주었다. 젊었을 때 그는 가을을 탄다는 게 뭔지 몰랐다. 오십대가 되니 그게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삶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나갔고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빛은 낙엽을 닮아갔다. 그는 강 쪽으로 걸어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과 멀리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과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오리배들을 보았다. 오리배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묶고 있는 줄을 풀면 오리배들은 어디로 떠내려갈까. 영어 수업을 그만두게 되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 P106

그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후드 집업을 걸치고 일어나서 창 너머의 하늘과 길게 이어지는 철도, 그 위로 지나가는 전철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볼 때 전철의 움직임은 다른 시공간의 일처럼 낯설고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그는 늦가을의 풍경이, 풍부한 색채로 잎을 떨구는 늦가을의 나무가 앙상해진 겨울나무보다 더 쓸쓸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 P116

그는 스터디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업 내용을 정리한 프린트가 놓여 있었다. 물컵은 비었고 두 사람의 음료 잔에는 다른 색의 얼룩이 남았다.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젤다가 먼저 나갔고 그는 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다. 젤다와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그는 프린트를 여러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창 너머 보이는 철도 위로 전철이 천천히 지나갔다. 토요일에 그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언제나 그 철도를 볼 수 있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그 장면들은 늘 다음 토요일로 이어졌지만 이제 그는 토요일에 로건으로 지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토요일 오전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쟁반을 들자 4인용 테이블이 텅 비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스터디룸을 한번 둘러보았다. 수업은 끝났지만 그에게는 몇 개의 장면들이 남아 있었다. - P122

대기가 차가워지면 사람들은 목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목을 가리면 나는 안심이 된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들이 다시 목을 드러내면, 그때부턴 가슴이 뛴다. 여름이면 나는 매일 가슴이 뛴다. 사람들이 저렇게 쉽게 급소를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다. - P135

나한테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게 뭘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어준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친절한 사람이요.
저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해요.
나는 툭하면 누군가를 좋아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기간엔 내내 가라앉아 있을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내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기꺼이, 기필코 좋아해버린다. 내시경실 베드에 누울 때 긴장하지 말라고 손을 잡아주던 간호사를 나는 그날 하루종일 좋아했다.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어, 어, 하며 몸이 떠밀려갈 때 재빨리 내 팔을 잡아당겨주던 남자를 나는 일주일 동안이나 좋아했 다. 빗물과 눈물과 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로프에서 풀려났을 때, 내게 다가와 담요를 둘러주던 구조대원을 나는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 이상하고 뜨거운 여름에 대피소 한쪽에서 같이 훌라후프를 돌렸던 여자도 나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 P151

"저 기억하세요?"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벌써 일어나 앉아 있었다. 나는 방습재 돗자리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눈썹 문신 여자한테 다가가 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실내에서 가까이 앉고 보니 그녀는 짐작했던 것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다. 여자는 팥과 소금을 얘기하는 것인지 아이스 쿨 타월을 얘기하는 것인지 잠시 가늠하는 것 같더니 둘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가 막상 몇 해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하자 새삼스레 가슴이 묵직해져왔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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