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밤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를 기억하는 듯한 겹기억이 탄생한다. 아마 부영도 잠이 안 오던 밤에 정원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신의 현재를 함께 떠올리곤 했을지 모른다. 불면이 만드는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오래된 과거를 향해 하염없이 거슬러올라가다보면 그 끝에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그런 무서운 기억의 원환을 하염없이 더듬더듬 헤매 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새벽 경애도 삼십 년 전 안개 가득한 강변을 걷던 과거를 기억하려 애쓰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도 함께 떠올릴까. 그런 겹기억의 순간을 경애도 견디며 살고 있을까. - P38

좀비라면 단번에 알아볼 수나 있지. 사람은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가 없잖아. 언니는 매일 대비한다. - P67

진짜 부자는 자기 주머니에서 새어나가는 돈 천원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법이야.
할머니의 대답은 ‘걱정할 것 없다‘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약간 반항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할머니는 부자였던 적이 없잖아. 근데 부자들이 그렇다는 걸 어떻게 알아?
할머니는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부자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가난한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니까.
나는 설득당하고 말았다. - P73

언니 말 들으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소용이 없어. 배운 대로 하는 건데 눈치를 봐야 해.
순간 임준석이 떠올랐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들고 다니는 나를 보고 임준석은 위선 떨지 말라고 비아냥거렸다. 어차피 텀블러도 쓰레기 아니냐고, 텀블러 쓰면서 오버하는 이런 애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고, 은근히 사람 불편하게 하는 이런 애가 사실 더 이기적인 거 아니냐고.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인간들이 다 멸망해버리는 게 지구한테는 더 나을 거라고 임준석은 말했다. 적지 않은 애들이 그 말에 동의하는 제스처를 하면서 낄낄낄 웃었다. 걔네가 상상하는 멸망은 지금처럼 조금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소행성 충돌 같은 사건으로 모두가 단숨에 사라져버리는 것에 가까웠다.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나서 고통조차 없는 황홀한 멸망. - P80

아이들은 많은 것을 단숨에 외우고 자세하게 기억한다.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한 다. 소용없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더는 하지 않는 일들을 아이들은 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썸머와 비슷한 나이에 처음 의문을 품 었다.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나이에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분노를 쏟아내며 연설했다. 그 연설 영상을 나는 수십 번 봤다. 보면 볼수록 나 또한 화가 났고,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툰베리가 차분하고 예의바르게 말했다면 실감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툰베리처럼 화석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태양광 요트를 타고 바다를 건널 자신은 없다.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할 용기도 없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사고 싶고 평생 치킨을 먹지 않고 살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이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라며 등교 거부 시위를 한다면 참여할 것이다. 비건을 위한 급식 식단을 따로 마련하라는 서명서에 내 이름을 적을 것이다. 계속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들고 다닐 것이다. 임준석이 또 개똥 같은 말로 나를 모욕한다면 오늘 아빠에게 그런 것처럼 화를 내고 싸울 것이다.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망하고 싶으면 너 혼자 망하라고 확실하게 말할 것이다. - P83

이십 년 후에도 썸머는 마스크를 써야 안전하다고 느낄까? 나의 세상은 썸머가 없었던 때와 썸머가 존재하는 때로 나뉜다. 나는 아직도 썸머의 연하고 작은 손을 처음 잡아봤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 썸머의 손을 잡고 다짐했었다. 이 아이를 평생 지켜줄 것이라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야단맞을 때보다 썸머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더 진땀이 나고 조급해진다. 썸머를 생각하면 미래를 무한하게 긍정하고 싶다. 팬데믹, 미세먼지, 전염병, 홍수, 침수, 가뭄, 꺼지지 않는 산불, 식량난, 기후 난민, 토양오염, 해양오염. 종의 멸종처럼 암울한 일들로 가득한 미래가 아니라·····. 탄소 중립 실현, 미세먼지 없는 대기, 자연 분해 가능한 플라스틱, 재생 에너지, 수소에너지, 전기자동차, 대체 식품 등으로 채워질 미래를 상상하고 싶다. 엄마 아빠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겐 당연해질 것들을 사람들이 계속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싶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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