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의 얼굴이 다가올 때 눈을 감았다. 똑같은 걸 먹었지만 그래도 나는 맞닿은 입술에서 오이 맛도 양상추 맛도 구별할 수 있다. 젊은 남자의 육체는 단단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부드러운가. 어쩌면 나는 이 녀석을 약간은 사랑하고 있는 걸까. 밤 공기가 효모처럼 감정을 부풀렸는지도 몰라. 입술을 떼고 말없이 눈 아래 펼쳐진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얘와 헤어진다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이 순간의 느낌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 P168

내가 한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도 내게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반항과 너그러움의 대비로 본다면 틀렸다. 투쟁 없는 관계가 좋은 관계일까. 그건 평화가 아니라 결핍에 가까운 풍경이다. 정상적인 가족이란, 너무 많은 감정들이 원형을 찾을 수 없이 촘촘히 얽힌 낡디낡은 담요 같은 게 아닐까. 화를 내고 미워하다 후회하는, 상처 주고 후련해하다 후회하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 담요는 차가운 유리섬유처럼 몸을 찌를 것이다. 뭐랄까, 나는 아버지의 화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감정의 균형이 너무 싫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한번쯤 뺨을 때렸다면 지금쯤은 지친 다리를 얼기설기 뻗을 수 있는 담요 같은 관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새삼스레 낡은 담요를 만들기엔 너무 늦었다. - P169

사랑의 비동시성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 P174

외로움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외로움이란 고독과는 달리 취향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고이는 느낌일 텐데. - P178

강아, 사람들은 인생을 통계 내기 좋아하지. 일생 동안 웃는 시간 얼마, 잠 자는 시간 얼마, 먹는 시간 얼마……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걸 알려주는 통계는 없어. 그건 각자의 몫이겠지. 일생 동안 행복했던 순간, 사랑 때문에 가슴 조였던 순간, 혼자 눈물 흘렸던 시 간, 그런 거. 강아, 그러고 보면 내가 나인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순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 네가 날 좋아한다는 것. 무언가에 휘둘려 그것마저 놓쳐버린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도대체 뭐가 남을까…… 그리고 지금 네게 가장 중요한 건 이 리포트를 제대로 완성하는 일이야, 이 바보야. - P1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