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의 시멘트 파인 곳에 괸 빗물에 더 이상 동심원이 생기지 않는다. 비가 그치자 성급한 햇살이 물웅덩이에 내리꽂힌다. 작은 무지개가 웅덩이에 생겼다. 창고 옆 플라스 틱 화분에 핀 치자꽃이 빗물에 씻겨 환하다. 대문간엔 재 활용 쓰레기가 쌓여 있고 노랗게 말라죽은 나무가 꽂혀 있는 플라스틱 화분 몇 개가 담 아래 어지러운데 왠지, 이런 풍경이 눈부실 수도 있구나, 싶다. 햇살보다 진한 꽃향기가 마당에 번진다. - P264

하긴 누가 누구에게 이 생을 거짓 없이, 착각 없이, 헛된 사랑 없이, 백일몽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을까. 미옥의 말마따나 무슨 좋은 끝을 보겠다고. - P275

‘쿨‘하다는 건 제 외로움도 남의 마음의 서걱거림도 읽을 줄 모르는 불치의 병을 이르는 것일 뿐. 난 좀 더 끈적이며 질퍽이며 절룩거리며 걷고 싶어. - P275

오늘은 여기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그랬다. 시멘트 바닥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을 가로질러 가며 부르는 승우의 노랫소리, 새로 촬영한 부분을 보여 주며 가끔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그의 눈빛,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걸 들고 와서는 나는 이게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몰라, 한숨처럼 내뱉는 미옥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씩 중독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만, 방충망이 뜯어질 때까지만,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 한시적인 허용이 남루하고 짜증스러운 풍경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무용하게 반짝이는 것의 아름다움과 이상한 생기를 발견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다. - P276

축축한 밤의 공기 속으로 승우의 노래가 골목에서 들려 왔다. 낮은 목소리가 젖은 꽃잎처럼 내 살갗에 점점이 들러붙는다. 인간의 욕망은 풍선과 같은 것이라는 걸 밤에 보았다. 나는 허공에 뜬 것 같았고 누군가 터뜨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P279

문제는 실재하는 위험이 아니라 그 위험이 실재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미지가 실재보다 중요하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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