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여자의 체온을 떠올린다는 건 묵은 잡지에서 지난해의 별자리 운세를 읽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 자신의 감정만 함부 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행운도 손에 쥘 수 있겠군요, 따위 영양가라고는 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 P213

생의 밑그림은 불안과 모호함과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란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어둡고 추운 거리를 오래 걷다 보면 불 켜진 모든 창 안은 순결한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지. 손톱으로 긁어 내기 전엔 밑그림은 보이지 않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운명의 문신이 내 어깨 어딘가에 새겨져 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견고한 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 P225

가장 두려울 때란 목이 졸릴 때가 아니라 손이 내 목 가까이 다가올 때다. - P228

내게 카메라는 이제 보이는 세상을 기록하거나 숨겨진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장기를 찍는 것에서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과 부딪히고 필살기의 에너지를 방어할 수 있는 테크놀로 지가 되어 줄 것이다. 한때는 내 영혼을 성장시켰고 이후엔 더운밥이 되어 주었으며 이제 가파른 벼랑에서 추락하려는 내 생을 붙들어 줄 사진. 생각해 보면 길지도 않은 생에 나는 피사체와 용도가 다른 사진들을 무수히 찍어 왔다. 이제 지난 나의 생을 돌이켜 보려면 그 시절에 내가 찍은 사진들을 기억해 보는 것이 빠를 것이다. - P234

싱크대 위, 목이 긴 유리컵에 흰 치자 꽃 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마당 가에서 꺾어 온 것일 게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치자 꽃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지러울 만큼 다디단 향을 내뿜는데도 꽃은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찢어진 여자의 눈두덩이 떠올랐다. 미옥이라고 했던가. 방을 나가기 전 미안한 듯 살짝 웃던 여자를 닮은 꽃이다. - P255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의 한 컷에서 특별한 의미를 읽어 낸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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