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이 소곤대는 이야기들이 나는 무척 좋았다. 그제야 그가 과제로 제출했던 글들이 하나씩 떠 올랐다. 살아온 날들에 관해 본격적으로 자세히 쓴 적은 없지만 그의 글 사이사이에 문득문득 삐져나온 과거의 궤적들. IMF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빚이 많았고 돈은 늘 없었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허덕허덕 일상과 일상을 이어 붙여가며 살다 보니 어디쯤에 도착해 있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IMF 키드들의 이야기. - P83
나는 흥콩에서의 삶을 무척 좋아했기에, 그 삶은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홍콩을 떠나온 내 결정이 치기 어린 선택이었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엄습한 채로 냉장고의 문을 닫곤 했다. 세상에. 최고의 술친구 를 만났다고 그 미래를 닫아버렸다니. 인생이 냉장고도 아닌데 냉장고 문 닫듯이 그렇게. 미쳤어.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며. - P89
멀어져 가는 트럭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났던 건, 골드스타를 더 이상 못 본다는 서운함도 컸지만, 냉장고 앞에서 막연히 느끼곤 했던 그 시절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걸 갑자기 깨달아서였다. 그랬다. 나는 이곳에서 보내는 355일의 몇 년들에 전혀 후회가 없었다. 다시 그날 밤 그순간으로 돌아가도 나는 T를 따라왔을까? 앱솔루틀리,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한국에서 살면서 끔찍했던 몇몇 순간들을 그러모은대도, 앱솔루틀리.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 P89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 P90
"음. 그럼 밖에서는 말고, 집에 가서 딱 1시까 지만 마시는 건 어때?" "그, 그럴까?" 너무 반색한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볼쯤 다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 다. 장소만 술집에서 집으로 바뀌었을 뿐, 새벽 서너 시까지 신나서 술을 마시고는 울다시피 출근했다가 기다시피 퇴근해서 기절하는 우리의 많은 과거들과 미래들. 청춘과 눈물. 환희와 고통. 사랑과 규칙. 수 많은 가급적의 이면들과...망할 헵타포드어.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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