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내리자마자 나는 박수갈채가 잦아들기도 전에 휴게실로, 코린토스 양식의 대리석 기둥과 나뭇가지 모양의 크리스털 촛대, 황금테두리 거울, 벌꿀색 벽지에 자주색 양탄자가 깔린 장대한 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둥들 중 하나에 기대어 도도하고 거만해 보이려 애쓰면서 호엔펠스 가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을 보았을 때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유대인 아이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볼 때, 채 몇 분도 못 가서 내 심장에 들어박히게 될 단검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통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친구를 잃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무슨 이유로 의심이 잠으로 달래지게 놓아두는 대신 증거를 요구해야 할까? - P111

이거 봐, 콘라딘, 너도 내가 옳다는 거 분명히 알잖아. 네가 나를 너희 집 안으로 불러들인 건 부모님이 출타했을 때뿐이었다는 걸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 정말 내가 어젯밤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어.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네가 오기 전까지는 외톨이였고 네가 나를 버리면 더더욱 외톨이가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네가 나를 부끄러워해서 네 부모님께 인사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어.
나를 이해해 줘. 나는 네 부모님을 사교적으로 만나 뵙는 거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 내가 너희 집에 침입자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딱 한 번, 딱 5분만 만나 뵙게 해달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또 나는 모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외톨이가 되겠어. 나는 세상의 모든 호엔펠스집안 사람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사람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누구도 나를 모욕하게 놓아두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왕도, 왕자도, 백작도. - P115

너는 누구에게나 네 이상적인 우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너무 심하게 세워! 너는 단순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해. 내 소중한 한스,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애써 봐. 그리고 우리 계속 친구이기로 해. - P120

천천히 콘라딘이 철 대문을, 그의 세상으로부터 나를 갈라놓는 문을 닫았다. 앞으로 내가 그 경계선을 다시는 넘지 못할 것이고 호엔펠스 가문의 저택은 영원히 내게 닫히리라는 것을 나도 알았고 그도 알았다. 그가 천천히 현관문까지 걸어 올라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불가사의하게 뒤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콘라딘이 돌아서서 내게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같이 손을 흔들어 주지 않았다. 나의 손이 풀어 달라고 울부짖는 죄수의 손처럼 쇠창살을꽉 그러쥐었다. 부리와 발톱이 낫처럼 생긴 독수리들이 호엔펠스 가문의 방패 문장을 높이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 P121

상황이 다시는 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우정과 어린 시절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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