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가 조심스럽다고 파괴력을 지니지 않은 건 아니다. - P54

너의 리스트는 이랬다. 『델러웨이 부인』 『삶의 한가운데』 『모래의 여자』, 『포스트맨은 받을 두 번 울린다』. 나는 네가 뒤라스의 『연인』은 리스트에 넣고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넣지 않아서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의 취향을 대부분 신뢰했다. 종종 너무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으로 일상을 구성하고 편집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스로의 약한 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는 스스로를 전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네가 가진 다른 부분에서 느낀 호감이 그 작은 부분들을 상쇄시켰다. - P58

괜히 차장을 건드리며 생각했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 좀 사람을 곤란하게 하더라, 하는 평은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너처럼 예의를 지키는 일이 각별히 중요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한참 만에 차가 움직이고, 너는 입을 열었다. 정면을 주시하는 너의 얼굴에 그래 이 사람이라면 괜찮아, 말해도 괜찮아.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해서 두려웠다. 듣게 될 말들보다 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말을 꺼내기로 한 너의 결심이. - P61

너는 너만 그렇게 현명하고, 그래서 남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도 알고 있고, 그걸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지. 나만 너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네가 아무리 가까이 와도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더 깊이 너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사이란 건 그 선을 조정해가며 우리 둘이 만들어가는 걸 텐데 너는 이미 선이 있고 항상 단호하고 나는 선이 있던 적이 없으니까. 늘 한쪽만 맡는 일이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 P64

지나간 너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한다. 제가 진짜 못 하는 일이거든요. 못하는 일. 그러니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과, 진짜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뭘까. 너와 규희와 그리고 나의 차이는 도대체 뭔가. 왜 규희와 너는 진짜 못하는 일을. 나는 종종, 자주, 제법 즐기며 하고 마는 걸까. 나는 규희가 사라지고 나서야, 여기에 없고 나서야 규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너를 이루는 조각과 내 조각들을 맞춰보고 비교한다. 화가 나서 던지기도 하고 소중하게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기이한 모양의 성을 쌓는다. 그게 규희가 떠난 뒤 내가 유일하게 몰두하는 일이다. - P66

블로그식 말하기구나. 나는 너의 화두를 들으며 그런 것을 감별 한다. 너는 점심시간에 네 명이 모였을 때 나누는 스몰토크로는 인스타그램식 말하기, 외근 나가는 길에 두셋이서 대화를 나누면 트위터식 말하기, 그리고 예외적으로, 아주 가끔 생기는 이런 둘의 시간에는 블로그식 말하기를 한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