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은 잊고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잊기 위해서 마실 때도 있고 잊어야 할 만큼 마실 때도 있다. 잊다가 잃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알코올이 다량으로 함유된 보통의 술자리는 어쩔 수없이 휘발성이다. 기실 술자리에 대한 기억은 ‘우리 어제 좋았지‘ 정도의 대략적인 느낌만으로도 충분할때가 많다. 취기가 무르익을수록 술자리는 지나친 동어 반복, 통제를 벗어난 감정 표출, 행위예술 수준의 보디랭귀지 등으로 범벅되니까. 그런 자리를 거듭해본 분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망각은 괜히 선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모두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적당히 흘려보내는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술자리, 그런 의식 있는 자리들의 집합소가 술집이다. - P108
언제 어디서나 술을 마신다는 점에서 술집이나 다름없는 <시시알콜>의 안주는 시다. 술과 안주의 마리아주로 맛을 극대화하듯, 술과 시의 페어링을 통해 감정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한 장씩 한 잔씩 나아간다. 시 앞에서의 술은 그저 사람을 취하게 하는 화학품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생각이 깊어지는 건 아니어도 마음만큼은 넓어지고, 그러면 세상 모든 화자의 감정을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되니까. 이해와 공감이란 때론 머리보단 마음의 영역이라는 걸 알려준 게 시와 술이다. -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