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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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인 <내 남자>는 음침하고, 나쁘고, 그럼에도 절절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때부터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사쿠라바 가즈키라는 이름을.

 

<토막난 시체의 밤(ばらばら死體の夜)>은 빚에 허덕이는 형편없는 여자와, 역시 빚에 허덕이는 제멋대로인 남자의 이야기다.

 

사바쿠는, 유복한 가정에서 별다른 어려움없이 나름 행복하게 자랐지만 부모를 잃은 날을 기점으로 불행의 낭떠러지 앞으로 끌려간다. 인생이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는 순간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의도와는 관계 없이 삼켜버린 절망이라는 씨앗. 하지만 아직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난건 아니었다. 다시 토해낼 수는 없겠지만, 노력하면 어찌어찌 더 크지 못하게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건, 사바쿠는 몰랐겠지만 본인 스스로가 자청해서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닥쳐온 불행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그녀 나름대로 취한 방법이란, 이렇게 된거 그냥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식으로 막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하면 헤어나올 수 없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욱 빨려들어갈뿐. 나를 치켜세우고, 나를 살게 하고, 나를 나로 있을 수 있게 하는, 그야말로 찬란한 '빛'이라고 생각했던 돈은, 그저 눈사태처럼 불어난 '빚'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요시노는 참 이상한 인간이었다. 위험하고, 더럽고, 그러면서도 흔들흔들 위태로워보이는. 교수 겸 번역가라는 어엿한 직업에, 미모의 아내와 똑똑한 딸까지 있지만 그는 늘 불안하다. 동화될 수 없는 가족, 쫓기고 감출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기에.

 

그는 사바쿠에 끌린다. 동족혐오라 해야 할까. 혐오하면서도 자연스레 그녀를 찾는다. 인위적이지만 미인인 사바쿠의 정돈된 얼굴과 거리가 먼 가지런하지 못한 난항치에 불가해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바쿠와 요시노는 비슷한 부류이며, 코드도 맞지만, 주파수는 맞지 않는 그런 관계에 불과했다.

 

요시노, 그리고 사바쿠는 위태로운 삶을 연명해간다. 비틀비틀 거리며, 바둥바둥 거리며. 토막난 인생은 좀처럼 복구되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몸도 마음도 삭아버린 늙은 요시노는 이제 그만 저 빛나고 반짝이는 세계에 섞이고 싶은데 좀처럼 가능하지 않다. 죽을때까지, 혹은 영원히. 그것이 신이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면 구원은, 없다.

 

 

"이게 재미있어. 전공이 그 분야인 동료한테 들은 건데, 귀향, 이라는 뜻의 노스토스, 라는 단어와 괴롭다, 는 뜻의 아르고스가 결합하면 그립다, 는 뜻의 노스탤지어가 된다는 거야." [P.60]

 

"노스토스와 아르고스야. 고통스러운 과거야말로 그리운 법이야. 따라서 인간은 과거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어." [P.62]

 

"근면한 태만, 지성과 무기력." [P.78]

 

"사회에 있어 진정한 적이란 젊은이의 반항 따위가 아니야. 왜냐하면 반항이란 내일을 만드는 에너지이기 때문이지. 진정한 적이란 말이지, 젊은이의, 퇴폐라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함. 우리들 한때의 반항은 결코 사회의 적은 아니었어." [P.108]

 

아아, 이 세상은 온통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르는 것에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동물이다. 지식을 얻어 그 어둠에 강한 빛을 비출 때 그제야 비로소 극복될 수 있는 공포도 있다. 빛에 익숙해지면 좋겠지만. [P.251]

 

"부자만 되면 무엇이든 손에 넣고, 누구보다도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게 아니야.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불행의 씨앗을 최대한 몰아내는 것. 그뿐이야."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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