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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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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본 문서는 연구 과정에서 열람한 자료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인용 및 배열은 열람 당시의 보관 상태를 따른다.

2014년 6월 14일, 도쿄 미나토구 소재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예학과 자료실에서 『노르웨이의 숲』(1987, 고단샤) 관련 보관 파일(JM-87/Box4)을 열람하였다. 해당 파일은 1990년대 초반 문예지 인터뷰 스크랩, 강연 정리 문서, 출판사 교정 이력 복사본 등을 묶어 둔 자료철이다.

파일 내부에서 별도 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타이핑 원고 30매가 확인되었다. 원고는 클립으로 묶인 상태였으며, 상단에 제목과 작성일 표기는 없다. 페이지 번호 역시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인쇄 상태와 용지 규격으로 보아 1990년대 중후반 출력본일 가능성이 있다. 교정 기호나 수정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동일 파일에 포함된 인터뷰 정리 문서에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 출간 이후 결말 구성에 대해 재검토한 적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해당 문서에는 “전화 이후의 시간에 대한 집필을 시도했다”는 요약 문장이 포함되어 있으나, 원 발언의 정확한 출처와 연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현재 유통 중인 『노르웨이의 숲』 판본에는 전화 장면 이후의 추가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 30매 원고가 해당 발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초고 단계의 개인 원고인지, 편집 과정에서 제외된 별도 버전인지, 혹은 단순한 구상 기록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아래에 제시하는 본문은 해당 30매의 내용을, 행갈이와 문단 배열을 유지한 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맞춤법 및 문장부호 또한 원문 상태를 따른다.

별도의 해설은 덧붙이지 않았다.


12장


내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주위는 한 줄기의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주위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깊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처럼 팔을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내 의식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천천히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팔의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바람소리가 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척 서늘한 바람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바람을 타고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사락사락 들려왔다. 종달새가 지저귀는 듯한 새소리도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두덩이 위로 물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곧 이어 소나기같은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내 머리를 적시고, 내 옷을 적시고, 내 온몸을 적셨다. 비는 곧 땅을 질게 만들었고 내 귀에는 진흙이 된 땅에 질퍽질퍽 부딪히는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와타나베."

어디에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왔다.

"와타나베."

그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와타나베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네가 지금 있는 곳을 말해줘 그럼 내가 거기로 당장 달려갈게"

미도리의 목소리였다. 나는 살며시 눈꺼풀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주위에는 내가 모르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나 지금 우에노 역 앞에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어. 미안하지만 여기서 지금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가 힘들어 네가 와주겠다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금방 갈게 기다리고 있어"

나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전화 부스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진이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스무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을 왕복으로 쉬지 않고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미도리가 뛰어오는 모습이 내게 보였다.

"와타나베 안색이 왜 그래? 너무 창백하고 헬쑥해졌어. 괜찮은거야?"

"어.. 아마 괜찮을거야. 그나저나 우리 어디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그래 그러자."

미도리와 나는 역 근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시키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락도 통 하지 않고"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은 미안해. 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거든 이제부터 천천히 얘기해줄게"

그렇게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모두 미도리에게 털어놓았다. 나오코가 죽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로 인해 내가 어떤 상실감을 안게 되었는지 또 그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혼자서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며 여행을 한 것과 이제 너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걸 토해내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난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한테 너무 신경도 써주지 않고 연락도 한통 없어서 서운하기는 했어. 하지만 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방금 네가 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만했다고 생각해. 그럼 이제는 조금 괜찮아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너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괜찮아진 기분이 들어. 어쩐지 너무 먼 길을 돌고 돌아 이 곳 까지 오게 된 것만 같아.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방금 말한 상실감이라는 것 말야. 그거 나도 뭔지 대강 알 것 같아. 얼마 전에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한동안 네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잖아? 나도 너처럼 그 상실감이라는 것을 메꾸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어. 정말이지 신기해. 나는 사실 아빠를 그렇게 사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근데 막상 아빠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깐 그렇게 마음이 허할 수가 없더라. 아마 그 기분은 누군가를 상실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기분일거야. 그래서 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어.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다고 해도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오로지 나만이 그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너 나를 만났을 때 나한테서 조금이라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었어?"

"아니, 전혀 몰랐어.

나는 미도리의 말에 살짝 놀랐다. 그 때 내가 만났던 미도리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고 명량한 모습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쩌면 그녀는 훨씬 단단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평소처럼 일상을 지내기 시작했지. 그러니깐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멀쩡해지더라? 그러더니 문득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나도 마찬가지였어. 어쩌면 너란 존재가 내게 버팀목이 되어서 이렇게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일지 몰라. 정말 너에게 고맙게 생각해"

"지금 너를 보니깐 아까 처음 봤을 때 보다 얼굴의 혈색도 좋아지고 눈의 초점도 또렷하게 돌아온 것 같아. 정말 보기 좋아졌어. 기분이 많이 나아졌나보네? 그럼 우리 이제 여기 어두컴컴한 곳을 벗어나서 어딘가로 좀 걷지 않을래?"

"그래 그러자"

미도리와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나와 도쿄의 거리로 나섰다. 서류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셀러리맨도 보였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는 노부부의 모습,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 무리의 모습도 보였다. 나와 미도리는 그 풍경 속에 전혀 이질감 없이 녹아들어 거리를 거닐었다.

“저기 그럼 말야.. 지난번에 우리 집에서 있었던 일.. 그 일 이후로 그거는 한 번도 하지 않았겠네?" 미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도리는 똘망똘망한 눈을 치켜뜨며 내게 말했다. 그 눈을 보면서 나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어제 했었어."

"뭐? 방금 전까지 그렇게 우울한 얘기들을 나한테 늘어놓았는데 그걸 할 새가 있긴 했어?" 미도리가 약간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말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었어. 나도 처음부터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래서 누구랑 한 건데? 연상의 유부녀하고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뜨거운 밤이라도 보낸 거야?"

"결혼은 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혼을 하고 혼자 지내는 레이코 씨라고 있어. 나오코랑 같이 룸메이트로 지냈던 분인데 좋은 사람이야."

"와타나베는 연상의 여자가 취향이었던 거구나. 정말 미안하네. 나는 연상의 여자처럼 기품 있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가 봐. 다 내 탓 인거겠지 뭐" 미도리가 자책하듯이 말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난 네게 상처를 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럼으로써 난 네게 좀 더 떳떳해질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믿어줘. 지금 내가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건 미도리 오직 너 뿐이야."

"어쩐지 사탕발린 말 같긴 하지만 너 지금 하는 말 꼭 진심이어야 할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나 이외에는 그 누구하고도 하지 않는 거라구. 다짐할 수 있지?"

"응 꼭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할게."

"나랑 약속하기로 한 거다? 나 두 번은 안 봐줘?"

"알았어. 맹세할게"

"근데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네가 사는 집을 그 연상의 여자는 먼저 가 본 거네? 심지어 나도 아직 너랑 해보지 못한 그것까지?"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질투 나서 안되겠네. 나도 오늘 와타나베 집에 가야겠다. 가서 내가 더 맛있는 저녁도 차려주고 너랑 더 오래도록 껴안고 있어야겠어. 불만 없지?"

나는 당연히 불만 같은 건 없다고 답했다.

"그럼 이 근처에서 우리 잠깐 장을 보고 들어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다 말하지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만들 거니깐 너는 그냥 먹기만 해"

미도리와 나는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전철을 타고 기치조지 역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내가 사는 집으로 함께 걸어갔다. 까마귀가 길게 늘어선 전봇대 전선에 나란히 서서 까악까악거리는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도리는 그동안 내게 많은 말을 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이번 학기에 패션 관련 교양 과목을 하나 수강하게 되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재미없고 따분한 의복의 역사 같은 것이나 읊어주지 정작 옷을 잘 입는 감각 같은 실용적인 것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둥, 이번에 도쿄 시내에 새로 알게 된 재즈 바가 하나 있는데 분위기며 음악이며 너무 좋았다고 나와 함께 꼭 가보고 싶다는 둥 지루할 틈도 없이 내게 계속 말을 건네 었다.
그녀와 함께 걸어가는 길 위로는 시원하고 산뜻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기분 좋은 가을날의 바람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단풍나무는 조금씩 선명한 빨간 빛으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걸어가며 잠시 나오코와 레이코 씨를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걸었던 거리와 풍경들을 생각했고 그들이 내게 주었던 위안과 따스함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오코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레이코 씨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너 여기 세 들어서 사는 거야?" 미도리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응 집주인이 따로 계시는데 같이 살고 계셔"

"그래? 그럼 인사드리고 와야겠다." 미도리가 다시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뭐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아니야 확실히 눈도장 찍고 와야지. 내가 와타나베의 여자친구인거를. 넌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는 저녁 장을 봐 온 것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집 주인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나는 멍하니 비닐봉투에 들어있는 알 수 없는 각종 식재료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도리가 돌아왔다.

"시간이 꽤 걸렸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거야?"

"글쎄? 넌 몰라도 돼. 그나저나 집 주인 할아버지가 너한테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있는 줄 모르셨다네? 할아버지한테 앞으로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여기 오는 걸 보면 꼭 나한테 일러달라고 부탁하고 왔어."

"그럴 일은 이제 없을 거니까 걱정 하지마."

미도리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곧 저녁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도리는 전쟁이 식초 절임, 두툼한 계란말이, 양념 삼치 구이, 가지 나물, 순채 장국, 버섯밥 등 그녀가 살던 집에서 내게 처음 해주었던 저녁 식사를 똑같은 메뉴로 내게 차려주었다.

"그때랑 똑같은 메뉴네?"

"왜 싫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감회가 남다르네."

"내가 노린 게 바로 그거야. 우리 오늘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날이잖아. 그러니까 뭔가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거 있지? 그래서 너한테 처음 차려줬던 그때 그 메뉴 그대로 다시 해본거야."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나는 식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 식탁은 어디서 산 거야?" 미도리가 내게 물었다.

"산 것은 아니고 여기 집 주인 분한테 얻어 온 거야. 자기는 이제 안 쓴다면서 혹시라도 필요하면 가져다가 쓰라고 하셨거든."

"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네.”

"뭐, 그런가?"

"그래, 이렇게 마루 위에 앉아서 나와 같이 저녁을 먹고 있잖아. 창밖 너머로 정원이 보이는 집에서. 비록 벚나무의 꽃은 다 져버렸지만."

"봄이 오면 또 꽃을 피울 거야. 그나저나 내가 갈매기라고 이름 붙힌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네?"

“갈매기?"

"응, 갈매기라고 흰 암컷 고양이가 있어. 가끔씩 먹이를 주고 같이 뒹굴 거리며 놀곤 하거든."

"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그런 셈인가?"

나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고 곧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미도리는 그 날도 그랬듯이 음식은 만들기만 해도 배가 차 버린다며 몇 번 젓가락질을 하곤 내가 밥을 먹는 모습과 창 밖으로 보이는 벚나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내가 말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같이 해"

우리는 음식이 비워진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이동하고 뜨거운 물을 틀고 그릇들을 헹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수세미로 세제를 받아 그릇을 닦고 미도리가 그릇을 물로 헹구어 냈다.

"요즘 언니는 잘 지내고 계셔?"

"응 아직 나랑 같이 그 집에서 살고 있어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랑 결혼 얘기도 오가고 그랬는데 뭐 아직까지 진전은 없나봐.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지 뭐 언니가 결혼해버리면 나는 그 집을 나오기로 했으니까. 나는 아직 그 집을 나올 만큼 충분한 돈을 벌어놓은 것은 아니거든"

"만약 언니가 결혼하고 네가 아직 충분한 돈을 벌어놓지 못해서 갈 곳이 없다면 여기로 와도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내가 여기 말고 갈 곳이 이제 어디 있겠어?"

설거지를 마치고 미도리는 가방에서 말보로 한 갑을 꺼내 담배를 한 입 베어 물고서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벚나무는 언제쯤 다시 꽃이 필까?" 미도리가 물었다.

"봄이 되면 다시 피겠지."

"꽃이란 건 말이야. 정말 슬픈 거 같아."

"왜?"

“저 벚나무는 한 번 꽃을 피우고 나면 다시 봄이 오게 될 때까지는 꽃을 피우지 못하잖아. 그리고선 다시 꽃을 피우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것에 비해 꽃이 피어있는 시간은 너무 짧아. 어쩐지 조금 불공평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닐까?"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영원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너도 참 엉뚱한 구석이 있구나." 미도리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가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저기 미도리. 나도 한 까치 주지 않을래?"

"뭐야, 담배를 끊었다 하지 않았어?"

"그냥, 혼자서 담배를 피우고 그러면 조금 쓸쓸하지는 않아?"

"내 기분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라면 괜찮아. 담배는 오히려 혼자서 피울 때가 더 맛있는 법이거든. 그래도 꼭 한 대를 피우고 싶다고 그러면 한 까치 줄게."

"아니야 괜찮아. 나는 그냥 그 쓸쓸함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건데 네가 그렇지 않다니깐 굳이 피우지 않아도 되겠어."

"너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쓸쓸해 보여?"

"그냥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잠깐 그런 생각이 든 것뿐이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피우는 거야. 일종의 습관 같은 게 돼버렸어. 그리고 나는 지금 너와 함께 있는데 쓸쓸할 이유가 뭐가 있어? 조금 있으면 밤은 더 깊어질 테고 우리 둘은 서로 발가벗은 채 저 침대 위에서 서로 뒹굴거리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 나는 미도리의 말에 쿡쿡 웃었다.

"너 지금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오늘 같은 날을 얼마나 기다려 온지 알아? 너는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심지어 네가 아까 말한 그 연상의 여자 때문에 나는 질투심까지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중이라고. 오늘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미도리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탈탈 털며 근처에 있던 가방을 끌고 와 열고선 칫솔을 꺼냈다.

"여기 치약은 있겠지? 그럼 나 먼저 좀 씻고 나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멀뚱히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녀에게 알겠다고 답했다. 미도리가 화장실로 간 사이에 나는 그 텅 빈 공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내게 기묘한 느낌이 감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레이코씨는 여기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었고 우리는 나오코의 장례식을 치렀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네 번씩이나 섹스를 했고 이제 그녀가 사라진 곳에는 미도리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어제 나는 왜 그녀와 몸을 섞었던 걸까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나를 딱히 유혹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격렬한 성욕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었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물고 점점 늘어져만 갔다. 그리고 미도리가 화장실 문을 탁 열고 나오면서 내 생각의 연장선은 끊어져버렸다.

"뭐야 그렇게 구석진 곳에서 왜 궁상맞게 혼자 웅크리고 있는 거야."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미도리가 말했다.”

“어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너 설마 아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오늘 네가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내가 너에게 실망이라도 할까봐?"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제 나도 좀 씻고 나올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짜고 양치를 했다.

양치를 마친 후 나는 옷을 벗고 샤워기에 물을 틀고 뜨거운 물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다. 그리고 내가 아까 했던 생각의 결론을 내기 위해 눈을 감고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생각은 계속 했지만 어쩐지 뭐라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샤워기를 잠그고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속옷을 챙겨 입은 채 화장실 문 밖으로 나갔다. 미도리는 빨간 속옷만을 몸에 걸친 채 다리를 꼬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때? 나 좀 야시시해 보여? 일부러 신경 써서 고른 속옷인데 괜찮아? 마음에 들어?"

“괜찮아 너한테 어울려"

"그래? 그럼 이리로 가까이 와봐"

미도리가 나를 손짓으로 유혹했고 나는 그대로 자석에 이끌리듯 점점 더 미도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의 손길이 너무 그리웠어. 나를 조금씩 부드럽게 어루만져줄래?"

나는 미도리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그녀에게 살며시 키스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미도리의 가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거 좀 거슬리지 않아? 확 벗어줄까?"

미도리는 누워 있는 상태로 등을 살짝 돌리고서는 브래지어 끈을 풀어내었다.

"어때 이제는 거슬리지 않지?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해줘."

나는 그대로 미도리의 가슴에 입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젖꼭지를 살살 애무해갔다.

"저기 와타나베, 나 거기 보고 싶어."

미도리의 말에 나는 애무를 멈추고 팬티를 벗었다. 하지만 내 페니스는 발기되어 있지 않았다.

"뭐야, 전혀 크고 딱딱해져 있지가 않네? 왜 저런거야?" 나는 당황했다.

"미안 모르겠어. 네가 매력이 없다거나 그런 문제는 전혀 아니야. 오히려 지금 네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너의 모습 중 가장 예쁘다고 말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발기가 전혀 되질 않아 미안해"

"그런 건 전혀 변명거리가 되지 않아. 너 설마 어제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어제 도대체 몇 번이나 그 여자하고 한 거야?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더 이상 힘을 못 쓴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오늘 너를 정말 만족시켜 주고 싶었어. 하지만 오늘은 아닌 거 같아. 오늘은 그냥 서로 꼭 껴안은 채로만 있을 수는 없을까? 따뜻하게 안아줄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거야."

"네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일부러 오늘 제일 야해 보이는 속옷을 골라 입고 온 건데 다음에 따로 또 속옷을 사러 가야겠네."

"내가 같이 가줄게.“

"안돼, 미리 보게 되면 재미없잖아. 나 혼자서 고를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와 미도리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나체로 서로를 꼭 껴안았다. 미도리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내 허리에 팔을 휘둘러 감았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주지 않을래?"

"무슨 말을 해줄까?"

“몰라, 그런 것은 네가 생각해. 한창 들떠 있었는데 네가 그걸 모두 망쳤어." 미도리가 살짝 토라진 듯한 말투로 말했다.

"너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뒤에 이름도 붙여서 말해줘. 이름 없이 말하니깐 꼭 무슨 다른 여자한테 하는 말 같아. 다른 여자한테도 이런 말 자주 하고 다녔지?"

"그럴 리가. 너는 정말 사랑스러워 미도리."

"아직 기분이 덜 풀렸어."

"너를 정말 좋아해 미도리."

"얼마나?"

"10월의 벚꽃만큼."

"10월의 벚꽃?"

“내가 만약 벚나무라면 어떻게든 너를 기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찬바람을 이겨내고 어떻게 해서든 꽃을 피워낼 거야. 그리고 너는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서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만 10월에 벚꽃이 피면 얼마가지 않아 금방 시들어 버릴 텐데?"

"상관없어. 네가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바보."

미도리는 숨을 소곤소곤 내쉬면서 잠이 들었다. 창 밖으로 달빛이 부옇게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나는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고 조그맣게 두근두근 들려오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창 밖에서는 점차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창문 틈으로 조금씩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몸이 점점 따뜻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미도리는 오늘 오전에 강의가 있다는 이유로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나는 배웅해주겠다고 했으나 혹시라도 지각하게 될지 몰라 뛰어가야 한다면서 서로 얘기를 나눌 새도 없을 테니 그냥 내게 집에 있으라고 했다.

"너, 어제는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에도 또 그러면 나 진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각오 단단히 해 둬.”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미도리가 사라진 텅 빈 방안을 둘러보며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레이코 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나의 이런 감정을 공유하고 상담을 요청할만한 사람은 그녀뿐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레이코씨. 아사히카와에서의 삶은 어떠시나요. 서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편지를 쓰는 건지, 이런 저를 우습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전에 말했던 미도리라는 여자아이 있지요? 오늘 그녀와 재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도 모두 속 시원히 이야기 했습니다. 다행히 그녀와 저는 말이 잘 통했고 이제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하게 되었지만 저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네 맞아요. 레이코 씨와 자버렸던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던 저를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미도리가 그 사실을 알고 어찌나 질투를 하던지, 진땀 빼느라 정말 혼났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녀와 잠자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실제로 할려고 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어쩐지 그날만큼은 제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제껏 그런 경험이 없었는데 정말이지 이상했어요. 사실 그녀를 안기 전에 저 혼자 있을 만한 시간이 있었는데 저는 그 때 레이코씨와 제 방안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했던 것을 떠올렸었습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레이코씨와 함께 있었던 이 방안에서 이제는 레이코 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들어온 것인데 왜 저는 그때 갑자기 레이코씨를 떠올렸던 걸까요? 그건 저 자신도 전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 날 이후로 저는 미도리를 껴안은 채 잠이 들었고 그녀는 방금 막 강의를 들으러 가야한다며 제게서 떠나갔습니다. 이제 나오코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미도리를 사랑합니다. 저는 여전히 미궁 속을 헤매이며 빠져 나오지 못한 듯 싶습니다. 도대체 어떻게해야 이 미궁 속을 해쳐나올 수 있을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짐을 잠시 맡기려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여전히 제게는 의논할 사람이 레이코씨 말고는 없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아사히카와에서의 레이코씨의 새로운 삶 응원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답장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편지를 쓴 후 곧바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레이코씨에게 답장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사히카와에 도착한 후 아직 짐을 정리조차 못했는데 이렇게 와타나베 군한테 편지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예전에 말한대로 나는 친구의 권유로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 하려고 해요. 아직 시작조차 못한 단계라 뭐가 어떻다 저렇다 이야기 할 거리조차 없네요.
그나저나 미도리씨와의 관계가 진전된 것 정말 축하해요. 당신은 이제 멋진 인생을 보낼 날만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정말 부러워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신이 얼마나 많은 고뇌와 역경을 이겨내 갔는지 제가 모든 걸 알 수는 없겠지만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답니다. 앞으로 와타나베군에게 있어서의 새로운 인생! 저도 응원할게요.
저도 물론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지만 와타나베 군에게 아직도 나오코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다면 말끔히 씻어내리는 것이 아마 좋겠어요. 슬프지만 나오코는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아요. 와타나베 군이 나오코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건 그 마음은 이제는 전할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미도리라는 사람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이제는 곁에 함께하는 사람이 생겼잖아요. 비워낼 것은 비워내고 집중해야 할 것에 온 마음을 다하는 거에요. 그러면 와타나베 군에게도 미도리 양에게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와타나베 군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은 남자가 자기 이외의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것을 아주 끔찍이도 싫어해요. 와타나베 군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해요.
그나저나 저 또한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미도리 양에게 질투심을 유발해버렸다니 그거 참 미안하게 생각되네요. 혹시라도 그 일이 여전히 미도리 양에게 신경을 쓰이게 만든다면 저를 대신 해서 전해주세요.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꼭 안심시켜 주어야 돼요. 여자들은 그런 것에 아주 민감하거든요.
어찌되었든 이제 와타나베 군에게도, 저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날만이 기다리고 있겠네요. 부디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할게요. 제 조언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요. 아무쪼록 가끔씩 편지 해주세요. 낯선 곳에 다시 정착하려니 영 쓸쓸하고 외롭네요.
그럼 안녕히.

10월 27일
이시다 레이코


나는 레이코씨에게 온 편지를 읽고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 날 나는 왜 레이코씨와 관계를 맺었던 걸까. 어찌되었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날 이후로 내 속에 있던 나오코에 대한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점차 흐려졌다는 것이다. 나오코를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고통스러운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그날 레이코씨가 나와 나오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고통을 치유해주는 매개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13장


한 학기가 끝난 후 미도리와 나는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각자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도쿄 중심 시내에 위치한 한 신발 가게에서 새로 일을 시작했다. 일은 단순했다. 일주일에 3번씩 물류가 도착하고 창고 안에 재고들을 정리한 후 신발 사이즈를 찾는 손님이 있으면 사이즈에 맞는 신발을 창고에서 꺼내와 손님 발에 신겨드리고 손님이 구매를 원하시면 계산대에서 계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전에 페인트 칠을 했던 일에 비하면 보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몸은 편해서 좋았다.
신발 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미즈하라는 동갑내기와 친밀해졌다. 그는 나와 같은 연극부 학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작가나 배우가 되겠다거나 되고 싶다는 생각 없이 연극부에 입학한 반면 그는 어떻게든 꼭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 같은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유독 좋아했고 샤를 보들레르와 스테판 말라르메, 아르튀르 랭보, 폴 베를렌, 귀스타브 플로베르 등을 즐겨 읽는다고 하였다. 음악은 영국 음악, 그 중에서도 락을 특히 즐겨 들었으며 비틀즈, 롤링스톤즈, 크림, 더 후 등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는 꽤나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었지만 자기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많은 말을 했다. 나는 어쩐지 그런 그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고 일이 끝난 뒤에 그와 함께 가게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너는 장래에 뭐가 되고 싶다든가 그런 게 아직은 없는 거야?" 그가 내게 물었다.

"뭐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내가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돈방석 위에 앉아서 나뒹굴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없어. 계속 생각해봐야지."

"하지만 너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그렇지."

"끝까지 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

"끝?"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냐고."

"글쎄 너무 먼 미래의 얘기처럼 들리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비교적 어릴 때 진로를 생각해놓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세상이 아무리 꽃밭같이 아름다워 보여도 빌어먹을 돈이 없으면 꽃을 볼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야."

"뭐 아무래도 그러겠지. 그래서 너는 언제쯤 여자친구를 만들 셈이야?"

"몰라.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 예쁜 여자하고 단 둘이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도 딱히 없어. 언젠간 만나게 되겠지 뭐."

"하지만 넌 진로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우린 아직 찾아야할게 많은 것 같아."

나와 그는 함께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혔다.

미도리는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살면서 이런 일은 젊을 때 말고는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며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어쩐지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미도리의 모습이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와타나베! 언제 한 번 내가 일하는 곳으로 놀러 오지 않을래?"

"너 일하는 것은 어쩌고?"

"괜찮아 하루 정도는 쉴 수 있으니까 나 남자친구가 생기면 놀이공원에서 데이트 같은 거 꼭 한번은 해보고 싶었어. 어때? 놀러 올 꺼지?"

"물론이지"

나는 내가 일을 쉬는 날인 화요일에 미도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다. 미도리의 말에 의하면 주말에는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연인 같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려서 놀이기구를 탈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비교적 사람들이 덜한 평일에 오는 것이 좋다는 이유였다.

"나 말야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 매일 한가롭게 앉아서 지도에 해설이나 쓰는 일만 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역시 이런 일은 젊을 때 말고는 할 수 없는 거겠지? 와타나베는 나처럼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여자애가 저렇게 사람들을 안내해 주는 것이 좋아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얼굴에 주름살이 보이는 여자가 안내해 주는 것이 좋아?"

"나이에 맞는 역할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 놀이공원이라는 곳은 아무래도 생기발랄한 느낌이 드는 곳이니깐 미도리 너처럼 예쁘고 귀여운 여자애가 일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울리겠지"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물어보는 거는 어느 쪽이 더 좋나는 거야"

"당연히 미도리 같은 여자애가 일하는 것이 더 좋지"

내 대답에 미도리는 방긋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여기서 일하면서 나와 함께 타보고 싶었던 놀이기구가 있었다며 나를 끌고 갔다.

"와타나베는 무서운 거 잘 타?"

"나는 스릴을 즐기는 편이어서 곧 잘 타고 그래"

"나는 여기에서 일하면서 항상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 혹시라도 롤러코스터의 안전바가 풀려버려서 사람들이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그 롤러코스터는 더 이상 운행을 못하게 되겠지. 어쩌면 점점 이 놀이공원을 찾는 사람들 또한 줄어들게 될거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 또한 점점 줄어들게 되겠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아직 여기서 더 일하고 싶은데, 다 늙어서도 와타나베하고 같이 이 놀이공원을 찾아와서 오늘 같은 시절들을 떠올리고 싶은데 안전바가 풀려버린다면 그런 미래는 그려볼 수 없는 걸까?"

"너는 참 일하면서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아니야?"

"상상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다 일어날 수 있을 법하다고 여길 수 있어"

"그래? 그럼 와타나베는 나처럼 예쁜 여자애하고 같이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걷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 있어?"

"너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상상해 본 적 없어"

"뭐야 지금 거짓말이지. 그냥 나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정말이야 너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상상을 할 여유도 없었고 그런 상상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어"

"거짓말 같긴 하지만 나를 기분 좋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성공이야 축하해"

미도리와 나는 그 놀이공원에서 가장 빠르다고 소문이 난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도리의 말처럼 혹시라도 안전바가 풀려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 방금 탔던 것처럼 그렇게 빠른 롤러코스터는 처음 타 봤어. 저 롤러 코스터가 시속 160km라나? 세상에서 가장 빠른 롤러코스터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대. 그 사실을 알고 어찌나 저거를 한 번 타보고 싶던지. 오늘 소원성취 했어"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미도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정말이지 미도리 같은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도리의 그 표정을 오래 볼 수는 없었다. 곧이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난데없이 비가 내리다니. 나와 미도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몸을 옮겼다

"뭐야 오늘 같은 날 하필 비가 내리다니 비가 올 거라는 예보도 없었는데 속상해"

"너무 속상해하지마. 오늘만 날이 아닌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미도리가 가장 타보고 싶어 했던 놀이기구를 하나 타보긴 했잖아. 저 롤러코스터를 탄 후에 비가 내리는 거를 어쩌면 우린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 미도리는 울적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나를 바라보았다.

"와타나베는 속상하지 않아?"

"나도 물론 속상해. 네가 내 곁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너는 아마 헤아리지 못 할 거야. 그렇지만 우리 계속 이렇게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네가 우울해져있는 모습을 보기 싫어. 조금 더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서 네가 밝아진 모습을 보고 싶어"

"와타나베는 참 세심하고 다정하네.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좋아. 내 기분에 동화되지 않고 나를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주려는 거 말야. 정말 좋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다행이야. 우리 뭐라도 조금 먹지 않을래?"

"좋아"

나와 미도리는 각각 치즈 불고기 버거 세트를 하나씩 시켰다. 미도리의 말에 의하면 놀이공원에서 파는 음식은 하나같이 가격만 비쌀 뿐이지 맛은 전혀 그 값을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비교적 저렴하고 맛도 어느 정도 보장 되어 있는 햄버거를 먹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고 했다.

"너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주로 어떤 음식들을 먹어?" 나는 감자튀김을 케찹에 찍어 먹으며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구내식당이 따로 있어. 거기서 어머니뻘 되는 분들이 항상 밥을 차려주셔. 그러면 나는 구내식당에서 그저 내게 주어지는 대로 먹는 것뿐이지. 여기서 일하다 보면 몸이 녹초가 되어버려서 입맛 같은 것도 없어. 진짜 말 그대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는 것뿐이야. 연료를 넣어야 움직이는 자동차처럼 말이야"

“너 되게 고생하고 있구나"

"내가 말했잖아. 이런 일은 젊을 때 말고는 할 수 없는 거야. 나는 더 늙기 전에 내가 해보고 싶은 거는 모두 해보고 늙고 싶어"

"너는 정말 진취적이구나. 또 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

"너랑 자는 거?"

미도리의 대답에 나는 그만 사례가 들려 기침을 하고 말았다.

"어머! 와타나베 괜찮아? 내가 너무 발칙한 대답을 한 건가?"

"어 괜찮아. 잠깐 사례가 들려서 기침을 한 것뿐이야"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내가 그냥 너를 놀려먹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 같아?"

”어느 정도는?"

"그런 의도도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내 진심이기도 해. 우리 지금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해본 적은 없었잖아. 서로 발가벗은 몸만 보고 말이야. 나는 말이야 내 몸이 더 늙어서 주름이 져버리기 전에 탱탱하고 예쁜 몸으로 너하고 하고 싶어. 내 마음 이해해?"

"나는 네 몸에 주름이 져도 여전히 너를 사랑할 거야"

"거짓말. 저번에 내가 제일 야한 속옷을 입었는데도 너는 거기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잖아"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정말이지?"

"응 정말이야"

"너는 내가 그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를 거야. 심지어 나는 자괴감까지 느꼈다고. 저번에는 멀쩡하게 발기되었던 네 그곳이 왜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설마 벌써 내 몸이 익숙해져버려서 아무런 흥분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

"미도리 그건 너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어. 오히려 내 쪽의 문제였지. 나도 몰랐는데 그때는 내게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제는 모두 괜찮아졌어. 너를 실망시키거나 속상하게 만드는 일은 정말 다신 없을 거야. 자, 약속할게"

미도리는 토라진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내 새끼손가락에 손을 감고 내 엄지에 자신의 엄지를 꾸욱 눌렀다.

"그러면 오늘 집에 가지마"

"뭐?

"나랑 밤새 같이 있자고 오늘은 너랑 쭉 같이 있고 싶어"

"하지만 나는 내일 일을 나가야 하는데"

"너 오전부터 일해? 오전부터 일 하는거면 오후파트 뛰는 사람이랑 잠깐 하루만 교대하고 그러면은 안돼?"

"글쎄 일단 한번 물어볼게"

"알았어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얼른 물어보고 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공중전화 부스가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미즈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미즈하 나 와타나베야.“

"오늘 쉬는 날 아니야?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내일 오전근무 나 대신 좀 나가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 그래?"

"나 지금 여자친구하고 같이 있거든."

"그런데? 뭐 나 놀려먹고 싶어서 전화한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자친구가 생떼를 부리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나 대신 대타 한 번만 뛰어주라. 오전에 일찍 나와서 기분좋게 일하고 오후에 기분좋게 퇴근하는거야. 내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너 그 여자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너를 평생 저주할거야."

"알았어. 부탁 좀 할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일 봐."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미도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됐어? 잘 된 거야?"

"응 다행히도 아무런 문제없이 교대할 수 있을 거 같아." 내 대답에 미도리는 환히 웃어보였다.

"그럼 우리 얼른 이 근처 호텔 예약부터 하자. 나는 여기 직원이라서 할인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어때 이런 여자친구 두니깐 여러모로 쏠쏠한 점이 있지?"

"그렇네. 정말로 미도리 같은 여자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


"와타나베 지금 무슨 생각해?"

나는 발코니에 팔을 걸친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미도리는 내 등 뒤로 꼭 달라붙은 채 나를 팔로 감싸 안으며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미도리가 숨을 내쉬며 가느다랗게 떨리는 진동이 내 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냥,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미도리와 내가 예약하고 들어온 호텔의 방은 19층이었고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정말 고요한 분위기였다. 고층인 만큼 바깥 풍경은 훤히 내려다 보였으며 비가 그친지는 얼마 되지 않아 밤공기는 서늘하며 촉촉했고 짙게 깔린 안개가 푸르게 잠겨 들어가는 하늘빛과 희미한 산능선의 경계를 흐릿하게 감추고 있었다. 어쩐지 나오코와 레이코씨가 머물렀던 요양병원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와타나베.. 여기 정말 분위기 좋지 않아? 이렇게 조용한 곳에 너와 단 둘이 있으니깐 정말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져 있는 듯 한 기분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정말 좋은 곳이야"

"와타나베.. 저 달을 보면서 나를 위한 시 한 편 써줄 수 있어?"

"난데없이 갑자기 무슨 시야?"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와타나베는 연극부 학생이잖아.. 나 어쩐지 그런 로망 같은 것이 있어. 와타나베는 평소에 시라든가 글 같은 거 안 써?"

"가끔씩 쓰긴 하지만 누구에게 보여줄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누구에게도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고"

"나 와타나베가 쓴 시 궁금해. 지금 나를 위한 시 한 편 지어 줄 수는 없어?"

"글쎄, 갑자기 지어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시라는 건 말야 음, 내가 쓰고 싶다고 해서 뚝딱 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시라는 건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서 말하자면 쓰는 게 아니라 쓰여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니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잠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나 대신 팔을 움직여서 시를 써 놓고 가는 거지. 나는 지금까지 보통 그런 경험으로 시를 써 왔어"

"와타나베.. 너에게는 어딘가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 나는 너의 그런 점이 정말 좋아. 혹시라도 저 달을 보면서 나를 떠올릴 때 그 누군가가 너의 몸 속으로 들어가 시를 써놓고 사라진다면 그 시 나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기꺼이"

미도리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더 꽉 껴안으며 내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기대었다. 밤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고 산맥을 따라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점점 쌀쌀해져가는 것을 느낀 나와 미도리는 발코니의 문을 닫고 침대 속으로 이불을 덮고 들어갔다.

"와타나베 우리 같이 야한 영화 보지 않을래?"

"너는 야한 영화 보는 걸 정말 좋아하는구나"

"꼭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같이 야한 영화를 봐야 네가 갑자기 흥분해서 나를 덮치지 않을까 해서 그래. 갑자기 그런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니깐 나는 어색해서 그런 건데.. 너는 그렇지 않아?"

미도리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채 이불을 덮고 얼굴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호텔 방 안의 조명은 노란 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고 창밖으로 영롱한 달빛이 방 안으로 환하게 비쳐들어 미도리의 고운 얼굴을 더욱 더 우아하고 감미롭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미도리, 너 지금 정말 아름다운 거 알아?"

"아이 뭐야 왜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분위기를 잡고 그래. 같이 야한 영화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런거면 솔직하게 이야기 해 나도 굳이 보지 않아도 상관 없으니까."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너 정말 너무 아름다워."

"정말? 얼마만큼 아름다운데?"

"이 세상 모든 빛이 저 달빛 속으로 빠져 들어갈 만큼 아름다워"

"정말 좋아.. 네가 생각한 거 맞아?"

"맞아 방금 누군가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이 구절을 내게 전해주고 갔어"

그리고 나는 미도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

"잠깐만!"

"왜 그래?"

"우리 아직 씻지도 않았잖아. 일단 우리 서로 씻고 나오자"

나는 한참 분위기가 달아올랐다고 생각 했으나 미도리의 말이 옳았다. 나는 미도리에게 먼저 씻고 나오겠다고 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나는 양치부터 하기 시작했다. 이빨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따뜻한 물로 입을 충분히 헹구어 낸 후 샤워부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몸을 녹여냈다.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나서야 수도꼭지를 잠갔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가벼웠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복잡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낸 후 속옷을 입고 가운으로 몸을 덮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미도리도 뒤이어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도리가 나오기 전까지 가운을 덮은 채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미도리가 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 그녀를 어떻게 맞이해야할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결론이 아직 맺어지기도 전에 미도리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와타나베.. 나 그 쪽으로 가도 돼?"

미도리의 머리카락은 살짝 젖어있는 채로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고 얼굴의 피부는 뽀얗고 약간 분홍빛 홍조를 띄고 있었다. 미도리 또한 몸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저번과는 다르게 어쩐지 쑥스러워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이지"

"저기 나 오늘 저번에 본 것 보다 더 야시시하고 섹시해 보이는 속옷을 입었는데..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보여주지 않을래?"

"기꺼이"

미도리는 조금씩 가운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조금씩 드러나 보였다. 미도리는 속이 조금씩 비치는 검은색 망사 속옷을 입고 있었다.

"어때? 나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지지 않아? 신경써서 고른건데"

"너한테 잘 어울려 정말 마음에 들어"

"정말이야? 나 그냥 기분 좋게 해주려는 빈말 같은 거 아니지?"

"빈말 아니야. 정말로 아름다워. 어쩌면 네가 홀딱 벗은 것 보다 그 속옷을 입고 있는 편이 더 아름답다고 느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에게 잘 어울려"

그래? 그럼 그냥 이거 입은 채로 할까?" 나는 별 다른 대답 없이 그녀의 말에 쿡쿡 웃었다.

"와타나베.. 나만 이렇게 벗고 있으니깐 나 조금은 부끄러워지려고 해 너도 이제 그만 가운을 벗지 그래?" 나는 그녀의 말에 가운을 벗어 던졌다.

"와타나베.."

미도리가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와 내게 키스했다. 그리고 내 몸을 조금씩 침대에 눕히었다.

"와타나베 오늘 과연 얼마나 크고 딱딱해져 있을지 내가 한 번 확인해 봐도 될까?"

"좋으실 대로"

미도리는 내 속옷을 두 손으로 천천히 벗겨 냈다. 그리고 내 페니스는 단단히 발기되어 있었다.

"오늘은 아무런 문제가 없네? 다행이야 어쩌면 이 녀석을 다시는 써먹지 못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야"

"그런 걱정이라면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될 거야" 미도리는 내 대답에 작게 미소지었다.

"여기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줘 너에게 모든 걸 맡길게"

미도리는 내 페니스를 손으로 움켜쥐고 조금씩 그 감촉을 느껴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입 속으로 내 페니스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어때 내가 이렇게 해주니깐? 기분이 좋아?"

"응 너무 좋아.."

"기분이 너무 좋아져버려서 갑자기 발사하고 그러면은 안돼 아직 본게임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야 이제 나도 좀 기분 좋게 해주지 않을래?"

나는 알겠다며 미도리를 내가 방금까지 누워있던 자리에 눕히었다.

"방금까지 네가 여기 누워있어서 그런 건가. 네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제 진짜로 내 체온을 전해줄게"

나는 미도리의 목부터 가슴, 배를 지나 음부까지 천천히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른손으로는 언덕처럼 봉긋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졌고 손가락으로 브래지어에 감춰져 있는 젖꼭지를 가볍게 문질렀다.
미도리의 가냘픈 숨결이 조금씩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와타나베.. 나 이제 진짜로 하고 싶어. 그만하고 나한테 넣어주지 않을래?"

"알았어"

나는 몸을 일으키고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그리고 내 페니스를 그녀의 음부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걸리적거리면 이거 그냥 벗어버릴까?"

"아니야 괜찮아. 옆으로 잠깐 젖히면 돼" 그리고 나는 내 페니스를 조금씩 그녀의 안으로 집어 넣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줘"

"으응.. 아직은 괜찮아"

나는 미도리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씩 더 깊게 그녀의 안으로 내 페니스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미도리는 몸을 살짝 떨면서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다 집어 넣은거야?

"응 괜찮아?"

"응 조금 아프긴 하지만 괜찮아. 이제 조금씩 살살해줘"

"알았어"

나는 미도리를 껴안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움직일 때 마다 내 귓가에선 그녀의 신음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와타나베.. 좀 더 거칠게 하고 싶으면 거칠게 해도 돼. 내가 그동안 참아온 만큼 와타나베도 많이 참아왔지? 오늘 시원하게 훌훌 털어버려 내가 다 받아줄게"

나는 미도리의 말에 조금씩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부와 내 페니스는 좀 더 빠르게 마찰하였고 그럴수록 미도리의 숨결은 더욱 더 격해졌다.

"미도리 나 이제 곧 사정할 것 같은데"

"괜찮아 오늘은 안에 해줘" 그렇게 나는 미도리의 안에 사정했다.

"많이 아프지 않았어?"

"아니 정말 좋았어 와타나베.. 사랑해"

"마찬가지야"

그날 나와 미도리는 두 번을 더 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번이라도 더 할 수 있었지만 내일 오후에 일이 있었기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사정을 마친 후 미도리는 내 품에 안겨서 가느다란 한숨을 쉬이 내뱉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와타나베 나 사랑해?"

"물론이지. 사랑해 미도리."

"좀 더 멋있는 말 없어?"

"멋있는 말?"

"응. 사랑해라는 말은 뭔가 식상해.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아." 미도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겨울날의 나비만큼 사랑해.”

"겨울날의 나비?"

"응,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이 들이닥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봄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리고 마침내 꽃이 피면 온화한 햇빛이 비쳐드는 들판 위에서 나는 너라는 꽃을 찾아내고 너는 내게 달콤한 꿀을 선사하는 거지. 그런 거 왠지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아?"

"응, 정말로 좋아." 나는 미도리를 꼭 껴안았다.

"최고" 그녀가 말했다


*


나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지만 미도리는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어제는 나 정말 즐거웠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야. 조심히 돌아가고 일이 끝나고 나면 내게 연락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미도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전철을 탔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 해 12월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었고 차창 밖으로는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꽃은 모두 지고 무성했던 나뭇잎들도 모두 나가떨어졌다. 거리는 텅 비어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간판의 네온사인만이 부옇게 거리 위로 물감처럼 번져나갔다. 차가운 도시의 모습이었다. 적막한 도시 속에는 싸늘한 냉기만이 감도는 듯 했다.
이윽고 전철이 잠시 정차한 사이 차창의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스쳐지나갔다. 무척이나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내 피부 깊숙이 파고들어 내 온몸을 차가운 기운으로 뒤흔들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작년의 봄을 떠올렸다. 올해의 겨울을 맞이하기까지 피고 진 수많은 꽃들을 생각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중심에 미도리가 서 있었다.
바람은 내 안에서 구름을 몰고 비를 내렸다. 울창한 숲 속에 나뭇잎 위로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람이 거세게 들이닥치고 거목들의 이파리들이 서로 세차게 부딪혀댔다.

“와타나베.”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내 귓가로 들려왔다.

“와타나베.”

미도리는 그 숲 속의 중심에서 애타게 내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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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대우고전총서 4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승종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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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언어는 그 쓰임이 중요하고, 언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전 속에서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때 그때 기능하게 된다. 언어가 역동적인 이유는 언어가 세계를 묘사하기 이전에, 세계 안에서 ‘행위’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의 기원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공동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타인의 행동을 조정하고 예측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언어는 처음부터 ‘의미 체계’ 가 아니라 상황 속 반응을 연결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삶이란 것 자체가 진리나 사랑같은 단일한 목적만을 지녔다면 언어란 것은 단일한 구조가 되었겠지만 현실의 삶이란 생존, 협력, 갈등, 감정 표현, 권력, 놀이, 위로, 기만, 설득, 고백, 약속 등등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을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기능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언어는 단일한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목적에 즉석으로 전용될 수 있는 범용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어란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를 지닌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붙힌 기능들의 축적물이다. 언어란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니라 사용되어지면서 그렇게 굳어버린 흔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언어의 구조란 깔끔한 논리 체계로 잡혀 있는 게 아니라 삶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퇴적층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언어에 다양한 사용 양식이 겹쳐지는 이유는 언어가 세계의 본질을 담기 위해 생긴 체계가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단일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 수없이 다른 행위들을 즉석에서 연결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무엇을 꿈꾼다는건 내가 미래에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라는 소망을 단순히 “꿈꾼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을 꾼다” 라는 명제에서 ‘꿈’이라는 명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위치를, ‘꾼다’라는 동사는 그 미래를 향한 소망과 지향을 뜻한다.즉 “꿈꾼다” 라는 말은 단순히 꿈을 꾼다는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의미 전체를 압축해 놓은 표현인 것이다. 사실 언어의 이러한 쓰임은 굉장히 다양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가끔은 그러한 축약형 문장들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요즘에는 더더욱 언어가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대충 묶어서 유통시키는 장치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 축약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지만, 동시에 사유의 세밀함을 희생시키게 된다. 그래서 언어란 늘 편의성과 오해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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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자유다
해공 지음 / 근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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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된 사람은 스스로 부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부처가 되었다’ 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부처고 나발이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부처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그렇게 보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없는 것이 보인다니, 이보다 더한 역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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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유로 가는 길, 나는 없다
해공 지음 / 책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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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부처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부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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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방황 - 1937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동근 옮김 / 소와다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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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중순, 나는 교환학생 자격으로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예학과에 머물고 있었다. 여름학기 ‘일본근대문학사 세미나’에서 다나카 나오키 교수님은 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교수님께서 무심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자이의 미발표 원고가 존재할지도 몰라요.”
나는 웃으며 “농담이시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교수님은 잠시 말없이 서랍을 열더니, 오래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빛바랜 일본제 원고지 위에는 또박또박 이렇게 쓰여 있었다.
『虚構の波(허구의 파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교수님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원고를 홀로 기숙사 방에서 읽었다. 몇 줄 지나지 않아, 문체의 리듬과 문장의 체취에서 이상할 만큼 다자이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듯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자정이 다가올 즈음, 나는 원고를 번역하며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미흡한 느낌은 있지만, 이것은 분명 다자이의 목소리다.

이 글을 여기에 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진실이든 허구이든, 그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그 파도를, 누군가와 함께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럼, 이만.


허구의 파도 (虚構の波)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물론 각자에게, 달린 것이지만, 나를 손가락질 하며 비웃고, 뻔뻔하다며, 오해받을 생각을 하면, 그만, 몸서리가 쳐진다. 내가 고통스러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 아니라, 곧, 너의 고통이 되리라. 나는,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살아있기 때문이다.
때는, 5월 중순, 한낮의 햇살이,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나는, 도쿄에서 요코스카선을 타고, 가마쿠라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이즈에 도착했다. 바닷바람에 섞인, 소금 냄새를 맡으며, 좁다란 골목길을 걷다보니, 누추한 외관의, 여관이 보였다. 금전이 풍족하지 못한 탓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여주인이 나를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묵으시러 오셨나요?"

"네, 가장 저렴한 방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여관 2층으로, 안내받았다. 작은 방 안에는 다다미 4장 크기의 바닥과, 낮은 쇼지 문이 있어, 바람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한낮의 열기가, 방안을 가득 메우며, 내 얼굴은, 조금씩 땀방울로, 흥건해졌다. 눈이 따끔거렸다. 여름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바다의 물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즈로 내려오기 전, 나는 도쿄에서 부모님의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형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얹혀사는 신세였다. 언제나 똑같은 곳, 똑같은 하루, 일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말도 없이, 대책도 없이, 이 곳으로 훌쩍 떠나온 것이다.

"무슨 일을 하세요?"

대뜸 방문을 연, 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호통을 칠 새도 없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이 여관의 종업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여행객인가 싶었다.

"그 쪽은 무슨 일을 하나?"

"저요? 별다른 직업은 아직 없고, 이 여관은 저희 부모님이 하시는 곳이거든요. 지금은 그냥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여관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손님이 들끓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손님이 없어 심심한 탓에, 말동무가 필요했던건가 싶어, 나는 슬그머니 내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을까 싶었다. 어차피, 길게 볼 것 같은, 사이도 아니니까,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을, 조금은, 털어놓아도 될 듯 싶었다.

"철딱서니 없는 손님이셨군요."

내가 잠시,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던 찰나였다. 잠자코,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여자는, 그동안의 내 말을 듣고, 무엇인가 독자적인 판단을 내린 것인지, 나를 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는 졸지에, 이 나이를 먹고도, 철딱서니 없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난생 처음 본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천성이 속이 좁은 나로서는,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고요하고 어색한 침묵만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럼 쉬었다 가세요."

나는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려,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어쩌면, 이 바다를 보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활한 바다를 보면, 마음이 뻥 뚫린다는, 감상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멈추지 않지만, 멈출 수도 있으며, 그대로 머무를 수도 있다. 이보다, 매혹적인 세계는, 없을거라 생각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여름 햇살에, 뜨끈하게 달구워진, 모래자갈의 감촉을 느꼈다. 파도치는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눈 앞에 펼쳐진, 바다라는 세계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웃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그대로 바다로 몸을 내던졌다.

"어머, 민망해라."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 나온 순간, 여관에서 봤던 그 여자를 마주쳤다. 사람이, 지독히도 없는 모래사장이었다.

"수건이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요?"

"금방 마르겠지."

구름이 잔뜩 낀 여름 하늘은, 조금씩 검은 빛깔이,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곧 비가 올 모양이에요."

"그럴 모양이군."

"우산이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나는 피식, 웃음 지었다. 머지않아, 하늘은 점점 잿빛 구름으로 뒤덮이더니, 정말로 빗방울이 미세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진짜 비가 오네.”

“그러게요.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겠어요.“

이렇게 여자와 나는, 우산도 없이, 모래사장에서 여관까지 뛰어갔다. 여자가 정말 우산이라도 챙겨왔으면, 느긋하게, 비 떨어지는 소리나 들으면서, 운치있게 바닷가 풍경도 내려다보며, 걸어올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염치도 없이, 여자가 은근히 원망스러워졌다.

”우리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요. 이름 정돈 서로 알아두는 게 어때요?“

”슈지라고 해. 쓰시마 슈지.“

본명을 말했다.

”저는 도모에라고 해요. 오가와 도모에.“

나는 아까부터 느낀, 여자의 관심이,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려려니할 뿐이었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순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육지에 두 발을 딛게 되니, 점점 배가 고파져 오는 것이, 단순히 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세계 속에, 호출되는 신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저녁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아, 저녁이요? 저녁은 나가서 사 드셔야되요. 저희는 식사까지 제공하는 여관은 아니거든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리를, 잘 모르는 탓에, 여관에서 제공하는,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쉴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게 됐다.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다면, 이 여관으로 오는 게 아닌데, 결국엔, 가난한 내 탓이라 여겼다. 돈이 없으면, 인간은, 방황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옷을 새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저기요!”

그 여자였다.

”잠시 멈춰요! 당신이 너무 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어요. 가지마요. 여기 있어요. 요리는 제가 금방 만들어드릴께요. 아니면 저라는 요리는 어때요? 아, 미쳤나봐, 이게 아닌데. 잠시만, 이리로 오세요.“

정말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요릿집을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관으로 향했다.

“안주는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일단 술부터 내와주게.”

여자는, 곧바로 술을 내왔다.

“잔이 왜 두잔이지?”

“아, 저도 함께 마시려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안주는 금방 가져다드릴께요. 뭐가 좋으시려나? 건어물 좋아하세요? 아니면 국물 요리가 좋을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국물이 좋아요. 그럼 어묵탕을 내와드릴께요.”

꽤나 들뜬듯 보였다. 안주는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혼자서 술을 마셨다.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 덕분에, 운치가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며, 멜랑꼴리한 감상에, 젖어있던 참이었다.

“문은 닫아주세요. 방바닥이 다 젖겠어요.“

”뭐 어때. 운치있고 좋기만한걸.”

“정말 철없는 도련님이 따로 없군요. 못 말리겠네 정말. 얼른 닫아요. 남들이 우릴 보는 건 싫어요.”

“우릴 본다니, 누가 우리를 본다고 그래.”

여자는 아무래도, 나와 단둘이,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언뜻 보니, 화장도 고친 것 같았다. 갑자기, 여자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닥이 축축해지면 이따 잠자리가 불편해져요.
얼른 닫으세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운치는 커녕, 점차 난폭하게만 들려온 탓에, 급하게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계속 정처없이 돌아다닐 생각이신가요?”

“글쎄. 여기 눌러앉아 그 쪽 기둥서방이라도 할까?“

”장난치지 말구요.“

”사실은 소설을 쓰고 있어. 슈지는 본명이고 예명이 따로 있지. 오사무라고. 다자이 오사무. 못 들어 봤나? 하긴, 들어봤을리가 없지. 유명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유명한 작가의 작품만 탐독하지, 나처럼 무명의 작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다들 시가 나오야가 뭐가 그리 좋다는건지. 쳇.”

“어머, 소설가셨군요. 아까 그런 얘기는 왜 안하셨어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이 워낙 밝기도 하고, 거리가 가까웠던지라,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무명이니까. 얘기해봤자 이름도 모를텐데 뭐하러 얘기하나. 백수라고 떠벌리는게 마음 편하지. 오히려 작가라고 으스대다가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어정쩡해지는 표정보다는 처음부터 경멸당하는 표정이 좋다구.“

술을 마시다보니, 나도 모르게 취기가 올라,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질뿐만 아니라, 나의 추한 속내까지, 남김없이 토해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 말해야겠어. 문단의 노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추잡한 노인네들 뿐이야. 직접 겪은 것도 아니면서 남의 이야기를 빌려와 잘도 써제끼지. 그러면서 독자들로부터 어쩜 그렇게 실제 경험처럼 잘 쓰냐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 같다면서, 다들 칭송들을 해대는데 정말 봐줄수가 있어야 말이지. 쳇. 그런건 누가 못하나?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지. 양심이 없는거야 양심이. 진실이란 진실같은 가상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허구같은 현실 속에서 드러나야 되는거란 말야. 정말 다들 글러먹었어. 돈 벌 생각뿐이지. 명예에 눈이 먼 장님이나 다름없어. 처자식이 우선이야. 정말 외롭군.“

혼자서, 분통을 터뜨러가며, 계속 술을 들이켰다. 여자는, 말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럼 저와 있었던 일을 소설로 써주실 수 있나요?“

”뭐라구?“

”저를 당신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요.“

”그 쪽하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일이야 앞으로 만들어나가면 되죠. 당신은 허구를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이 기만이라고 느끼는거죠? 그럼 제가 당신의 희생양이 되어드릴께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옷깃을 풀어헤쳤고, 가느다란 어깨선이, 조금씩 드러났다. 살결이, 정말 뽀얗다고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멈춰.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는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소설이고 나발이고 뭣도 아니에요.“

나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선,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여자의, 급작스런 말과 행동 때문에, 술기운이 깨는 것 같았다.

”왜 안된다는거죠?“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일을 벌인다고 생각해봐. 그건 너무 평범해. 뻔하다구. 너무 단조로워서 사람들이 시시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류의 소설은 욕망에 잠식당한 얼간이들이나 읽는거야.“

“뭐가 평범하다는거죠? 제 마음이, 저의 순정이 평범하다는건가요? 일상의 단조로움을 특별하게 만드는게 작가의 의무 아닌가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그러니까 무명인거지. 이 방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앞으로 소설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일은 절대 없을거에요. 뭐야, 알고보니 그냥 시시한 남자였네.”

나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의 말솜씨가, 너무 좋았던 탓에,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 했다.

“아니, 절대 그것만은 하지 않겠어. 당신은 지금 그 얘기를 빌미로 나와 몸을 섞으려고 하는거지? 처음 본 순간부터 눈빛이 수상했어. 보아하니 이 근처에 남자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마침 내가 먹잇감이 된 거야. 굶주려 있었던거지. 군침을 흘렸을거야. 어떻게 저 남자를 구슬려볼까, 고심했겠지. 알고보니 정말 추악한 여자였군. 심지어 이 여관은 당신네 부모님이 운영한다고 하지 않았나? 겁나지도 않나? 정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잖아. 당신은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나는 유명하지 않다고는 해도 어엿한 작가라고. 소설가가 만만해보이나? 어때. 놀랐지? 들켰지? 사람들이 내 이름 따위 모른다고 해도 좋아. 나는 양심을 지킬거야.“

여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 마음을 그렇게 짓밟으시다니. 제가 당신한테 그렇게 추악하게 비추어졌나요? 부모님이 근처에 있건 말건 그건 또 무슨 상관이에요. 정말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남자였네. 그런 윤리 의식으로 무슨 소설을 쓰겠다고. 사람 잘못봤네요. 당신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럼 이만.”

그렇게, 여자는 내게서 떠나갔고, 나는 방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찌됐든 간에, 나는 술을 왕창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간신히 붙들어 맨 채, 여자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이튿날이었다. 비가 그치고, 화창하게 개인 날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오히려 계속, 방안에 머물고 싶은,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하던 참이었다. 여자가 대뜸, 방문을 열며, 아침식사를 가지고 왔다.

“잘 주무셨나요.”

“뭐야, 식사는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나는 여전히, 여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차리는 김에 그쪽 몫까지 한 것 뿐이에요. 돈은 요구하지는 않을테니까 양껏 드세요.”

어제 있었던, 불미스런 일 때문인지, 여자가 내게 베푸는 선행이, 괜히 나를, 어떻게든 꼬드길려는, 속셈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허기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들었다. 여자는, 아침상만 내게 갖다준 채,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 또한, 고도의 심리전 같다는 생각에, 입 속으로 밥을 우겨넣으며, 혼자서 코웃음을 쳤다.
오후가 되어, 나는 주변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한 주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늘은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면, 또 그 여자가 나에게, 술을 권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런 상황만큼은, 반드시 모면하리라, 다짐했다. 다시 떠올려봐도, 어제의 상황은, 정말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른 시간 탓이었는지, 혹은 그저 동네에 사람이 없는 탓인건지, 주점 안에 손님이라곤 오직, 나 하나 뿐이었다. 안주인도 말수가 적은 사람인지, 주문만 받을 뿐이었다. 다행히 나 또한 그렇게 주절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혼자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번듯한 직업도 없이, 형에게 얹혀살며, 대작가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존심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실상 나는 걸작은 커녕, 이렇다할 작품 하나, 쓰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한심할 따름이었다. 어제 있었던, 그 불미스런 일을, 떠올려봤다. 나는 명예에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의 인정도, 필요없다. 단지 이 지긋지긋한, 고뇌의 종지부를 찍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진실이나 거짓같은 말들에, 갑자기 신물이 났다. 인생이란 무대가 지겹다. 이 지겨운 무대를, 영원히 잊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고주망태가 된 채로, 나는 흐느적흐느적, 비틀대며, 거리를 걸었다. 여관 앞까지, 당도하게 됐다.

“술을 많이 마셨나봐요. 취하신 것 같은데.”

그 여자, 아니 도모에였다.

“그 쪽 걱정 따윈 필요없어. 또 날 꼬실 작정이지? 저리 비켜. 오늘 밤도 혼자 보낼꺼니까. 자상한 척 하긴.”

그때였다. 어디선가, 장지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저 사람인가?”

“어머니!”

그 여자의, 모친되는 사람같았다. 아무래도, 어르신이었기에, 그 사람에게 마저, 실례되는 말을, 지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며 한다는 말이, 도리어 실례가 되는 것 같았다.

“아, 어머니신가? 안녕하세요. 다자이, 아니 슈지. 그래, 슈지라고 합니다. 여관이 소박하긴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정말 좋네요. 잘 묵고 있습니다. 따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털끝하나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따님이 누굴 닮아 이렇게 곱나 싶었는데, 역시, 어머니였군요. 하하. 누가 더 고운지는, 물어보지 마세요. 그건 곤란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잖아요. 도리가 있죠. 자존심 앞에서는,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부모라 해도, 양보할 수 없는 거에요. 특히 여자라면, 더욱 그렇지. 얼굴에 주름만 져도, 난리들을 쳐대니. 그러면 문제가 너무 쉬워지는데? 아닌가? 딸국.“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말들이었다. 확실히 술은, 죄악을 부르는 요물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취해있던지라, 정신이 없었다.

“듣던대로 재미있는 청년이네. 반가워요. 제가 괜히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제 눈치는 보지 말고 편하게 지내다가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람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가와 도모에. 어차피 이 여자와는, 아무런 일도 없을테니, 첫인상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단지, 어르신에 대한, 예우만을 갖췄을 뿐이었다. 아무리 소설가라고 해도, 현실 속에서는, 도덕을 고수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도모에는 다시 유혹하려는 듯, 살금살금 뒤따라왔다.

“바로 주무실건가요?”

“응. 너무 취했어. 바로 자버릴거야.”

“씻지도 않으시고 주무시면 안되죠. 많이 취하셨으면 제가 대신 씻겨드릴까요?”

“뭐야, 응큼하긴. 필요없어.”

“응큼한 건 그쪽 같은데요. 얼굴만 씻겨드리는건데. 무슨 생각을 하신거죠?”

당한건가, 싶었다. 어쩌면 도모에의 말대로, 정말, 내가 더, 응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본능의 유혹이란, 역시 인간이라면,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모양이다. 취한 탓이었는지, 도모에의 뽀얀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만 보였다.

“오늘 좀 예뻐보이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취해서 그런가. 어울리지 않게 헛소리를 다 하시네.”

“아니, 정말 예뻐보여. 아니, 예쁘다. 정말 예뻐. 취해서 그런 게 아니야. 오늘 같이 자버릴까? 당신도 원했잖아. 그냥 같이 자버리자.”

“슈지씨. 지금 당신은 취했어요. 취한 남자하고 자는 건 싫어. 맨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놓고 아침에 깨면 저를 또 멀리할거죠? 내 얼굴을 보고선 경멸을 느낄게 뻔해. 그렇게 이용당하는 건 싫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어차피 인간은 망상 속에 살든, 현실 속에서 살든, 그게 그거야. 우리는 취해야 돼. 그래야만 이 시궁창같은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거라고. 보들레르가 그러지 않았나? 취해라! 그래, 그거야. 그냥 나랑 같이 취해버리자. 그게 좋겠어. 진실이건 허구건 집어치우자. 그냥 취해버릴란다. 오늘 나는 당신에게 취해버릴거야. 이리와!”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통 기억이 없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 여겼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보니, 도모에는 내 곁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저질러 버린 것 같았다.

“일어났어요?”

“어? 어.. 잘잤나?”

“어색하게 왜 그래요. 역시 취한 거 였어. 제가 지금 꼴보기 싫은거죠?”

“아니야. 그게 아니야. 정말 좋았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 때문에 어색한 것 뿐이야. 아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이제는 소설 따위 쓰고 싶지 않아졌어. 당신과 함께한 밤이 너무 좋았거든. 사실 기억도 잘 안나지만, 뭐 어때?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게 맞는걸지도 모르겠어. 소설 따위, 때려치워야지. 당신 덕분이야.”

“무슨 소리에요 그게. 때려치겠다니. 정말 좋았으면 저를 소재 삼아 로맨틱한 소설을 한 편 써줘요.”

“아니, 나도 이젠 정말 모르겠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야. 그냥 이 곳을 떠나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곧바로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고선, 그 여관을 떠났다. 나를 붙잡으려는, 도모에의 손길 때문에, 꽤나 애를 먹었지만, 결국, 그 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여나, 마음이 약해질까봐, 뒤도 안돌아보고, 질주했다. 무사히, 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나니,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도쿄로 돌아온 나는, 형의 일을 도와가며 살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소설을 쓸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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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창가 2026-02-04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우연히 보고 너무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의 미발표원고를 번역해주신 건가요 ? 감성이 너무 좋네요.

koko4817 2026-02-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은 제가 쓴 소설이고 다자이 오사무의 미발표 원고를 번역했다는 부분은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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