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와 마고의 백 년
매리언 크로닌 지음, 조경실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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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두꺼운 책을 잡으면 조금 망설여진다. 이 책이 재미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몇 번을 다시 폈다 들었다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레니와 마고의 백년, 이 책은 며칠 동안 낼 수 있는 여유 시간을 다 내도 끝까지 읽지 못해서 아쉬웠다. 자그마치 499쪽이나 되는 거대한 소설이니까. 3일간 퇴근하고는 다른 일을 제치고 계속 붙잡고 읽어 내려갔다. 오랜만에 열심히 책을 읽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슬퍼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리거나 나이가 많거나 모두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혼자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버거울까? 


레니가 그랬다. 17살의 레니는 병원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다. 누군가 데려다 주어야만 다닐 수 있는 그런 환자인 레니가 마치 병원이 모든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던 레니가 만난 병원 안의 사람들은 레니에게 무언가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성당에 가서 아서 신부를 만났을 때 믿는 것과는 크게 관계 없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신부를 당황하게 할 때도 그랬다. 미술실의 피파를 만나서도, 마고를 만났을 때도 17살 아이 같지 않고 마치 인생 80은 산 듯한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또래와 같은 반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한참 지나서 생각해보니, 이미 레니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마주 보는 나이 많은 어른 같은 생각까지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80 이상의 노인들과 같은 반을 선택했고, 거기서 마고와 같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마고와 레니는 둘이 합친 나이 백 년을 백 개의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약속했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 그림과 함께 꺼내 놓는다.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를 보듬고 사랑했고, 도 우리에게서 달아났던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우리는 예전에 간 적이 있는 어떤 장소를 지나다가 누군가를 마주칠 수도 있다. 복도에서 지나치며 한번쯤 본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우리를 잊어버린다. 다른 사람이 찍은 수백 장의 사진 속 배경에 우리가 있다. 누군가의 거실 선반 위, 액자에 끼워진 사진 속에서 움직이고,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서 배경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우리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그렇게 우리는 계쏙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거로는 충분치 않다. 거대한 실체의 작은 입자로 존재했던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우리는 더 많은 걸 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우리 이야기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알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우리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나의 52년의 나이만큼 그림과, 이야기를 써 보라고 하면 사실 당황할 것 같다. 큰 사건이 없는 해라면 딱 떠오를 것 같지 않으니까. 하지만,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마고는 하나씩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고, 레니 역시 17년 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기 그림을 완성해갔다.

아서 신부와 레니가 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것을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찡했다.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는 신부와, 17살 죽음을 앞둔 소녀가 만나 소녀의 하찮은 질문들에 나이든 신부가 점점 더 정성스럽게 마음을 열어가는 것을 보면서 더 그랬다. 

나는 성당의 여러 냄새를 들이마셨다. 제단 위에서 시들어 가는 꽂꽂이에서 나는 달콤하면서도 슬픈 향기, 카펫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신도석을 덮은 먼지 냄새.

“아서 신부님?”

“그래. 레니?”

“저 보고 싶으셨어요?”

“그래. 레니. 아주 많이.”

83세 마고의 인생은 사실 순탄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믿을만한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가 곧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고 옆에 있던 남편도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던 마고를 자기 집에 살도록 도와주고, 함께해 준 미나라는 여자친구와 참 긴 세월 동안 관계가 이어진다. 친구라기보다는 연인처럼 미나와의 인연을 죽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나간다. 쉽지 않은 긴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어떤가 생각하게 되었다. 50대의 내 나이에 나는 어떻게 버텨왔을까? 잘 버텨내고 아름답게 자신의 생을 정리하듯 83개의 그림을 그려낸 마고처럼 나도 내 인생을 잘 정리하고 있을까? 

“만약 제가 갈 때가 되면 간호사가 알려줄 거예요. 오시라고 병원에서 전화가 갈 거예요. 그때는 와서 작별 인사를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게 진짜 작별 인사는 아닐 거예요. 지금이 진짜예요. 제가 아직 레니일 때. 지금은 이렇게 관을 꽂고도 저녁 식사가 언제 올지 기다리잖아요. 환자식으로 나오는 딸기 요거트를 좋아하니까요.”

점점 더 아파가는 자신 옆을 지키던 아빠에게 오지 말라고 말하던 레니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그 말을 듣는 아빠의 마음도 느껴졌고, 그 말을 하던 레니의 마음이 문득 창 밖에 세차게 내리는 빗물 같았다. 레니는 17살 아이 같지 않게, 너무 많은 것들을 겪었나 보다. 

비록 내 영혼이 어둠 속에 묻힌다 해도 결국엔 환한 빛 속에 다시 떠오를테니, 밤을 두려워하기에는 나는 별을 너무도 깊이 사랑했다네.

“우리 눈에 보이는 가장 선명한 별도 이미 죽은 별이라는 거, 알고 있어?” 마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가 되게 슬픈 말인데요.” 나는 마고의 손을 놓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슬픈게 아니라 아름다운 거야. 별들이 얼마나 오래전에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별들을 볼 수 있잖아. 별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있는 거야.”

별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있는 거였다.

레니는 이제 병실 밖을 나오기도 벅차서 미술실까지 오기 어려웠다. 마고가 레니를 보러 와서는 같이 밖으로 나가서 함께 별을 본다. 이미 사라진 별들도, 누군가가 볼 수 있다면 살아 있듯이, 기억속에 오래 남아 있고, 나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살아 있는 거라는 뜻이 아닐까?

“엄마도 모르겠어, 마고. 하지만 아직 작고 소중한 시간이 남았잖아.”,“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작고 소중한 일들이 있어.”.“벽장에 아직 작고 소중한 게 남았어.”

작고 소중한 건 어떤 걸까, 나는 혼자 상상하곤 했었다. 파랗고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작은 유리 장신구 같은 것일까? 아주 조심스럽게 손에 쥐어야 하는 것. 어딘가 가져가려면 티슈로 잘 싸야 하지만, 막상 그런게 있으면 나는 주머니에 넣는 편을 더 좋아했다. 그런 상상도 했다. 어머니와 여섯 살 된 내가 식탁에 작고 소중한 것을 올려 놓고, 둘이서 그걸 어떻게 나눠 먹으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

이제 내게는 그런 작고 소중한 것만 남은 기분이었다. 혼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건 이 이야기를 끝내야 겠다는 생각 뿐.

마고와 레니가 번갈아 가면서 1인칭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서 그럴까? 두 사람의 삶이 모두 평탄치 않고 사건이 많아서일까? 이런 마고의 말을 듣다보면 마고의 이야기가 참 따뜻하다. 어떤 삶을 살았건 마고를 지탱해 준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같은 친구 미나도 그랬고, 남편 험프리도 그런 사람일거다. 

레니는 그렇게 함께 하던 사람들 곁을 떠났다. 그리고 마고에게 자신이 아끼던 돼지 인형 베니를 전달해 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베니를 받은 마고는 떠난 레니에게 긴 편지를 썼다. 

베니는 내가 잘 돌봐준다고 약속할게. 베니랑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매일 베니 코에 내 코를 문지르며 인사를 하고 있어.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베니를 데리고 다닐께. (중략)

만약 수술이 잘 되면 난 비행기를 타려고 해. 한 번 더 미나를 보러 가려고. 미나가 만든 반지가 내 손에 맞는지 볼거야. 그리고 ‘예스’라고 직접 말할거야.

만약 깨어나지 못하면 그 때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널 만나러 갈게. 어느 쪽이 되든 가슴 설레는 여행이 될 것 같아. (중략)

정말 고맙다. 사랑하는 레니야. 네 덕분에 죽는게 훨씬 재미있어졌단다. 

맨 마지막은 떠난 레니가 남긴 글이었다. 레니의 마지막은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아서 더 마음을 흔들었다. 죽음을 마치 마지막 비행기를 타는 공항으로 나타내고 있다. 

‘터미널’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공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결국 이번에는 체크인을 하게 됐다. 거의 확실하다.(중략)

나는 출발 라운지에, 다른 승객들 사이에 서서 커다란 통창 너머로 비행기를 내다보며 생각한다. 

이게 다야? 내내 그렇게 두려워했는데 이게 전부라고?

이런 거라면 괜찮다. 

가까이서 보니 별것도 아니구나.

17살 소녀지만 83세의 마고처럼 깊고 파랗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고를 만나서 17살의 삶이 참 가치있다고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도 레니처럼 이렇게 내 죽음에 별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고처럼 마지막이 가슴 설레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마음을 잘 덮어주는 마고와 레니를 만나서 아주 많이 좋았다. 나도 두 사람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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