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 데이즈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당시 우리를 가뒀던 새장이 이렇게 작았었나 하며, 나는 넥타이를 살짝 풀어 내 마음속을 지그시 더듬어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만질 수 있는 건 자그마한 구멍 자국뿐이다. 그 구멍은 두 가지 사실을 내게 가르쳐준다.

 과거 언젠가 그곳에 무언가가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과 지금은 분명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때, 그렇게 눈부시다고 생각했던 그 애의 이름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P.87-

 

1.

 

 혼다 다카요시라는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체인 포이즌>이라는 책을 통해서 였습니다. 섬세한 문제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미스터리와 더해져 그동안 읽었던 일본 소설과는 닮은 듯 다른 인상을 심어주었었는데요. 이번에 읽게 된 <파인 데이즈>역시 '혼다 다카요시'만의 독특한 색채로 기이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총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은 여느 단편집들과는 달리, 실려있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지루하단 느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 취향이 지나치게 반영된 견해일지도 모르겠다만, 사랑에 대한 상상을 확장시켜나간 이야기들은 괴담류의 환상과 어우러져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합니다. 명확한 끝이 아닌 조금은 여운을 주는 듯한 결말도 이런 몽환적인 분위기에 일조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각각의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로워, 장편으로 나왔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녀가 바라는 미래가 있었고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있었다. 그 두 세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걸 알고 있다는 데 미묘한 죄의식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다가 나의 어리석음에 말을 목 안으로 삼켰다.

 

-P.141-

 

2.

 

 네편의 이야기는 모두 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Fine Days>에서는 저주를 내리는 아름다운 미소녀가 등장하고, 두 번째 이야기 <Yesterday>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젊은시절 애인을 찾아 과거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이야기 <잠들기 위한 따사로운 장소>에서는 미래를 예측하는 오누이가 등장하며, 마지막 이야기 <Shade>에서는 노파의 동화같은 이야기 속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인과관계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작가는 섬세한 필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끝이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제 기준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화해 방법들이 결말부에 드러나지만,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소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전반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성냥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눈치 채지 않게 지그시 심호흡을 했다. 노파처럼,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불을 켜지는 못하겠지. 나라는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빈약하고 초라한 불밖에 켤 수 없다.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고 말 그 작은 빛을 나는 정말로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해보자. 내 안의 모든 힘을 다 끌어내서.

 나는 성냥을 켜고 천천히 양초에 불을 붙였다.

 

-P.314-

 

3.

 

 서칭을 해보니 대부분의 독자들이 영화화 된 <Yesterdays>라는 작품을 가장 인상적인 단편으로 꼽았는데요.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였던 단편은 마지막 작품이였던 <Shade>였습니다. 어둠으로부터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램프를 만들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애잔하면서도 환상적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액자식 구성을 취하여 소설 외부와 내부의 구조간 연결성을 준 것도,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오마쥬한 듯한 내용 설정까지. 단순히 이야기로만 즐거웠던 것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이였습니다.

 몽환적 색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리는 책 <파인 데이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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