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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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 P7

하면 고통에 대한 증언을 전문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날것의 정보도, 그렇다고 그 자체로 완벽한 말도 아닌, 고통에 대한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런 자리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뒤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증언자들이 힘차게 증언하고, 참석자들이 공명하고, 정치적 결의를 하고 난 다음이다. 참석자들이 떠나간 자리, 혹은 증언자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난 다음의 문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고통에 다른 사람들이 공명함으로써 증언자들은 힘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홀로 남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묻곤 했다. "이 고통이 끝나긴 할까요?"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고통을 고통으로 지속시켰다. 따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고통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 끝난다면 그 모든 걸 접을 수 있다고 했다. - P8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염려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어떤 말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혹은 소통하지 못하면서 누구와 세계를 짓고 또 누구와의 세계는 부수고 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쓸 수 있는 언어로는 어떤 세계를 짓는 것이 가능한가. 혹 그 언어로 주변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수는 것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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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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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식의 풍자, 볼테르식의 철학적 허구, 그리고 우화식의 SF는 모두 우리에게 빛을 전해 줄 뿐, 온기는 없다. 인류에 대한 보편 진실을 찾기 위해, 이런 글들은 개별 인간들의 강력한 저항정신을 포기하고 가야 한다. 다른 소설들은 거기에서 활력을 얻는데 말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 방식들은 스스로를 남성으로 성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을 비하할 수도 있고, 여성을 남성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끼울 수도 있으며, 아예 여성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두가 18세기나 그 이전 모든 세기의 문학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SF는 너무 자주 인류의 절반만으로 "미래"를 창조함으로써 장르의 지적, 도덕적 잠재력을 좁힌 나머지, SF 하면 다 사내아이들을 위한 순진한 모험담이라 치부할 수 있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자료에 나오는 솔라리스학의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모두 남성으로 보인다. 현재 솔라리스에 가 있는 과학자들은 모두 - P240

남성이니, 분명 이전에 갔던 팀도 모두 남성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쓰인 진지한 소설이 여성을 아예 포함시키지 않고서 지적 영역을 구축하려 한다면,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누락을 통해 어떤 선언을 담는 셈이다. 독자는 당연하게도 혹시 지적인 영역이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걸까 생각할 수 있다. 혹시 여자를 받아들이면 그 영역은 무너질까? 이건 그런 암시일까? - P241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 쓰는 작가는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한다. 하나는 오해와 와전, 즉 잘못 진술하는 것이다. 또 하 - P252

나는 착취와 강탈, 즉 잘못하는 짓이다. 지배적인 집단에 속하면서더 힘없는 집단 구성원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작가들은 그런 위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무관심으로 위험을 감수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그런 무지는 결과를 망친다.
콜럼버스는 자신들이 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이들의 통제자이자 소유자이자 정당한 착취자로 타고났다는 백인의 확신을 신세계에 가져왔다. 인디언들은 그 후로 줄곧 그 어마어마한 특권 의식에 맞서 왔다.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와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 - P253

모하비 땅 깊숙이 자리 잡은 외딴 방목장에서 사는 사우스보이는 인디언들과 함께 섞여서 자랐고, 알고 있는 것 대부분을 인디언들에게 배웠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많은 부분 인디언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인디언은 아니다. 그는 피가 섞인 게 아니라 문화와 정신과 마음이 섞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영혼이 있다. 그리고 열다섯의 나이에 그는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영영 떠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성인이 된다는 건 언제나 자기 사람들을 찾고 망명에 나서는 일,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 P255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가늘게 비치는 빛은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고독한 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오직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함으로써만 옳은 일을 하고 남편을 지킬 수 있다. 그녀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눈이 먼 척하지만 사실은 눈이 멀지 않았기에, 견딜 수 없는 참상들을 목격해야 한다. 그녀의 딜레마 속에는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는 냉소적인 옛말이 들어 있다. H. G. 웰스는 그 격언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뛰어나면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쓰기도 했다. 사라마구는 그 반박을 더욱 발전시켜, 지난 50년간 세상에 나온 가장 강력한 도덕 소설로 만들어 낸다. 나에게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고, 20세기의 가장 진실한 우화다. 이 작품은 위기에 마비된 이 기묘한시대에 문학이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라마구는 2010년 여름, 87세에 사망했다. 그해 가을, 휴턴 미플린 하코트 출판사는 그의 소설들을 전자책으로 출간했고,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버추얼 문학에 대해 말한 사람이 사라마구였기에 이렇게 가상으로 존재하는 판본이 있는 게 딱 맞는 일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 현실에서 떼어낸 듯 보이는" 허구라고 쓴 그는 이 장르의 발명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돌리지만, 이 장르에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없는 탁월 - P269

한 요소를 가져온 사람은 사라마구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에 대한 열정적이고 연민 가득한 관심 말이다.
우리에게 분류 카테고리가 정말로 더 필요하지는 않을 테지만, 버추얼 문학은 외삽(外揮) 경향이 있는 과학소설과 사변 소설, 완전히 상상해 낸 현실을 다루는 판타지, 분개와 개선 의지가 담긴 풍자 소설, 남아메리카 고유의 마법적 리얼리즘, 진부함에 고착된 현대 리얼리즘과 다른 유용한 카테고리일 수 있다. 나는 버추얼 문학이 이 모든 장르와 기반을 공유하지만 (실제로 모두 겹쳐지는데가 있고), 그 목적이 사라마구의 표현대로 수수께끼를 밝히는 데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이해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이는 가장 소박하고 수수한 통찰로, 어마어마한 계시가 아니라 그저 해가 뜨기 전에 서서히 찾아오는 빛이다. 드러난 수수께끼는 대낮의 빛,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빛이며, 말 그대로 매일 일어나는 신비다. - P270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 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사라마구에게 감상주의가 없지는 않다.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대단히 희귀한 뭔가를 전달한다.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애정과 경탄을 허용하고, 맑은 시선으로 용서한다. 그는 우 - P273

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정신과 유머 면에서 최초의 위대한 유럽 소설가 세르반테스와 가장 가까운 작가인지도 모른다. 이성의 꿈과 정의의 희망이 끝없이 좌절될 때, 냉소주의는 쉬운 출구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농민 사라마구는 그쉬운 출구를 택하지 않는다. - P274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 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 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 P286

SF는 어떤 현실 상황에 대한 상상 속의 전복에나 기꺼이 힘을 빌려준다. 상상력을 기르지 못하는 관료들과 정치가들은 SF 소설이란 다 레이저총이나 나오는 헛소리이고,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SF 작가가 검열을 당하려면 『우리들』의 자먀찐처럼 대놓고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노골적이지 않았고, (내 좁은 지식으로는) 정부 정책을 대놓고 비판한 적도 없다. 그때도 제일 감탄했고 지금도 감탄하는 점은, 그들은 이념에 무관심한 듯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 작가들도 힘들어하는 일이건만, 그들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썼다. - P289

이 책이 나왔을 때는 SF에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인물로 쓰는 일이 꽤 드물었고, 지금도 SF는 쉽사리 엘리트주의에 빠진다. 엄청나게 뛰어난 머리, 비범한 재능, 일반 승무원보다는 지휘관, 노동 계급의 부엌보다는 권력의 회랑이 나온다. 이 장르가 전문적으로, 그러니까 "하드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는 이들은 엘리트 스타일을 선호한다. SF를 그저 소설 쓰기의 한 방식으로 보는이들은 전쟁을 장군들만이 아니라 주부와 죄수와 16세 소년들의 눈으로 묘사하고, 외계인의 방문을 지식인 과학자들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통해 서술하는 좀 더 톨스토이다운 접근을 환영한다. - P291

"달의 아침"이라는 챕터는 그 자체로 ‘왜 사람들이 과학소설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묻든 깔보듯이 묻듣 간에 그 질문의 답을 내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이런 글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읽는다. 미지의 것들에 대한 기가 막히도록 정확한 통찰, 뜻밖이면서도 필연적인 아름다움…… 과학자들이 아는 것과 같은 발견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 P306

이야기 끝에 가서 그는 다시 한 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미래로 더 멀리멀리, "1분에 1000년 이상씩 성큼성큼" 여행하다가 시간의 끝에서 어느 해변가의 "아득하고도 무시무시한 황혼에 도착한다. 이 황량하고 웅장하며 인간을 넘어선 장면은 순수한 과학소설적 상상이 이제까지 쓴 가장 훌륭한 구절이 분명하다.
과학소설은 인간이(또는 딱 인간처럼 행동하는 신이나 동물이나 외계인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정말로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이야기다. 가끔 한 번씩 눈을 들어 인간의 행동이 아무 의미도 없고 인간의 관심사가 대수롭지도 않은 영역을,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던 "빛의 해안"이 잠시나마 위로를 넘어서는자유를 언뜻 비춰 줄지 모른다. - P315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 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 P321

내 생각에, 『시녀 이야기』,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는 모두 SF가 하는 일의 한 가지 사례가 된다. 그것은 현재의 경향과 사건들에 상상을 더하여 반은 예언, 반은 풍자인 근미래를 추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자기 책이 SF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에 내놓은 멋진 에세이집 『움직이는 과녁Moving Targets』에서 애트우드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능하고 어쩌면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오늘날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소설"인 SF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독단적이고 제한적인 정의는 애트우드의 소설들이 완고한 독자와 서평가와 문학상 수여자들이 아직까지 기피하는 장르로 격하당하는 사태 - P339

를 막기 위해 고안한 것만 같다. 그녀를 문학 게토로 밀어 넣을 문학 편견쟁이들을 원치 않는 것이리라. - P340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 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 P346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브론테나 오스틴의 손에서나 드물게 예술이 되는, 로맨스 서가에 가득한 흔하고 단세포적인 장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사랑에 대나 이야기인가? 나도 어느 글쓰기 워크숍에서 과제로 "사랑 이야기"를 줘 보기 전까지는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그 워크숍에서는 욕정에 대한 단편을 열네 편 받았다. 다음에 다시 시도했을 때는 욕정에 대한 이야기가 열한 편, 증오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편, 조카딸을 사랑한 여자를 그린 사랑 이야기가 한 편 나왔다.
우리가 얼마나 온갖 종류의 사랑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는 사랑을 성적인 욕망으로만 탐구하거나, 성생활을 권력의 - P385

도구로 이용하는 학대나 착취나 집착 관계로만 다룰 때가 이토록 많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레도잇』은 사랑 이야기다. 열정적으로 성취했으나 결코 안정감을 얻지는 못한 어느 결혼한 부부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젊은 여자 로티가 새아버지와 어머니와 이복 남동생에게 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거부의 사랑을 다룬다. 가족의 사랑이란 난파선과 가라앉은 보물이 가득한 해안도 없고 해도도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이려니. 참으로 멋진 이야기다! 어떤 마돈나 사진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 사는 삶에 바싹 다가온다. 낭만적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적응과 실망과 재적응, 눈먼 잔인성과 눈먼 다정함, 매듭과 복잡한 얽힘과 엉킨 그물들, 격분과 의리와 반항, 서로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고 서로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열정들. - P386

일상에 대해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비범한 것, 전율스러운 것, 초월적인 것은 자동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심지어 특별히 불행하지조차 않을 만큼 흔한 삶을 묘사하려면 용감한 저자여야 한다. 게다가 행복이라니, 성적인 만족도 아니고 야심에 대한 보상도, 황홀경도, 지복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행복이라니 이건 사실상 소설에서 사라진 무언가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감상주의로 보거나,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쓰기 쉽지가 않다. 진실성 있게 울리려면 가장 초라한 종류의 성취와 만족에 대한 묘사조차도 인간의 부족함과 잔인함, 언제나 질병과 몰락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야만 한다. - P400

한 마디만 잘못 써도 모든 게 믿기지 않아진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에는 잘못 쓴 한 마디가 없다. 구어체의 편안함과 투명함을 갖춘 산문체와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말이나 뻔한 말 하나가 없다.
보통 어떤 소설을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는 독자인 나에게 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저자가 죽어 가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동받고 경외감마저 느낀다. 이 책은 삶의 먼 가장자리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책임감을 품고 써낸 보고서다. 하루프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보다 멀리 가서, 그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루프가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오직 해야만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과 함께한다는 귀한 특권을 고맙게 여겼다. - P401

어쩌면 행복이란 자유와 함께하기에, 불행보다도 예측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또한 자유와 마찬가지로, 결코 확고하지가 않다. 영원할 수가 - P403

없다. 그러나 행복은 현실이 될 수 있고, 이 아름다운 소설에서 우리는 그 행복을 공유할 수 있다. - P404

요즘에는 많은 미국인이 지구 온난화를, 진화를,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어리석고 위험하게 사실을 부정하게 된 걸까? 그 이유를 무식에, 멍청함에, 공화당에, 남부 레드넥에 두는 건 정말이지 오만하고 비겁하게 질문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킹솔버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자기가 쓰는 사람들을 알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신용이라곤 없으며, 세상과 그 속의 자기 자리를 이해하려고 할 때 거의 도움받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만 잔뜩 받는, 그 생생하고 취약하며 무시당하는 사면초가의 시골뜨기들을. - P411

어떤 작가들은 소설 속에 미래상과 특수 용어를 가득 채워놓고서 맹렬히, 심지어는 식식대며 이건 SF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아니, 아니, 난 그런 형편없는 물건은 쓰지 않아요, 건드리지도 않아요. ‘문학‘을 쓰지요. 이런 작가들은 그 경멸스러운 장르의 비유와 전통은 신기하게 잘 알면서도 SF 장치들을 참으로 서툴게 쓰고, 용어의 의미를 참으로 무분별하게 무시하며, 바퀴를 다시 발명하면서 어찌나 스스로에게 탄복하는지, 그들의 시도야말로 방법을 배우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증명하려 하는 망한 노력처럼 보인다. - P432

기묘하게 아름답고, 생생한 세부 사항 모두가 이질적이지만, 그런데도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친숙하기만 한 풍경. 모든 소설이 그렇듯, - P435

SF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 P436

어떤 이들은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 몰아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과학이 세상에서 마법을 쫓아냈다고 울면서 "다시 마법에 걸리기를" 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이 어떤 몽상가 못지않게 발견과 경이와 심원한 신비로 가득한 놀라운 세상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마법을 빼앗은 사람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세상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본 사람들, 신이 움직이는 기계로만 본 사람들이다. 과학과 환상문학은 지적으로 모순되지만, 둘 다 세상을 설명한다. 양쪽 모두 상상력이 활발하게 기능하여 의미를 찾고, 딱정벌레를 설명할 때나 여마법사를 설명할때나 세부 사항과 사고의 일관성에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 지적인 동의를 얻어 낸다. 규정하고 금지하는 종교는 과학과 환상 양쪽 모두와 불화하며, 종교는 믿음을 요구하기에 양쪽의 공통 기반인 상상력을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라면 다윈과 루슈디 둘 모두를 드러난 진실을 반대하는 "불복종하고 불경한 인습 파괴자"로 비난해야 한다. - P465

사라마구의 진실 말하기는 지성, 치열한 예술적 용기, 그리고 진지한 인간의 애정이라는 희귀한 조합에서 말미암는다.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충분히 이들과 동화했는지 잘 알 수 없는 유일한 지점은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그런 가혹한 경험에서 얻은 미덕, 바로 삶에 대한 당연하다는 듯 소박한 태도입니다…… 저는 매일 제 정신에 울리는 끈질긴 호출처럼 그 교훈을 느낍니다.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시간이 이를 말해 줄 겁니다. - P479

전통에 맞게 출판사나 비평가의 구멍에 밀어넣을 수 없는 소설들은 "경계선"이라느니 "페미니스트"라느니 "지역적"이라느니 하는 폄하의 라벨을 얻고, 그러면 교수들이 그 작품들을 무시하고 소위 전문가들이 모욕할 수 있게 된다. - P486

신체나 정신 모두에 큰 고통을 많이 겪은 모리는 독서를 "보상"으로 본다. 실제로 책은 모리의 열정과 적극적인 지성이 더 큰 예술과 사상의 현실을 접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과의 이별, 부서진 골반의 고통, 대단히 고상하고 무척이나 이상한 세 고모들이 보낸 여자 기숙학교의 숨 막히는 쩨쩨함, 그리고 정신 나간 마녀인 어머니의 불가사의한 공격을 다 헤쳐 나가기 위해 모리에겐 책만 있으면 된다. 거의 그렇다. 하지만 독서마저도 결국에는 모리를 저버리고, 인생에 친교를, 사람의 온기를 구하려던 모리는 효과 있는 마법에 의존한다.
『타인들 속에서』는 재미있고 사려 깊으며 예리하고 흠뻑 빠 - P493

져들 만한 이야기지만, 마법에 대한 부분은 그 이상이다. 모리가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자신과의 우정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이 건 주문에 강제당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모리가 겪는 도덕적인 고통은 힘의 책임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사람의 고통이다. 그리고 쉽거나 빨리 해결되는 고통도 아니다. 이 책의 핵심은 위령의 날 전야에 웨일스 산 속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우라는 요정들의 명령에 모리가 따르는 장면이다. 모리를 불구로 만든 차 사고에서 모리의 쌍둥이 자매가 죽었는데, 자매의 영혼은 지금 어둠의 문 앞에서 붙들고 매달려 모리가 그녀를 보내지 못하게 한다. 말을 아낀다는 점에서도 극적인 면에서도 잊기 힘든 이 대목에서는 모든 상실과 어려움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만큼 몰려들고, 마치 옛 발라드에서처럼 조용하고 사실적인 서술이 불가해한 경험을 심화시키며, 기이한 일을 현실로 만든다. - P494

SF 소설에서 자기들은 SF를 싫어한다고 되풀이하여 선언하는 등장인물들을 보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단지 지넷 윈터슨은 대놓고 장르를 쓰면서도 "문학 작가로서의 신용도를 지키려 하는 걸까 추측할 뿐이다. 분명 이젠 윈터슨도 모두가 SF를 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 과거 골수까지 리얼리즘에 파묻혔던 작가들도 이제는 SF의 비유와 장치와 플롯이 가득한 소설들을 내놓다 보니,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문학의 정전‘을 지키며 으르렁대는 머리 셋 달린 개들뿐이다. 확실히 나는 차이를 모르겠다. 뭐 하러 신경을 쓸까? 하지만 나는 상상의 공동 기금을 이용하면서, 정작 그 기금을 만들었고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이용하 - P495

도록 열어 놓은 동료 작가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척하는 저자들의 기묘한 배은망덕이 신경 쓰인다. 약간만 보답하는 너그러움을 보여 준대도 나쁠 게 없으련만.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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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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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필요한 것,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타당해 보이는 선을 따라가는 삶을 상상하며 살았으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귀를 기울인다는 건 공간과 시간과 침묵이 필요한 공동체 행위지요.
읽기는 귀 기울이기의 한 방법이고요.
읽기는 그냥 듣기나 보기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죠. 여러분이 하는 행동, 끊이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이 지껄이고 외쳐 대는 매체의 돌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도대로 읽는 겁니다. 여러분을 압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빠르고 거세고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당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강매를 당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읽을 때는 보통 혼자라 해도 다른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하지요. 세뇌를 당하거나, 조작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니에요.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한 거죠. - P26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이야말로 사용 설명서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예요.

의식적으로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특정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쓴 시나 소설은, 그 작품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유익하다 해도 첫째가는 의무과 특권을 포기한 겁니다. 작품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요. 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르고 진실한 형태를 주는 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형태가 곧 글의 아름다움이자 글의 진실입니다.
잘 만든 토분은 그게 쓰고 버리는 테라코타든 고대 그리스항아리든 상관없이 토분일 뿐, 토분 이상도 토분 이하도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잘 만든 글도 그저 말들의 행렬이에요.
제 말들의 행렬을 쓸 때 저는 제가 생각할 때 진실하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그러고 있죠.
하지만 표현은 계시가 아니고, 이 에세이는 쓸 때 예술성이 - P94

들어간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기보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 P95

전 제 내면의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이 교사는 이해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섬세하고 겸손하답니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모순된 의견들을 담아내지요. "너희가 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중얼대는 오만한 예술가의 자아와 "이걸 들으라고!"라며 외쳐 대는 설교자 자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진실을 선언하지 않고, 제시만 하지요.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가져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걸 자세히 봐요. 연구해 봐요. 연구하면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릇에서 찾아낸 것들을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이 그릇에서 그런 걸 몇가지 찾을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저도 제 예술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내면의 교사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교사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결국 교사는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기대하라고 가르친 존재니까요. 교사의 본능은 "명확"하고 명백해지는 거예요. 제 본능은 해설 없이 더욱 명쾌 - P97

하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고요. 제 일은 의미를 완전히 작품 자체에 포함시켜서, 살아 있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예술가가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말하되, 그 말들 주변에 침묵의 영역을, 빈 공간을 남겨 두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다른 진실, 더 나아간 진실과 통찰들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거죠. 그 공간이야말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 P98

내가 왜 시애틀에 - P116

있는 게리 박물관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왜 샌프란시스코 순수 예술의 궁전은 옳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하다가는, 왜 내가 임신 중단권이 옳다고 생각하는지나 고문이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려들 때와 똑같이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고민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나는 윤리적인 질문과 미학적인 질문 사이에 정말로 종류의 차이가 있다거나 중요성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진술을 더 파고들자면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테고, 나에겐 철학적 이해가 없다. - P117

인쇄물을 마주하고 의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대한 자기만족은 의심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울하게든, 약간은 고소해하면서든 책이 사라져 간다는 추정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나는 책이 남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책을 읽지는 않을 뿐이다. 왜 지금 우리는 모두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 역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은 글을 아예 읽지 못했다. 읽고 쓰는 능력은 힘 없는 자와 힘 있는 자의 경계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힘이었다. 즐거움은 고려 대상이 - P124

아니었다. 상업 기록을 유지하고 이해하는 능력, 먼 거리에서도 암호를 써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신의 말씀을 지키고 스스로의 의지와 스스로의 시간에 따라서만 전도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은 타인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모든 문자 사회는 문해력을 (남성) 지배 계층의 구조적 특권으로 삼아서 시작했다.
문해력은 아주 서서히 아래로 흘러들고, 덜 비밀스러운 만큼 덜 성스러워졌으며, 더 대중적이 될수록 직접적인 영향력이 덜해졌다. 로마인들은 결국 노예와 여자 등 일반 대중까지 읽고 쓰게 했으나, 그들을 계승한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 응보를 받았다. 암흑시대, 기독교 사제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신도는 대부분 읽을 줄 몰랐고, 많은 여자들도 읽을 줄 몰랐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오늘날 무슬림 사회 몇 군데가 그러하듯, 읽기는 여자에게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중세 전체를 문자의 빛이 서서히 확장되고, 그 빛이 르네상스를 밝히고, 구텐베르크와 함께 찬란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어느새 노예들이 글을 읽고, 이런저런 선언문이라는 종잇조각들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고, 거친 서부 전역에서 여교사들이 총잡이들을 대신하고, 사람들이 뉴욕에 최신 소설을 싣고 온 증기선에 몰려들어서 "어린 넬이 죽었어요? 죽었어?"라고 외치고 있다. - P125

내가 ‘책의 세기 라고 불렀던 과거, 많은 사람이 소설과 시를 읽고 즐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때라 해도, 얼마나 많은 사 - P130

람이 졸업 후까지 독서에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엔 대부분의 미국인이 힘들게 일했고 오래 일했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은 늘 있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언제나 적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그 숫자를 모르는 건, 그때는 걱정할 설문조사 결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독서에 시간을 낸다면, 그건 그게 직업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거나, 다른 매체를 바로 접할 수 없거나 다른 매체에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독서를 즐기기 때문이리라. 퍼센트에 대한 한탄은 설교조를 유도한다.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다니 나쁜 일이다. 더 읽어야 한다, 더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댈러스에 사는 졸음 많은 친구에게 집중하느라 우리 동족을, 단지 읽고 싶어서 읽는 쾌락주의자들을 잊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는 다수였던가?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와이오밍의 어느 카우보이가 30년동안 안낭 속에 『아이반호Ivanhoe』를 한 권 넣고 다녔다는 사실, 뉴잉글랜드의 여성들이 브라우닝 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게 좋다. 아직도 그런 독서가들은 있다. 우리의 학교들은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아니 다른 누구에게도) 별로 쓸모가 없지만, 최악의 학교라 해도 책 한 권을 심장에 품고 나오는 아이들은 있다.
물론 책은 이제 "오락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 즐거움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사소하지 않다. 경쟁을 보라. 공영 라디오가 정부의 적개심 탓에 무력해진 사이, 의회는 몇몇 기업이 민영 - P131

라디오 방송국을 사서 품질을 떨어뜨리도록 허용했다. 텔레비전은 계속 무엇이 재미있느냐에 대한 기준을 떨어뜨리다 못해,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두뇌를 마비시키거나 적극적으로 추잡한 상황에 이르렀다. 할리우드는 리메이크를 리메이크하면서 역겨움에 도전하는 가운데, 가끔씩은 획기적인 작품이 우리에게 영화를 예술로서 대할 때 무엇이 가능한지 돌이켜 준다. 그리고 인터넷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아마도 그 포괄성 때문에 웹서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학적인‘ 만족감은 이상할 정도로 적다. 컴퓨터로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시나 책을 읽을 순 있겠지만, 이런 물건들은 웹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 웹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웹 고유의 것도 아니다. 어쩌면 블로그는 네트워킹에 창조력을 얹으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고, 블로그가 미학적인 형태를 발전시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성공하지 못한 게 확실하다.
게다가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즐거움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다르게 인식한다. 일단 버튼을 눌러 켜면 TV는 계속, 계속, 계속 흘러나오고 그저 앉아서 멍하니 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 주지 않는다. - P132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책은 재미있는 물건이다. 첨단기술을 뽐내지는 않지만 복합적이고 극도로 효율적이다. 작고 경제적이며, 감상하기나 다루기나 기분 좋을 때가 많고, 수십 년이나 어쩌면 수백 년까지도 갈 수 있는 정말 뛰어난 장치다. 선을 꽂거나 활성화하거나 기계로 실행할 필요가 없다.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사람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 단 하나뿐인 무엇은 아니지만, 수명이 짧지도 않다. 책은 오래간다. 책은 믿을 수 있다. 당신이 열다섯 살 때 어떤 책이 뭔가를 말해 줬다면, 오십 살에도 같은 말을 해 줄 것이다. 정작 당신의 이해는 완전히 달라져서 아주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책은 물건이라는 사실,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내구성이 있고, 무한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재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 P133

어린 아기들에게 물론 잠은 자연스러운 상태다. 아기들은 천사처럼 지조 있게 그리로 돌아가며, 배고픔이나 불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알린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은 드넓고 잔잔한 바다에 흩어진 작은 섬들이다. 그 섬들이 하필 부모에게 수면 욕구가 가장 절실한 곳에 끊임없이, 시끄럽게 모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장한다는 건 점점 더 자주 깨어 있는다는 뜻이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섬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이어 붙어 낮의 대륙이 되고, 우리 어른들은 목적을 가지고 그 대륙을 돌아다니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awake) 있으니 곧 자각하고(aware)있다고 확신한다.
명상을 행하는 사람들이 증언하다시피, 그 둘은 같지 않다. 하루 종일 또렷하게 깨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다중 작업은 가장 최신이자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자각 회피 - P142

방법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차를 몰면서 휴대폰으로 브로커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각으로 통하지 못하는 좁은 분산 의식에숙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자각하든 그냥 깨어 있든 간에, 우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전자 기구들을 아무리 공급받는다 해도 여전히 잠의 바다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밤이면 밤마다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이 들 수 있고, 그 의지가 영원히 좌절당하는 것 같은 때라도 사실 밤새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불면증은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지만, 계속 잠을 자지 않는 상태는 정신과 신체에 너무나 파멸적이기 때문에, 50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면 끔찍한 고통을 가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들지 않을 수도 있으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의식을 붙들고 있으려 해도, 의식이 녹아내릴 때가 오면 붙잡을 도리가 없다. 의식은 그냥 꺼지고, 온 우주를 조용히 데려간다. - P143

그래서, 우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답해 볼까요? 제가 첫 번째로 내놓을 거대한 일반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지금 오리건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도록 모든 사회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걷고, 말하고, 먹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다른 아이들과 놀지, 그리고 어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초적인 지시를 제공해 왔어요. 기초 기술이자, 기본 규칙들이죠. 살아남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놀랍고도 복잡한 일 전체예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장소에서 아기와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때로는 온전히 어머니와 할머니와 이모, 고모, 이웃, 마을 여자들, 유치원과 유아원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이 전통은 지금 미국에서도 이어지죠.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온 젊은 어머니를 볼 때마다, 사실은 인생 학자이며 놀랍도록 복합적인 교육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를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잘 가르치느냐, 썩 잘 가르치진 못하느냐는 규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거의 늘 가르치는 건 그 사람이에요.
그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들은 대개 성별이 무관해요.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배우죠. 사회적인 기술에 이르면 파란색이나 분홍색이 주어지고, 여자아이는 어른들과 있을 때 얌전하고 예의 바르게 굴라고 배우는 반면 남자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성가시 - P149

게 굴도록 배운다거나, 여자아이는 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추면 칭찬을 받지만 남자아이가 그러면 부끄러워하게 한다거나 할 순 있겠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여자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과 예의는 성별을 아울러요. 반대로 어린아이들이 남자들에게 배우는 건 성별화될 때가 많죠.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이지 않게 하는 데 관심이 많을 수 있어요.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성 역할을 가르칠 때가 많죠. 남자애에게는 남자다워지는 방법을, 여자애에게는 여자다워지는 방법을요. 남자들은 성장하는 남자애들의 교육은 완전히 넘겨받으면서, 여자애들에 대한 추가 교육은 무시할때도 많아요. 수천 년 동안 여자애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집안과 여성이 맡았고, 아직도 그런 곳이 많아요. 남자들이 자기 딸이 아닌 여자애들을 가르치는 건 상당히 최근에 생긴 현상이죠. 수천 년 동안 집 밖의 법은 남성 사제들이 정했고, 집안에서는 가족 중 아버지가 그 법을 집행하면서 딸들에게는 복종밖에 가르치지 않았어요. 여섯 살쯤이 지나면 남자애들은 남자에게 배우고 여자애들은 여자에게 배우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었고, 성별 구별과 위계, 퍼다나 샤리아 법은 절대적이 될수록 더 진짜가 됐어요.
특정 나이가 지난 남자애에 한하여 남성 지식만 가르치면서 남자들은 어린아이에게 공동체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치는 중요 - P150

역할을 여자들에게 맡겼어요. 성별 무관하게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요. 어쩌면 여기에 변화의 기반이, 어쩌면 전복의 기반까지도 풍성하게 있을지 몰라요. - P151

공적인 남성형 가르침과 사적인 여성형 가르침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슬럼가에 사는 홀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정직한 시민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고 가르치지만, 그 아이들이 길거리 지도자인 젊은 남자들에게, 또 너무 자주 교사와 경찰관에게 배우는 것은 그들이 한 가지 역할밖에 허용되지 않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며 그 역할이란 중독자와 범죄자가 되고 쓸모없거나 그보다 더 나쁜 존재가 되는 것일 때처럼요.
아니면 어떤 가족이 아들들을 평화롭고 자비롭게 사는 이야기로 키웠는데, 남성 기관이나 군대가 그 아이들을 전쟁 이야기에 밀어 넣어, 사람을 죽이고 가차없이 잔인해지도록 내몰릴 때도 그렇지요.
아니면 어떤 어머니가 딸들을 요리와 살림 같은 전통적인 기술을 귀중하게 여기는 전통으로 키웠는데, 사업가와 정치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로 그런 일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믿게 할 때도 그렇죠. 아예 일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이에요.
아주 자주 반복되는 이야기 하나는 우리에게 여자들은 타고나기를 모험심이 없고 보수적이어서 전통 가치를 잘 지킨다고 해 - P153

요. 정말 그런가요? 남자들이 스스로를 혁신가이자 거물로, 사회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자, 새롭고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전 모르겠네요. 생각해 볼 가치는 있겠지요. - P154

내가 여자라면, 왜 난 남자들이 중심이고 우선이며 여자들은 주변에 부차적으로 나오는 책을 쓰고 있는 거지? 마치 남자가 된 것처럼?
그야 편집자들이 그러길 기대하고, 서평가들이 그러길 기대하니까죠. 하지만 무슨 권리로 그 사람들이 나에게 남장을 기대하는 거죠?
내가 진짜 자신으로, 빌려 입은 턱시도나 국부 보호대 말고 내 몸 그대로 쓰려고 한 적이 있긴 했을까? 내 몸, 내 옷을 입고 글 쓰는 방법을 알긴 할까?
아닙니다. 전 방법을 몰랐어요. 방법을 배우느라 시간이 꽤 - P155

걸렸죠. 그리고 제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준 건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요. 이전 세대의 여성 저자들, 남성우월주의 문학 지배층에게 묻혔다가 『노턴 여성 작가 앤솔러지』 같은 책에서 재발견되고 찬양받고 다시 태어난 작가들요. 그리고 대부분 저보다 젊은 동료 작가들, 문학 보수파와 장르 보수파 양쪽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해 쓰는 여성 작가들요. 전 그 작가들에게 용기를 배웠어요.
하지만 여성의 지식을 숭배하고 우리는 남자들이 모르는 걸 안다고 우쭐하고 여자들에겐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지혜가 있고 본능적으로 자연을 안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런 숭배는 대개 여자를 원시적이고 열등하다고 여기는 남성우월주의를 강화할 뿐이에요. 여자들의 지식은 기본적이고 원시적이고 언제나 어두운 뿌리를 따라 내려가는 반면, 남자들은 빛 속으로 자라는 꽃과 곡물을 경작하고 소유한다는 거죠.
하지만 어째서 남자들은 성장하는데 여자들은 계속 유아어를 해야 하죠? 어째서 남자들은 ‘생각하는데‘ 여자들은 무턱대고 ‘느껴야‘ 하죠?
아래는 제 소설 『테하누』에 나오는 어느 등장인물이 성별화된 지식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대목이에요. 중심인물인 테나와 테나의 친구인 늙고 가난하고 무식한 마녀 이끼가 남자 마법사들과 그들의 힘에 대해 논하죠. 테나가 여자들의 힘은 어떠냐고 묻자 이끼가 말해요. - P156

"아, 글쎄요. 여자는 완전히 다르지. 여자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누가 알겠어요? 들어 봐요, 나에겐 뿌리가 있어. 이 섬보다 더 깊은 뿌리가 있지. 바다보다 더 깊고, 땅이 솟아오른 때보다 더 오래된 뿌리요. 난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가요."
이끼의 눈은 불그스름한 테두리 안에서 기묘하게 번쩍였고 목소리는 악기처럼 울렸다.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고요! 난 달보다 더 이전에 있었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아무도내가 누구인지, 여자가 무엇인지, 힘을 지닌 여자가 무엇인지, 나무뿌리보다 더 깊고 섬들의 뿌리보다 더 깊고 창조보다 더 오래됐으며 달보다 더 오래된 여자의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가 없어. 감히 누가 어둠에게 질문을 던질까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나 여자들에게나 거듭거듭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한다고 듣고 읽어요. 실제로는 정반대 말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래요. 위에 인용한 연설은 그 내용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백 번은 인용됐어요. 하지만 테나의 대답에 주목한 독자나 비평가는 하나도 못 봤네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이끼가 말하죠. 아주 수사적인 질문이에요.
하지만 테나는 대답해요. 이렇게요. "내가 묻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난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 P157

이끼는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자들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남겨 둔 유일한 영역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죠. 원시와 신비, 어둠의 영역을요. 그리고 테나는 거기 한정되기를 거부해요. 테나는 이성과 지식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어둠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햇빛까지 차지하려 하죠.
저 대목에서 테나가 제 대신 말하고 있어요. 우린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우린 햇빛에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성과 과학과 예술과 나머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칠 권리가 똑같이 있어요. 여자들이여, 지하실과 부엌과 아이 방에서 나와요. 이 집 전체가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남자들이여,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어두운 지하실에서나 부엌과 아이 방에서 사는 방법을 익힐 때가됐어요. 그러고 나면 우리 모두가 불가에 모여서, 우리가 공유하는 집의 거실에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 P158

나는 여자들의 소설을 문학 정전에서 한 권씩 한 권씩, 한 명씩 한 명씩 배제하는 흔한 기법이나 수법을 네 가지 알고 있다. 이 수법들은 폄하, 누락, 예외화, 그리고 실종이다. 이 넷이 쌓여 지속적으로 여자들의 글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 P160

폄하(Denigration)
(...)
편견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존재하며, 편향은 생략을 통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여자들과 얽힌 장르라면 읽지도 않고 통째로 묵살할 수 있다. 미스터리나 전쟁소설이 로맨스가 흔히 겪는 경멸과 무시를 당한다면, 아니면 남성 중심적인 장르에 "칙릿" 같은 경멸스러운 딱지가 붙는다면 분개와 저항이 있을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특정한 마초형 글쓰기를 "프릭릿"이라고 부르지만, 비평에서 그 용어를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생색내는 익살투가 여성 저자를 폄하하는 데 쓰이는 일도 많다. 여자들의 글은 매력적이다, 우아하다, 가슴 저민다, 감성적이다 같은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강력하다거나 선이 굵다거나 대가답다는 말을 듣는 일은 아주 드물다. 어떤 저자의 성별은 저널리즘 정신마저 지배하는 모양이며, 성별(gender)은 성적인 매력으로 읽힌다. 조지 엘리엇을 논하면서 "수수했다"는 언급이 빠지는 일은 드물다. 『가시나무새』의 저자인 콜린 매컬로의 《뉴욕 타임스》 부고에도 똑같이 외모 관련이 깊은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남성 저자들은 살았든 죽었든 간에 못생겼다거나 매력 없는 남자였다는 언급과 함께 논하는 일이 없건만, 예쁜 얼굴이 아니라는 죄악은 죽은후까지 여자들을 따라간다. - P161

어떤 여자가 쓴 책을 다른 여자들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남자들의 작품과는 비교하지 않는 것도 교묘하고 효과적인 폄하 수법이다. 그렇게 하면 서평가가 어떤 여자의 책이 어떤 남자의 책보다 낫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면서, 여자들의 성취를 안전하게 주류에서 밀어내어 닭장에 집어넣을 수 있다.

누락(Omission)
정기 간행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남자들의 책을 여자들의 책보다 많이, 더 길게 평한다.
여자들의 책은 남자나 여자나 평하지만, 남자들의 책은 남자들이 평할 때가 훨씬 많다.
도 여자들의 책은 공동 서평에서 함께 다룰 때가 많은 반면, 남자들의 책은 개별 서평을 받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누락 기술은, 예상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대놓고 경쟁하는 분야에서 쓰인다. 문학상들이다. 심사위원들은 흔히 남자와 여자 양쪽이 들어간 최종 후보를 뽑지만, 상은 남자에게 준다.
여성 저자들에게만 한정된 상을 제외하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학상 최종 후보 목록을 본 적이 없다. - P162

앤솔러지도 똑같은 젠더 불균형을 보이는 편이다. 최근 잉글랜드에서 출간된 SF 앤솔러지 하나는 여자 작가의 단편을 하나도 싣지 않았다. 소란이 일었다. 작품 선정을 맡은 남자들은 여자 작가를 하나 초청했는데 잘되지 않았으며, 어째선지 그냥 모든 단편이 남자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어째선지" 모든 단편이 여자 작가로 구성되었다면, 눈에 띄었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예외화(Exception)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 경우는 - P163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아주 잦다. 정상은 남성이다. 여성은 정상의 예외, 정상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실종(Disappearance)
나는 이 말을 적극적인 의미로 쓰며,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온전히 의식하고 있다.
여자들의 글을 깎아내리는 온갖 어리석거나 교묘한 수법을 통틀어, 실종이 가장 효과적이다. 일단 작가가 힘을 잃고 조용해지면, 남성 연대가 재빨리 외부인을 상대로 똘똘 뭉친다. 여성 연대나 정의로운 본능이 그 결속을 깰 만큼 강한 경우는 드물고, 그 노력이 성공한다 해도 남성 결속은 쉽사리 다시 이루어지기 때문 - P165

에 노력을 끝없이 이어 나가야 한다.
나는 이전에도 특히 격분했던 실종 사례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마거릿 올리펀트였다. 둘 다 지금까지도 종종 "미시즈(Mrs.)"로만 불리는데, 두 작가의 성별과 사회적 위치를 알리는 칭호다.("미스터 디킨스"나 "미스터 트롤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개스켈과 올리펀트는 생전에 유명하고 인기 있었으며 존경받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죽고 나자 바로 사라졌다. (...)
이런 부당한 격하는 불쾌할 뿐 아니라 낭비이기도 하다. 사실 뛰어난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는 그중 두 명을 단지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많지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소설이 실종된 데 어떤 다른 이유를 댈 수 있나? 개스캘은 페미니스트들과 영화 덕분에 이제 상당히 잘 복귀했다. 올리펀트는 아니다. 어째서? 올리펀트와 트롤럽에게는 유사성이 많다. 한계는 명확하지만, 치명적은 아니다. 둘 다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을 썼고, 심리 면에서 신중하고도 통찰력 있으며, 또한 매력적인 사회 보고서다. 하지만 올리펀트의 작품만 사라졌다. - P166

여성 비평가들, 페미니스트 작가들, 공정한 학자와 교사와 문학 애호가들이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페일리의 작품이 보이도록 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읽고, 다시 찍어 내는 노력을 기울이지않으면, 그녀의 작품은 몇 년 안에 조용히 무시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다 보니 절판이 될 것이고, 그보다 못한 작가들의 작품이 오직 남자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는 동안 잊힐 것이다.
그러지 말자. 이렇게 계속 훌륭한 작가들이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종당하고 묻혀 버리게 둘 수는 없다. 평화로이 썩어 가게 두어야 할 작가들은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부활하여 비평과 커리큘럼의 좀비가 되는 판에 말이다.
나는 미인이 아니지만, 나에게 ‘그녀는 수수했다‘ 같은 묘비 - P169

는 주지 말아 달라. 나는 실제로 할머니지만, 나에게 ‘누군가의 할머니‘라는 묘비는 주지 말라. 나에게 묘비가 있다면, 내 이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작가의 성별이 아니라 글의 우수함과 작품의 가치로 판단받는 책들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훨씬 크다. - P170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 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
소설 『플러시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 P172

내게는 사실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고 쓰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같이 일하고 대화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좁은 방에 혼자 앉아서 종일 화면을 보며 쓰고 읽는다. 만나서든 전화하는 구두로 이루어지던 의사소통이 이제는 쓰고 읽고 이메일을 통할 때가 많다. 그래, 그 모든 게 책 읽기와 별 상관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읽기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치 있는 기술로 만든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보급이 낳은 결과가 책의 죽음이 되는 까닭은 모르겠다.
은수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하지만 아이패드로 할 수있는 놀랍고도 끊임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벌이는 경쟁이 책을 죽이고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경쟁이 독자들의 안목을 더 높이기만 할 수도 있다. - P176

책의 죽음에 대한 다른 항의들은 웹에서 제공하는 직접 경쟁과 관련되어 있다. "손끝으로 켤 수 있는 오락의 세계"는 독서를 하찮게 만든다.
이때의 "책"은 대체로 문학을 가리킨다. 현재 DIY 매뉴얼과 요리책, 이런저런 안내서는 책 중에서 화면의 정보로 대체되는 일이 가장 많은 종류다. - P179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해도 『일리아드』나 『제인 에어』나 『바가바드 기타』가 죽었다거나 죽을 거라고 믿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경쟁하게 된 건 맞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은 손끝의 오락 세계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 작품들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들에서 배울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특히 읽어야 할 책을 배우고 그 책을 지적으로 읽는 방법(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에서 이제는 생략해 버릴 때가 많은, 기본 기술의 확장판이다.)을 배우는 한, 그 사람들 중에 손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무수한 오락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이가 됐든 화면이 됐든 책을 읽을 것이고,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존재 증대감을 누리려 문학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책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지키려고 할 것이다. 지속성은 문학과 지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책은 대부분의 예술과 오락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차지한다. 수명이라는 면에서는 아마 건축과 돌 조각만이 책을 능가할 것이다. - P180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그러니 책의 죽음을 슬퍼 - P183

하기보다는 이제 책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지속될 방법이 하나가아니라 둘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게 좋겠다. - P184

모든 독자는 특정 장르를 선호하고 다른 장르는 지루해하거나 불쾌해할 거예요. 하지만 어떤 장르가 다른 모든 장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편견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하고 변호할 수 있어야 해요. 변호하려면 그 "열등한" 장르들이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특성은 무엇이며 탁월한 작품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그러니까 읽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모든 소설 장르를 문학으로 접근한다면 리얼리즘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인기 소설가들에 대한 심술궂은 혹평과 비웃음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상상 장르 창작을 금지하는 일도, 너무나 많은 영어 교사들이 사람들이 실제 읽는 책을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도, 그리고 실제로 그 책을 읽 - P187

는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사과하는 멍청한 일도 끝날 거예요.
비평가와 교사들이 단 한 종류의 문학만이 읽을 가치가 있는 문학이라는 주장을 포기한다면 소설이 하는 다른 일들과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더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도 왜 모든 장르마다 특정한 책들이 다른 대부분의 책보다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고, 몇백 년간 그렇게 여겨졌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여겨질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생기겠지요.
세상엔 진짜 수수께끼가 있으니까요. 왜 어떤 책은 재미있고, 어떤 책은 실망스럽고, 또 어떤 책은 계시를 내려 주며 오래도록 즐거울까요? 작품의 질이란 뭘까요? 훌륭한 책을 훌륭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책을 형편없게 만드는 건 뭘까요?
소재는 아니에요. 장르도 아니죠. 그렇다면, 뭘까요? 좋은비평은, 좋은 책 이야기는 언제나 그 문제를 다뤘어요. - P188

좋아요. 이야기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어난 일을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는 이야기죠.
첫 번째 이야기에는 역사, 저널리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소설이 있죠. 지어내는 이야기들요.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 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 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 P191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 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 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 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 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 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 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인터넷이라는 멋진 신세계에서의 독서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할게요. 여기 우리 모두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고, 다들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말해요. 전문가들은 책이 죽었다고 울어대고, 사람들은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읽을 생각이 없어요. 미국인들은 책을 10년에 4분의 1권 정도 읽어요. 호메로스가 어떻게 아이패드와 경쟁하겠어요? 아무도 『돈키호테』를 원하지 않아요. 트윗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우린 여기 글쓰기 축제에서 뭘 하는걸까요?
작가들이 언제나 했던 일이죠. 우린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 P196

쓰고, 읽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파였어요. 엘리트가 아니라, 그냥 소수파예요. 이 세상 사람들 다수는 즐거움을 위해 글을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고, 어떤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죠.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 아니에요. 세상을 구성하려면 온갖 부류가 다 있어야 해요. 남자들이 몇 시간씩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저에게도 즐겁지 않고, 세상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즐겁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야구가 - 아니면 크리켓까지도 - 죽은 건 아니에요.
우리는 바뀐 게 독서가 아니라 출판인데도 독서에 대해 괜히 허둥거리고 있어요. - P197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 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 P198

헤밍웨이처럼 유명한 작가들이 오직 돈 때문에 쓸 뿐이라고 큰소리치는 것과, 무명 작가들이 일이라서 글을 쓰는 것은 다른문제다. 나는 후자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다.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고, 거의 언제나 낮거나 불확실한 이익밖에 얻지 못하는 고도의 숙련 노동이다. 틀에서 벗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에게는 노예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기술이 그렇듯 진지한 종사자는 그 보상으로 뭔가를 할 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걸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끝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내적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다. 본서를 포함하여 딕의 최고작 여러 편에는 정직하고 겸손한 장인에 대한 딕의 깊은 존경심이 스며 있다. 작가 본인이 오랫동안 그런 존재였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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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트라이브 - 자폐증의 잃어버린 역사와 신경다양성의 미래
스티브 실버만 지음, 강병철 옮김 / 알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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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걸 - 자폐·여자·사람을 위한 생애 안내서
루디 시몬 지음, 이윤정 옮김 / 마고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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