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만한 좋은 기사를 아직 쓰지 못해서, 대신 읽었다.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않아도 좋았다.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가 고스란히 누워 있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했다. 무언가를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는 게 좋았다. 경합하는 진실을 따라 나는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갔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 - P9
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 P10
대입 전형에 사활을 걸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과대 대표되어 있다. - P51
나 역시 1인분의 책임이 있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됐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 P54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 P68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 - P69
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 P70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 P71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74
대런 맥가비는 《가난 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바랐듯 - P75
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걸 믿으면서. - P76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 P83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 - P84
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 P85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속옷을 남에게 보인 것이 처음이었다. ‘속옷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사실이 퍼뜩 부끄러웠다. 단칸방에는 세면시설이 변변찮았고, 겨울 추위는 씻지 않을 좋은 핑계였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퇴근한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물어본 - P87
말은 "잘 씻었니?"였다.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보긴 했지만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기대 밖의 반응에 몹시 서운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최대한 의연하게 굴었다. 엄마 등 뒤로 긴 한숨이 이어졌다. 영원히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내 존재가 엄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런 이유로 나를 떠나진 않을까 두려웠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눈뜨면 초조한 마음으로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언제쯤 내 몸에 ‘죽음의 표시‘가 찾아올지 기다렸다. 가해자가 나에게 나쁜 병을 옮겼다고 믿었고, 내 인생은 끝났다고 여겼다. 그 와중에도 나는 자랐다. 그때는 그게 나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그 학교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3년 더 다녔고, 무사히 졸업했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 - P88
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몇 번이고 고쳐 쓴 질문을 들고 보건실에 들어서서 쓸데없는 이야기만ㅜ지껄이다 하릴없이 두통약을 받아 나오곤 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 P89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 - P90
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 P91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이해를 위한 첫발을 뗐을 때 괴로운 것은 내가 가해자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성범죄는 면식범 비중이 높은 범죄지만,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 P92
는 나의 영원한 ‘미제 사건‘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었다. 나는 가해자를 나와 같은 복잡한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상상했다. 마음껏 괴물로 만들었다 부수곤 했다. 하지만 성폭력은 괴물이 저지르는 일이 아니다. 성폭력 가해자를 괴물로 묘사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떨어뜨리고 해결을 방해할 뿐이라는 것까지, 그즈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P93
이라고, 엄마가 그때 그 아저씨를 신고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거라고, 왜 잊어버리라고, 조심하라고 당부했냐고. 짐승처럼 울었다. 한바탕 난장을 피운 뒤돌아누운 내게 엄마는 자신도 성폭력 생존자라고 말했다. 엄마가 고른 단어는 생존자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번역해 들었다. 엄마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자원화‘해야 하는지 몰랐고,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다. 대신 엄마가 배운 건 "그러고도 다 살아"라는 체념이었다. 엄마도 어렸고 약했다는 걸 이해하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엄마가 밤마다 했다던 기도 내용도 알게 됐다. 예쁘게 자라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누구 눈에도 띄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 P94
작가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 할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당당하고 멋진 여성으로 성장"한 딸아이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였음을 밝혀 적는다. 딸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놀다가 넘어진 일만큼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 - P95
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않을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 - P96
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 P97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을 기르거나 길렀던 이들은 그 같은 비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인정을 구하지 않았는데, 인정하지 않았다. 비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배움과 애정은 쉽게 열등한 취급을 받았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 그중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선다. "그 마음으로 사람 아이를 키우라"는 말.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대답을 찾고 싶었다. 먼저 고민하고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고양이를 돌보다 보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사람이 당연하게도 나뿐만은 아니었다. 통영에서 ‘고양이쌤 책 - P109
방‘을 운영하는 김화수 씨의 이야기에 나는 깊이 마음을 포갰다.
나도 한때는 사람 돌보는 거나 동물 돌보는 거나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하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돈 잘 버는 사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보통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렇기에 때론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 P110
고양이는 내가 선택한 또 다른 가족이다. 《27-10》의 주인공에게도 그랬다. 《27-10》은 가정 내 성폭력 생존자가 스물일곱 살이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이야기다. 처음 피해를 입었던 열 살의 ‘나‘로,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작고 약했던 어린아이 시절을 돌아보는 구불구불한 길을 그린 만화다. "고통의 시작은 타의였지만 결말은 스스로 내기로" 결심한 주인공에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겨우 묻어 둔 상처를 헤집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스물일곱의 그가 새로 만든 생활 안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벌어진 상처 틈으로 자꾸만 추락하는 주인공을 커다란 고양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받쳐 주는 장면에서 나는 가장 많이 울었다. 주인공은 "일정 - P112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부드럽게 받쳐" 주는 존재를 통해 "난생처음 겪는 감정"을 느낀다. 그림 속 고양이는 인간의 슬픔을 신경 쓰지 않는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되,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않는다. 고양이의 어떤 무심함이 사람을 살린다는 걸 나는 안다. - P113
결혼은 당연한 걸까. ‘이혼해서는 안 된다‘ 따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을 서약해야 하는 자리에서 나는 가족식 혼배미사를 도와준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 보고 아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인생의 ‘과정‘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되도록 실패하지 않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가 내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신부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 P118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가족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동성혼 합법화보다 더 급진적인 의제가 될 수 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제도는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제도가 금지의 형태를 갖는 것은 다른 이의 자유로운 삶을 훼손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금지 자체가 제도의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개인이 그려 나가는 삶의 지도를 국가가 대신 그려 줄 수도 없다. 더욱 다양한 욕망으로 다양한 관계로 가족을 꾸리려고 할 때, 제도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정상가족은 오늘날 파산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다양한 상상력은 아직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도착하지 못했다. 그 거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새로운 가족‘은 - P126
복잡한 맥락 안에서 오늘도 분투하고 있다.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가족은 곧 식구食口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 식구가, 가족이 꼭 혈연일 필요는 없다고, 나이와도 상관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 P127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강화길의 소설 《다른 사람》을 읽다가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떠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 P131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 P132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페미니즘 - P134
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평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시장 후보를 뽑는 투표장에 들어간 제인은 자신의 이름에 투표한다. 그 순간 제인은 20대의 자신, 아비바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그 문장을 읽은 이후 나는 또 한번 달라졌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 P135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 P136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 P145
눈에 잘 띄는 곳에 늘 꽂아 두는 책이 몇 권 있다. 주로 당사자 목소리가 녹아 있는 책들이다. 장애인 이동권뉴스를 접한 날이면 나는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사를 정리한 《노란들판의 꿈》을 다시 펼치곤 한다. 2001년 2월 6일 서울역 이동권 투쟁 장면을 다시 읽고 싶어서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은 시위 끝에 연행되면서 이렇게 외친다.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 주더니, - P157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 봅시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을 비롯해 장애인 30여 명이 선로 위에 드러누웠던 이날 시위는 장애인 이동권 역사의 결정적 장면이 된다. 2003년 국어사전에는 ‘이동권‘이라는 낱말이 올랐고, 2005년에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단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목숨을 건다.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 - P158
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 본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9‘의 눈으로 ‘1‘의 세상을 쓴 《노란들판의 꿈》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노들야학 소식지 99권과 교사 회의록 40권, 수천 장의 회의록과 20년간의 일지들을 수북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새 길을 낸다. 20주년 - P159
사를 정리하는 만큼 그 지난하고도 아름다웠던 세월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 짐작건대 왜 없었을까. 나라면 우리 대견하다고, 이만하면 잘 살아 냈다고 쓰고 싶었을 것 같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노들에 밝고 희망적인 것을 기대하지만 나는 노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얼굴을 더 많이 알고 있다."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 P160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꾸준히 들어 온 말은 ‘저널리즘의 위기‘다. 염색공예 작가 유노키 사미로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림은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라는 유노키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내가 하는 일도 꼭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잡지야말로 ‘죽어 가는 종이‘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 P163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 P164
어떤 정당을, 정치인을, 그리하여 정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기란 때로 매우 쉽고 간편하다. 그사이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일상은 무람없이 공격당한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동시에 참 지루한 일이다. 그 ‘좁은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독립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 P167
그리하여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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