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일본어와 어순이 반대여서 엠퍼시의 뜻을 영문으로 읽으면 능력the ability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온다. 한편 심퍼 - P15
시는 감정the feeling, 드러냄showing, 행위the act, 우정 friendship, 이해understanding 같은 명사가 맨 앞에 온다. 엠퍼시는 능력이므로 배워서 익히는 것이고, 심퍼시는 감정 · 행위 · 우정 · 이해처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거나 차오르는 것이다. 엠퍼시와 심퍼시가 다루는 대상의 정의만 보더라도 두 단어의 차이는 뚜렷하다. 엠퍼시의 대상인 ‘타인‘에는 지정된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 하지만 심퍼시의 대상에는 가엾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 지지나 동의를 표할 사상 · 이념을 지녔거나 그러한 조직 등에 속한 사람,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제약이 붙는다.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품는 감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나오는 행동이고, 엠퍼시는 딱히 가엾지는 않고 나와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보는 지적知的 작업이라 하겠다. - P16
1955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서는 엠퍼시를 ‘자기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판단력을 유지한 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현재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정의나 인지적 엠퍼시의 정의와 같다. - P22
폴 블룸은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의 차이를 논하며 둘 중 더 위험한 것은 감정적 엠퍼시라고 지적했다. 감정적으로 대상에 몰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1950년대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은 진짜 엠퍼시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맥이 닿는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하지만 폴 블룸은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 자체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정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스포트라이트와 비슷하다. 결함이 있는 백신을 맞 - P23
고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어린이 한 명을 보고 백신 접종 중지를 외친다면 백신으로 살릴 수 있는 다른 어린이 수십 명을 죽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폴 블룸은 "이때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공감하는 일은 없으리라. 통계적인 수치에 공감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숫자는 신발을 신지 않기에 없는 신발을 신을 수는 없으며, 인간은 아는 사람의 신발을 신으려 하지 모르는 사람의 신발은 신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반면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엠퍼시야말로 지금 이 사회에 꼭 필요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15년 1월 24일자에 실린 「엠퍼시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기사는 엠퍼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로 유명해졌다. 크리스토프는 미국에 ‘엠퍼시 갭(타인의 처지를 상상하기어려워하는 인지적 편견)‘이 존재한다면서 사람들이 빈곤에 빠지게 되는 복잡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자고 호소했다. 빈곤에 빠진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다면 ‘빈곤은 자기 책임이다‘라거나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빈곤한 사람이 일정 수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의한 비뚤어진 인식임을 알게 되고, 그런 깨달음이 배려 있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프에게 엠퍼시란 각자의 인지적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폴 블룸은 - P24
엠퍼시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이 몇몇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탓에, 사회 전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을 실현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주장 같지만 방향성을 일부분 공유하고 있다. ‘벗어나서, 넓히다‘라는 지점이 겹치기 때문이다. ‘엠퍼시가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인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고를 확장시키자고 말한다. 한편 ‘엠퍼시가 문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상을 한정시키지 말고 거기서 벗어나 시야를 넓히자고 말한다. 벗어나서, 넓히다. 이 말은 앞으로 엠퍼시를 사고할 때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있으리라. - P25
폴 블룸은 ‘자신을 모델로 타인을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행(과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은 생일 선물)이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 - P28
에게 해주어라"라는 마태복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이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일‘과 ‘타인이 남에게 바라는 일‘은 분명 다르므로, 그것이 늘 일치한다고 믿을 때 갖가지 불행이 일어난다는 고찰은 확실히 옳다. 제멋대로 피해자 대신 범인에게 복수하러 간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믿는 일이 ‘타인과 내가 같다고 가정‘한 결과라고 한다면, 거울 뉴런은 타인의 신발을 신기는커녕 타인에게 억지로 내 신발을 신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남의 행위를 흉내 내는 뇌 기능이 과연 엠퍼시와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적지 않다. 물건을 손가락으로 집거나 옆으로 걷는 등의 육체적 움직임은 뇌의 미러링으로 모방할 수 있겠지만, 남이 비탄에 잠기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은 감정에 빠지기는 쉽지 않다.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심 웃고 있을 수도 있고, 기뻐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를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모방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오히려 다 안다는 생각이 타인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남에게 나를 투사하는 일은 타인을 ‘자기투영을 위한 객체‘로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므로, 나를 ‘벗어나기‘는커녕 타인이라는 존재를 이용해 자신을 확대시키는 꼴이 될 수 있다. - P29
가네코 후미코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self-governed‘ 삶을 목표로 하는 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학교와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이런 삶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외톨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애초에 ‘아웃사이더‘로 자랐거나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후미코는 전자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사람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위한 엠퍼시 스위치를 자연스럽게 켤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후미코를 떠올리면 아주 이기적인 것과 아주 이타적인 것이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네코 후미코는 세상에 ‘소속된belonging‘ 감각이 전혀 없이 성장한 사람이었기에 ‘친구 vs 적‘ 구도에서 자유롭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소속‘이라는 감각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일수록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인간은 특정한 소속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믿고 그 감각에 기댈수록 자기 신발에 얽매여 자기 세계를 좁혀간다. - P35
"인간은 ‘자유‘를 얻으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아나키와 엠퍼시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전부터 어렴풋이 들었는데, 그걸 자유라는 명쾌한 언어로 표현해주었다. - P36
언어. 그것은 해답인 동시에 새로운 질문이다.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曲‘의 상태가 ‘self-governed‘이며, LEXICO(옥스퍼드 제휴 무료 사전 사이트)는 ‘self-governed‘를 ‘스스로 통치하고 자기 문제를 컨트롤하는 자유를 갖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아나키적 엠퍼시. - P37
사카가미 감독이 《세카이》 연재에서 제시한 ‘감정적 리터러시‘ 개념이 언어화 능력과 엠퍼시의 관계를 푸는 하나의 힌트가 될 듯하다. 사카가미 감독은 감정적 리터러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직역하면 ‘감정의 언어화 능력‘으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말한다. 동시에 이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도 포함된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한 방법이다. 《세카이》, 2020년 2월호
시마네 아사히 교도소에서는 감정적 리터러시를 ‘감식感識‘으로 번역하여 쓰고 있는데, 사카가미 감독은 그 언어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감식(감정적 리터러시) 자기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느 - P47
끼고 이해하며 그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힘. 감정 능력. 감정 근육을 강화하는 힘. 《세카이》 2020년 2월호 - P48
자신의 진심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사회에서 타인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많든 적든 경험하는 일이리라. 우리는 날마다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자기 생각을 언어화하지 않은(혹은 못한) 채 대화가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 P51
주체성이란 ‘I‘를 말한다. ‘I(나는)‘라는 주어가 없다면 사람은 무슨 글을 쓰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엠케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적인 연대‘(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해하는 일)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타인과 언어를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언어적 존재이며, 인간의 자의식은 고독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계속해서 증명되고, 인식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체험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형식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인간의 갖가지 특색과 상이점, 유사점, 다양성(즉 개인성)은 타인의 승인 혹은 거절을 통해 비로소뚜렷해진다. - P54
여기서는 ‘개인성‘이라는 단어로 아이덴티티를 표현했다. 여즘 아이덴티티라고 하면 인종, 성적 취향, 젠더 등 소위 귀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본디 아이덴티티는 ‘나를 찾는 일‘이나 ‘나답게 사는 일‘과 연관 지어 쓰이는 일이 많다. 《옥스퍼드 영영사전》 사이트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identity 1. 누군가는 어떤 사람인가, 혹은 무언가는 어떤 사물인가 2. 사람들을 타인과 구분 짓는 특징, 의식, 혹은신조 3. 누군가/무언가와 아주 비슷해서 알기 쉬운상태, 혹은 기분
엠케는 아렌트가 말한 ‘인간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타인과 구분 짓는 특징, 의식, 신조‘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적인 연대‘에 자기 자신으로서 참가하지 않는(계속 거짓말하는) 행위는 ‘I‘라는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결국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방관자 입장(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도 할수 있다)으로 인식하게 된다. - P54
피해자 역할을 한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며‘ 켄타로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느꼈을 심정을 상상했고, 동시에 자기 범죄의 피해자의 신발도 신어본 것이다. 다른 참가자들을 통해 피해자들의 분노와 공포를 대면한 켄타로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반응했지만 차츰 ‘철가면‘이 녹아내리고 ‘I‘가 표출되었다. 롤플레잉이란 놀이이자 연기다.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I‘의 획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는 중학교 교과목으로 연극이 있어서 아이들의 표현력이나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하는데, 이 롤플레잉 장면을 보면서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I‘를 획득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엠퍼시 능력을 향상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여기서도 〈‘I‘의 획득=이기적이 되는 일〉과 〈엠퍼시=이타적이 되는 일〉의 접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 P57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회학 분야에서 드라마투르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이 끝나지 않는 연극과 같으며 인간은 그 안에 사는 배우라고 주장했다. 어빙 고프만에 따르면 인간은 ‘일상‘이라고 불리는 무대에서 아기로 태어난다. 인간의 ‘사회화‘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연기하는 일이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역할을 확립한다.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만들고 타인에게도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조직 내 - P58
에서는 상사와 부하, 사장과 신입사원, 가족 내에서는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이고 그밖에도 선생과 제자, 의사와 환자, 손님과 점원 등 인간은 실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이런 역할들을 각각의 장면에서 연기하며 자기 캐릭터가 생겨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자기 인식에 닿을 수 있다는 엠케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고프만은 일상이라는 우리의 연극에는 ‘무대 앞‘과 ‘무대 뒤‘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 앞에서 대사를 할 때는 ‘무대 앞‘이니(직장이나 교실, 식사 테이블 등) 인간은 일상의 대부분을 연기하며 지낸다. 하지만 가끔씩 무대에서 내려와 ‘무대 뒤‘에서 쉴 수 있다. 이 사적 영역에서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무대 뒤‘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음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한다. 〈프리즌 서클〉에서 원형으로 늘어선 의자는 무대의 앞일까 뒤일까? 사람들 앞에서 자기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므로 ‘무대 앞‘으로 보아야 하리라. TC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그동안 ‘무대 앞‘에서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역할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아마도 양쪽 다이리라) 사람들이며, 그들이 ‘변하는‘ 때란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마주하는(파악하는) 상황이다.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타인에게도 마땅히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 이처럼 방관자와도 같이 적당한 태도로 대 - P59
화를 흘려보내던 사람이 TC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자기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어, 의미 있는 말을 하고 ‘대화의 언어가 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원형으로 늘어선 의자는 설령 주위에 타인이 있다고 해도 ‘무대 뒤‘, 혹은 그곳에서 상당히 가까운 ‘무대 앞‘(무대 축이라거나)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프리즌 서클〉을 보고 ‘나도 저 의자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 관객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실은 이런 나를 연기하는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라거나 ‘그때는 그런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라고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하는 사람이많다는 뜻이 아닐까. (...) 사카가미 감독은 이렇게 안심할 수 있는 장소를 ‘안식처‘라고 불렀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던 사람이 ‘I‘를 주어로 말할 수 있게 되려면 자기를 낱낱이 밝혀도 안 - P60
전하다고 느끼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TC가 ‘안식처‘로 기능했기에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 인터넷 상의 ‘공감‘(=심퍼시)에 기반을 둔 관계는 안식처나 안전지대가 되지는 못한다. 어빙 고프만의 ‘인상관리‘ 개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상관리란 인간은 누구나 사회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본인의 무대 앞 이미지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환경(집, 방, 만날장소 등), 겉모습,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 등을 통해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프로듀스하는 것이다. - P61
관련하여 아민 말루프의 《아이덴티티가 인간을 죽인다Les Identités meurtrières》라는 책이 떠오른다. 우리가 소속된 아이덴티티를 고찰한 책으로, 그는 소속감이 우리 피부에 새겨진 무늬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경우 일본인, 이민자, 여성,어머니, 작가, 서구에 사는 아시아인 등 다양한 그룹에 속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아민 말루프는 ‘나‘라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단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두르고 있는 피부는 한 장밖에 없다. 여러 장의 피부를 몸에 두르고 복수의 인생을 동시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소속된 아이덴티티는 각자가 두르고 있는 피부에 그려진 복수의 무늬 중 하나에 불과하며, 무늬들의 조합이 한 사람 한 사람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모양의 집합체를 ‘개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피부에 그려진 무늬 하나에 불과한 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라고 믿어버리거나 타인이 일방적 - P64
으로 단정지어버릴 때, 우리는 사람을 죽이거나 전쟁을 벌이게 된다고 말루프는 말한다. ‘무늬‘ 개념은 드라마투르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얼굴(역할이라고 해도 좋다)을 가진다. 어떤 남자는 의사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고, 이웃으로 구성된 럭비팀의 일원이고, 공원을 관리하는 자원봉사자다. 그때그때 그는 의사를, 아버지를, 공원에서 잡초를 뽑는 상냥한 아저씨를 연기한다. 그 남자라는 개인은 이 얼굴들의 집합체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진짜 나‘라고 굳게 믿을 필요도, 누군가로부터 ‘이게 진짜 당신의 얼굴이다‘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다. 이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인식이리라. 특정 상태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어떤 식으로(못생기고, 아름답고, 상냥하고, 비인도적이고, 올바르고, 악의에 가득 차)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가 가진 하나의 얼굴에 불과하다. 그 사람에게 다른 얼굴(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고의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연기하는 다양한 얼굴의 집합체이므로 ‘이것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결정은 논점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소속된 아이덴티티를 하나로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오와 폭력과 비극으로 이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저런 나쁜 놈은 죽여버려야 해‘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이 생겨나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 P65
이러한 관점은 ‘더러운 신발이나 냄새나는 신발은 신고 싶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신고 있는 신발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중 하나)을 보고 저 사람의 신발은 더럽고 냄새날 것이라 단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이 신는 신발(혹은 인생) 그 자체에는 냄새나거나 더럽다는 특성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 P66
이런 점을 생각하면 폴 블룸이 《공감의 배신》에서 전개한 사이코패스 담론이 떠오른다. 블룸은 인지적 엠퍼시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욕망이나 동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완전범죄를 거둔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엠퍼시라는 능력이 늘 선善을 추구하고 인간을 돕는 것은 아니며, 그 능력을 사용해 잔혹한 짓을 저지르거나 타인을 착취하는 인간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엠퍼시를 경제에 도입할 때도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엠퍼시 이코노미라고 하면 선량한 경제, 인도적인 경제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조작하여 착취하는 경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73
《인터넷의 망상 인터넷의 자유가 지닌 어두운 면The Net Delusion: The Dark Side of Internet Freedom》의 저자이자 테크놀로지 작가인 예브게니 모로조프는 이런 케이스를 ‘엠퍼시 워싱Empathy Washing‘라고 부른다. 더러운 비즈니스를 엠퍼시라는 인도적인 이미지의 언어로 세척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이렇듯 허구적인 인도주의에 끌리는 것은 ‘내가 나서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라는 바람이나 테크놀로지가 세계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줄 거라는 순수한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람들의 선의가 단순히 자기 뱃속을 채우는 돈벌이나 사기나 다름없는 비즈니스에 이용당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익살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엠퍼시 이코노미가 미심쩍은 이유이며, 고도의 알고리즘이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경제와 엠퍼시를 연결하는 일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 P75
스콧이 프티 부르주아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국가가 친 그물망에 잡히지 않고, 서민 계급이면서 자립과 자치에 보다 가까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자치 중 하나다. 주권재아主權在我(삶의 방식에 대한 주권은 나에게 있다)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스콧은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 산업 부문 노동자에게 ‘공장 노동보다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결과, 수십 년에 걸쳐 일관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한 답변은 상점이나 레스토랑 경영, 혹은 농업이었다고 지적했다. 프티 부르주아는 부동산을 포함해 ‘자기 재산‘을 갖는 일에 집착한다. 따라서 ‘졸부‘, ‘중산층‘이라는 의미로 모멸적인 취급을 받아왔지만(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귀족 · 지식인 계급으로부터도), 스콧은 이러한 행위에도 합리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층 계급에게 허락된 자치와 자립은 주로 두 가지 형태였다.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주변부에서 생활하든가, 국가 안에 있더라도 소규모 재산을 보유하면서 최소한의 권리를 갖고 생활하든가. 많은 사회에서 보이는, 약간의 토지와 자신의 집과 가게를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그것들 덕에 가능한 자유로운 - P110
행동과 자치와 안전이라는 실제적 여유와 함께, 국가나 이웃사람들의 시선에 비치는 소규모 재산으로 얻을 수 있는 존엄과 지위와 명예를 향한 희구 때문에 발생한다.
소규모 재산으로 얻을 수 있는 존엄과 자립을 찾아 행동하는 힘은 곧 자주와 자율을 향한 강한 열망이다. 영국 청교도때의 디거스와 레벌러스, 1910년 멕시코 혁명 때의 농민 운동, 아울러 셀 수 없이 많은 반식민지 운동 등 급진적인 대중 운동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토지를 갖고 싶다‘, ‘토지를 되찾고 싶다‘라는 갈망이었다. 이는 폭력 세력(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그리하여 자기들의 토지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로써 스콧이 말하는 ‘자립自立‘과 대처가 믿은 ‘자조自助’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둘 다 ‘자自’로 시작하는 두 글자라서 비슷한 말이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립한다는 것은 영어로 independent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independent‘의 의미를 캠브리지 영영사전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제일 먼저 이런 뜻이 나온다. - P111
다른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혹은조종당하지 않는다.
즉 자기 일은 어떻게든 자기가 알아서 해야만 하는 ‘자조‘와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자립‘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정부가 ‘스스로 노력해서 상황을 헤쳐 나가라‘라고 말하는 순간이미 국가가 명령을 내리는 지배가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곧 ‘국가는 당신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지만 당신들을 돕지는 않습니다‘라는 뜻이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다. 참고로 같은 사이트에 ‘자조‘를 뜻하는 영어 단어 ‘self-help‘의 의미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신, 혹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과 역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공적 조직에 가지 않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경험과 역경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조‘는 자기 주위 사람들로 한정되며,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느끼는 심퍼시와도 이어진다. 여기서도 대처에게 심퍼시는 있었지만 엠퍼시는 없었다는 지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P112
마르크시즘에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새로운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재산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까지 서구의 급진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중심에는 프티 부르주아(직공, 구두장이, 인쇄소 등)가 있었다고 스콧은 지적한다. 그렇기에 스콧은 ‘소규모 재산이 주는 불가침성의 자립을 향한 그들의 갈망 없이는, 평등을 외치는 싸움의 역사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스콧은 프티 부르주아들이 발명과 창조의 선구자라고도 한다. 지배자에게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토지와 가게와 공방을 갖기 때문에 ‘이 물건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지 않으니 다른 제품을 만들어라‘나 ‘효율이 나쁜 상품은 그만 만들고 국가를 위해 생산성 높은 상품을 만들어라‘ 같은 위에서 내려오 - P114
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 그렇게 팔릴 것 같지도 않은 물건을 개발하고 효율이 나쁜 비즈니스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본 적 없는 기발하고 새로운 것은 종종 이런 곳에서 나온다. - P115
적어도 대처는 자기 밑에서 일하던 랭키스터에게는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심퍼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대처에게는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자조를 위한 자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녀처럼 강한 야심을 갖지는 않고 온화하게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서민의 바람은 알지 못했다. - P118
2020년 4월 25일자 <가디언>에는 뉴욕대학 사회학과 교수 캐슬린 거슨의 흥미로운 발언이 실렸다. 남성 정치가들은 여성에 비해 ‘리더란 이래야 한다‘라는 틀에 갇히기 쉬워서 엠퍼시에 능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라면 감정적으로 배려하고 상냥하기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림 없는 강력함과 파워를 드러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지도자들처럼 강하고 결단력 있지만 배려심 넘치는 모습도 보이는 다면적인 지도자상을 연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성 지도자들은 엠퍼시 능력이 낮은 것이 아니라 젠더 이미지에 갇혀 엠퍼시 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봉인하면서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닐까. - P125
이처럼 엠퍼시라는 한 단어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 감정과 사고의 전염에 의해 자동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는 - P131
(동일화하는) 것이 감정적 엠퍼시이며, 그 정반대에 놓인 것이 인지적 엠퍼시다. 인지적 엠퍼시는 자연스럽게 대상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과 타인은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 후, 타인의 시점을 취득하여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는 능력이다. 하품은 인간뿐 아니라 침팬지, 원숭이, 강아지 사이에서도 전염되는데, 팔라기는 이를 근거로 동물 역시 인간의 감정적 엠퍼시와 유사한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지적 엠퍼시처럼 복잡한 능력도 지니는데, 이는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가 뇌에서 생성되는 프로세스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의 차이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이라는 두 방향 개념으로 설명된다. 하향식과 상향식이라고 하면 정치, 사회운동, 기업 등과 관련된 조직의 구성 방식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인간의 감정도 이 두 가지 경로로 발생한다고 한다. 덴버대학과 스탠포드대학 연구자들은 「상향식 감정과 하향식 감정의 발생: 감정 조절의 영향」(2012년 3월 7일)이라는 - P132
논문에서 상향식 감정이란 어떤 즉각적인 자극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으로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동차가 가까이 달려들어 공포감을 느끼는 리액션을 취할 때의 감정이다. 한편 하향식 감정은 보다 의식적인 반응에 의한 것으로, 자극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두고 스스로 생각할 때 파생되는 감정이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불안해지는 것과 같다. 상향식 엠퍼시란 타인의 행위나 상태를 뇌에서 미러링하여 리액션이 나타나는, 즉 감정적 엠퍼시다. 한편 ‘인지적 타자시점 취득cognitive perspective-taking‘이나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하향식 엠퍼시는 타인의 감정이 완전히 나의 상상이나 이해를 바탕으로 존재하고 뇌신경의 제어나 억제 메커니즘에 의해 나타나는 엠퍼시다. 즉 햐항식 엠퍼시는 미러링으로 자기도 모르게 느껴 ‘억누르기 어려운‘ 공감과 달리, 뇌의 제어 기능이 작용하는 범위에서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을 사고하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행하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P133
심리학자 비키 헬게손과 하이디 프리츠는 이렇듯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우선하는 성질을 연구하며 이를 ‘과도한 교감unmitigated communion‘이라 불렀다. 과도한 교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보호적 · 침략적 · 자기희생적‘이고, ‘남이 나를 싫 - P135
어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남이 자신의 도움이나 조언을 바라지 않으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과도한 교감‘에 빠진 사람은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만 얽매여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을 게을리 하는데,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심장병, 당뇨병, 암 등의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한다. ‘과도한 교감‘을 측정하기 위해 두 사회학자는 ‘내가 만족하려면 남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남의 문제로 고민하는 일이 많다‘와 같은 평가 항목을 포함한 척도를 개발했으며, 이러한 측정 방식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점수가 높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몇몇 심리학자들은 이런 연구 결과에서 나타나는 성별의 차이가 불안이나 억울함에 빠지기 쉬운 것이 여성의 성향임을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교육학자 바버라 오클리는 ‘여성이 일반적으로 많이 걸리는 질병과 병증은 타인에게 초점을 두고 강한 공감을 느끼는, 여성의 일반적인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빅토리아시대로부터 이어진 ‘여성 뇌 · 남성 뇌‘ 논쟁이 또 출현한 것이다. - P136
그런데 블룸은 ‘과도한 교감‘은 위험하지만 ‘교감‘은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는 ‘교감‘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정도‘,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 ‘친절한 마음‘, ‘타자이해‘ 등을 제시한다. 블룸의 책에는 이 평가에서 남녀 어느 쪽의 점수가 높은지는 나와 있지 않고, ‘교감‘에는 ‘과도한 교감‘에서 나타나는 공감적 고통(타인의 고통을 느끼면 자신도 괴로운)이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한다. ‘과도한 교감‘은 대상을 미러링하여 순식간에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는 상향식 감정적 엠퍼시이며, ‘과도하지 않는 교감‘은 자기 제어가 가능한 뇌 시스템에서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하향식 인지적 엠퍼시라는 것이다. 전자는 자기와 타인을 동일시하기에 공감적 고통을 느끼지만 후자는 자신과 타인을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에 자기 억제가 가능하다. 나는 나이며 타인과 나는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 타인의 생각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뇌의 거울로 타인이 된 나를 그려보는(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같은 신발을 신고, 어쩌면 같은 옷을 입고 머리 모양이 똑같은 상태)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자기 신발을 벗고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블룸의 주장처럼 ‘교감도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균형에서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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