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방 - 남자-되기, 유흥업소, 아가씨노동
황유나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 남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가 찾아낸 답은 명쾌하다. 한국 남자 상당수는 룸살롱, 노래방 등 각종 ‘방’에서 여성 접객원이 수행하는 ‘아가씨노동‘을 향유하면서 남자가 되어간다. - P6

남자들의 유흥이 타인-여성의 감정과 몸에 의존한다고 가정되어 거대한 상품시장이 끝없이 재발명되는 상황에서 유흥은 여성과 남성에게 같은 의미일 수 없다. - P11

유흥업소는 합법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흥‘을 위해 일하는 공간이다. 식품위생법 시행령은 ‘유흥종사자‘의 성별을 여성으로 제한한다. 여자가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해야 남자가 재밌다는 사회적 통념은 통념을 넘어 법으로 공식화된다. "남자끼리 모이면 재미없다. 여자가 있어야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여자만 일할 수 있다고 법으로 규정된 직종은 유흥업소를 제외하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국가는 ‘성교행위‘나 ‘유사성교행위‘인 성매매 없이 여성이 남성을 ‘접대‘하기만 한다며 유흥업소와 유흥종사자를 합법적인 영역에 남겨두었다. 인권이나 평등과 같은 가치가 아니라 ‘성교행위‘가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가른다. 유흥업소 ‘접대‘ 과정에서 남성 손님들이 여성 종사자에게 어떤 종류의 - P16

일을 요구하는지, 유흥업소 관리자들이 여성 종사자가 어떤 일을 하도록 조장하는지, 왜 여성 종사자들은 ‘접대‘라는 이름으로 성차별적이고 부정의한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법에 적혀 있지 않다. 제도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유흥업소를 방문하는 남성 손님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반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사회적 낙인을 감수해야 한다.
(...)
한국 사회는 유흥업소에서 빈번하게 성매매를 알선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는 유흥업소에서 성매매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취재 방식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했지만, ‘사이버 범죄‘를 취재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착취 행위와 피해자의 인격을 짓밟는 대화를 추적해 증거로 만드는 일은 전공 지식이나 취재 요령이 아닌 끈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그들을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느라 가해자들에게 받는 정신적 충격이 가랑비에 - P34

옷 젖듯 우리에게 스며드는 줄도 몰랐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며 우리는 1년 넘게 잠입 취재를 수행했다. 텔레그램은 전쟁터였고 우리의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건 해결은 더뎠고 모니터링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매일 매순간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텔레그램 가해자들은 계속 피해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광사우리의 활동이 세상에 드러나자 어떤 이들은 ‘추적단 불꽃이 어린애들 탐정 놀이 하듯 증거를 수집했다‘고 비웃었다. 휴대전화로 그저 텔레그램 대화방의 동태를 살핀 대학생 둘이 수집한 증거 자료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수집한 자료의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가해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 자신이 ‘○○대 철학과‘에 다니고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 말처럼 걸러야 할 정보들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내용도 전부 캡처하고 노트북에 대화 내용을 백업해두기로 했다. 그래야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 P35

‘신작‘을 원하는 회원들은 많았다. ‘신작‘이 많이 올라오는 대화방일수록 참여자가 많았다. 주요 운영자들은 대화방 참여 규모를 늘려 결국에는 돈을 받고 방을 팔고 싶어 했다. 불법촬영물 유포를 비롯한 참여자들의 활발한 활동은 대화방 매각 대금과 직결되어 있었다. 고담방에서 파생된 대화방 가해자들은 성착취물 공유를 통해 수익도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의 인격을 짓밟아 가해자들이 얻는 게 고작 돈이었다. - P37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N번방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먹고 자란 것이다. - P43

피해자가 계속 늘어나는 것을 묵인할 수 없었다. 막을 수 있는 만큼이라도 막아야 했다. 먼저 SNS에서 해시태그 기능을 이용해 특정 직업군을 검색했다. 지인능욕방에 올라온 사진과 해시태그 기능으로 찾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대조해 특히 피해가 심한 이들을 찾아 나섰다. 피해자를 찾아도 이야기를 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SNS 개인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소개하고 피해 사실을 전했다. 당신의 사진이 수천 명의 이용자가 있는 방에서 성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알려야 했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했다. 용기를 내서 각 지방경찰서 - P46

에 신고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범죄는 영장 발부도 안 된대요. 가해자를 못 잡는대요……" - P47

한국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기뻐 - P62

한 자들도 있다. 바로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들이다. 이들은 다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솜방망이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동 · 청소년 성착취 범죄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들이 흘러들어간 곳이 바로 텔레그램 N번방과 다크웹의 □□□, ○○○같은 사이트다.

(...)
12월, 텔레그램 대화방에 입장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경찰 수사를 돕고 언론에 제보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 텔레그램 N 번방을 처음 발견한 이후 5개월이나 흘렀는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무심했다. 허탈감과 무력감이 찾아왔다. 기말고사와 취업을 준비하느라 모니터링하는 시간은 전보다 줄어들었다. 휴대전화에서 텔레그램 앱을 지울까 고민도 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사실 텔레그램 로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친했던 사람을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목격한 이후 더 그랬다. 주변 사람을 아무도 못 믿게 되었을 때의 심정은 실로 참담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종종 후회한다. 당장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 같아도 처음 취재에 나설 때처럼 계속 증거를 수집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더 많은 범죄자들을 검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낼 수 있었을 텐데……. - P63

〈실화탐사대〉와 인터뷰를 마칠 때쯤 담당 PD가 A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었다. 알려드릴 수 없다고 하자 PD는 "피해자 취재가 안 되면 방송이 못 나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우리는 ‘피해자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실화탐사대〉 측의 전화와 메시지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을 전달받던 A가 인터뷰 거부 의사를 담은 장문의 편지를 작성해 〈실화탐사대〉 측에 전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A가 완강히 인터뷰를 거부했음에도 작가는 포기하지 않고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면 A의 근무지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2018년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마련한 ‘성폭력 · 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의 ‘취재 시 주의사항 2항에는 ‘사건 - P65

당사자나 가족은 인터뷰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취재를 요청하여 괴롭히지 말아야 하며, 사건당사자 등이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을 보도에 부정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MBC 〈실화탐사대〉 측이 명백히 보도 준칙을 어긴 행위였다. 기자지망생인 우리조차 언론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마저 모른 척 텔레그램을 지워버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피해자들의 영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너무 괴로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텔레그램을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모니터링을 한다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협조한 지 수개월, 텔레그램에서는 성착취가 여전히 실시간으로 벌어졌다. 매일 되뇌었다. ‘도대체 끝은 어디일까……‘ - P66

한 번 유포된 불법촬영물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을 돌아다닌다. ‘○○ 여자 화장실 불법촬영‘ 영상이 올라오는 범죄 현장을 보며 ‘나도 불법촬영 피해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폭력으로 가득한 텔레그램 안에서 우리는 너무도 약했다. 우리 역시 성착취 사진과 영상에 장기간 노출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성착취 범행을 추적하던 당시, 피해자들의 고통은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였다. 우리 앞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당장의 범죄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뿐이었다. 그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 P66

N번방 사건(미성년자 성착취)과 딥페이크, 두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이 ‘성착취‘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범죄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딥페이크는 우리가 텔레그램에서 본 수백 가지 범죄 유형 중 하나일 뿐이다. 법사위는 N번방 방지법을 ‘졸속 처리‘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청원의 핵심이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적인 해결’이었기 때문이다. 국회 청원을 올리고 국민 10만 - P70

명의 동의를 얻기 위해 분투한 리셋, 그리고 함께 싸워온 수많은 여성들이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이 갔다. - P71

‘기자님들 제발 N 번방 관련 기사 써주세요.‘ ‘그렇지만 기사를 자극적으로 쓰면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우리는 언론에이 두 가지를 함께 주문하고 호소했다. 그런데 박사가 검거된 후 언론은 가해자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악마로 만들어 ‘가해자 서사’를 보도하는 데 혈안이 된 듯 했다. 이런 언론의 태도에 절망했다. 피해자의 안위는 뒷전이었다. - P74

인턴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애인이 있으면 뺀질거리기만 하고 일은 안 한다‘는 사수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또다른 사람들은 ‘애인이 있는 여성은 가부장제를 공고히 만드는 순진한 여성‘이라고 말했다. 나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뭘 모르는‘ ‘각성되지 않은‘ ‘연애하느라 일은 뒷전인‘ 여성이라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인이 없는 척했다. 애인과 물리적 거리를 두었다. 애인은 그런 나를 비난하지 않 - P159

았다. 나에게 새로운 페르소나 혹은 목표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네가그렇다면 그런 것"이라고 지지해주었다.
‘애인과 거리를 둔 생활을 수개월 반복하던 어느 날,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 매서운 파도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기분을 느꼈다. ‘너는 페미니즘 운동을 할 자격이 없다‘며 누군가 나를 뭍으로 밀쳐낼 것만 같았다. 두려웠다. ‘독립적이고 당당하고 혼자서도 잘하는 여성‘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에 ‘눈치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졌다.
뚜렷한 주관 없이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세운 ‘독립적인 나‘라는 목표 때문에 ‘진짜 나‘를 잃어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저 청개구리처럼 반대로만 행동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자유라고 믿었다. 지난날이 후회되어 이불을 뻥뻥 차는 날도 있는데, 애인은 "진짜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라며 내 등을 도닥여준다. - P160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뭐였어요?"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다. 우리는 "모든 장면이 충격적이라서 답할 수 없다"고 답한다. 기자나 작가나 PD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한 장면만 소개해달라고 한다. 나는 내 기억 저편에 도사린 잔상을 타인의 청에 의해 억지로 꺼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20년 8월 7일이다. 텔레그램 대화방에 잠입 취재를 시작한지 약 400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 하루에만 정확히 마흔한 번 텔레그램 대화방의 잔상이 스쳐지나갔다. 아침 9시에 일어나서 오후 6시까지 의식적으로 세어본 횟수다. 이제 마흔한 번이 더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떠오른 잔상들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뇌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는 것들이다. 어쩌다 가해자들의 저급한 성희롱과 여성혐오 대화가 떠오르면 여전히 불쾌하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 구석구석을 씻어내고 싶다.
이런 질문을 받고 싶다. 지금 피해자의 일상은 어떤지, 정부에서 피 - P187

해자 보호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필요한 입법은 무엇인지, 재판부의 솜방망이 판결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앞으로는 생생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잔상은, 지난날의 모습일 뿐이다. - P188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가해자 연대를 부수어 나가는 첫걸음은 더는 피해 영상물 유포를 묵인하거나 방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부끄러움의 몫을 전가하는 이가 아닌 가해자 연대에 수치의 책임을 부여하고 가해 - P195

자 연대를 폭로해나가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 P196

이한 인터뷰에서 피디가 우리에게 N번방을 취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질문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그간의 일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힘겹게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참겠다고 천장만 바라보는데, 눈 앞이 계속 흐려졌다. 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끅끅 흐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피해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는 압박과, N번방 관련 증거를 수집하며 생긴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답변을 하는데도, 하면 할수록 괴로웠다. 마음 같아선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냈다.
누구보다 언론 보도를 갈망했지만 거절해야만 했던 인터뷰도 있었다. 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제작진은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요청하며 우리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태를 알리는 것뿐인데요. 주인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스레 - P199

거부했다. 그들은 대안으로 "디지털장의사를 섭외해놨으니 같이 범인들을 추적해나가는 영상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함께 범인을 추적한 적이 없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다. 제안을 거절하자 돌아온 작가의 답변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해주셔야 하는데요."
목요일 밤 생방송 인터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받은전화였다.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다 받아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사진 자료(피해 사진 제외)를 제공해왔다. 당장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하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이 사건이 방송 시간을 채우는 용도로 쓰이는 일은 원치 않았다. 결국 단과 상의 후 그쪽 촬영은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잠시나마 쉴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기에 휴식이 무엇보다 귀중했다. 우리는 바로 병원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을 때 늘 "괜찮아요"라며 답변했지만 사실 괜찮지 못했던 것이다. - P200

생각해보면 불과 나는 ‘처음‘을 참 많이도 겪었다. N번방에 잠입 취재를 한 것도, 대학생 기자로 주목받으면서 언론사 인터뷰를 다닌 것도 익명으로 사회운동을 한 것도 다 처음이었다.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왔다. 그렇다고 믿었다. 우리는 종종 추적단 불꽃이 두 명이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이 혼자서 울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위로가 전부였다. 목이 탔다. 침을 삼키는데 눈물 맛이 났다.
그날, 불을 혼자 자취방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서도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불을 따라온 아줌마를 잡았다면, 경찰이 나보다 빨리 도착했더라면, 우리가 언론에 인터뷰하러 다니지 않았다면.
우리는 취재하며 생긴 트라우마를 서로에게 터놓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병원에서도 개별 상담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아픈 만큼 친구도 아프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불에게 나의 경험을 말하면서 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냐고 물으면, 불은 제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웠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다. 간혹 입술을 삐죽일 때도 있었다. 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라고 - P207

생각했다. 기자들도 나와 같은 질문을 종종 해왔다. 그때 불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려봤다.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때 불은 그랬다.
불은 다른 사람에게 ○○역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할 때면 표정이 굳어버렸다. 눈꼬리와 입꼬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단단했다. 불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편이었고, 그런 불을 볼 때마다 ‘든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버텨주는 불이 고마웠다. 6월 말에 임상 치료 선생님에게 집단 상담의 효과를 들은 뒤에야 우리가 겪은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명상을 하고 감회를 나누면서 돌아보기 싫었던 일들을 그저 기억의 일부로 수용하게 되었다. 각자 느낀 고통을 말하고 듣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의 명상 취향도 공유했는데, 불은 ‘산 명상‘을, 나는 ‘종소리 명상‘을 좋아했다.
7월 무렵에 심리 상담이 끝났다. 요즘도 불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지만,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보채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고, 지금 당장 괜찮아도 내일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도 그렇다. - P208

"물론 가해자가 엄청 잘못한 거지만 피해를 입은 애들도 조금은 잘못이 있는 거 아니냐?"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이건 전적으로 가해자들이 잘못한 거야. 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어?"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니고, 불아……"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우리 증언을 듣는 이들 모두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고 공감해주길 바랐다.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조차 납득시키지 못한 내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좌절감이 밀려 - P210

들었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 P211

그러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빠도 태어나서 처음 하는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그놈들은 잃을 게 없다. 어른들도 당하는데 너 - P213

희가 여자이고 어린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지금이야 괜찮아 보여도 나중에 형을 살고 나와서 보복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이었다. 나도 걱정하고 있었지만 입 밖에 꺼낸 적은 없는데, 아빠 말을 들으니 돌연ㅊ뼈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 - P214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끔 과거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내 일상이 변한 대신 사회도 변했으니까. 지난 5월, 일명 ‘N번방 방지법‘이 제정됐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형량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사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바 - P216

라보면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했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변화의 바람은 분명 불고 있다. - P217

언젠가 공영방송 라디오에서 아빠 연배의 남성 진행자가 우리 두 사람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아마추어, 어린 여자 대학생은 손을 떼고 기성 언론이 이어 받아 취재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불은 어이없어 했고, 나는 욕을 했다. 그동안 N번방 취재를 해달라고 제보할 때는 조용하다가, 격려라며 하는 말이 손을 떼라니. 기가 찼다. N번방 가해자들은 주로 어린 여자를 노렸으니, 추적단 불꽃도 상대적으로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걱정할 수는 있다. 그런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사족은 붙이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는 기자로서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취재하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나이와 성별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추적단 불꽃‘은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그것도 둘 다 여자분? 그렇다면 더 훌륭하시네요."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 연락한 분이 건넨 첫인사였다. 그는 우리가 여자라서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않는다. 디지털 성범죄 척결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 - P227

‘추적단 불꽃‘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는 일이다. 어려움에 처한 피해자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우리는 그랬다. - P228

언론은 ‘조주빈은 악마‘라는 등 가해자 서사를 늘어놓았다. 또 비슷한 시기에 검거된 가해자들의 가정사와 학업 성적, 장래 희망에 주목했다.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고는 피해자가 ‘일탈계‘를 했다더라, 먼저 신체 노출을 했다더라며 가해자 중심의 보도를 했다.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서술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피해자 인터뷰가 어려워 그들의 입장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언론이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와 같은 여론을 조장한 것이다. 이에 언론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가해자에게 면죄부 주고 피해자에게 책임 전가하는 보도를 지양하라‘는 긴급논평을 내며 과열된 보도의 문제점을 꼬집기도 했다.
다수 언론은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가 일어나고 있을 때 취재를 하지 않았으니, 관련 ‘범죄현장 잠입 르포‘나 ‘피해자 보호 대책 점검‘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취재와 보도는 할 수 없었다. 언론은 ‘주요 가해자가 잡히고 국민의 관심이 조주빈에게 쏠렸을 때 우선 그가 누구인지를 자세히 밝혀야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디지털 성범죄를 보도할 수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론에게 부족했던 것은 정확한 보도 시점이 아니라, 윤리 의식이었다. - P236

우리는 목격자이자 피해자였다.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한 탓인지 각성상태가 지속됐다. 수집한 자료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됐다. 덕분에 기자가 ‘가해자가 이런 말을 했다던데, 자료가 있나요?‘ 하고 물으면 ‘그 대화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자료도 함께 보내드릴게요‘라는 식으로 빠르게 답할 수 있었다. 우리의 뇌에 앨범 기능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머릿속에는 캡처한 사진과 사진의 맥락을 둘러싼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했다. 깜깜한 가해 현장에서 멈췄던 우리의 시간이 햇빛을 받아 흐르기 시작하고 두 다리와 마음은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P238

차분히 취재팀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던 K씨는 텔레그램 방 성착취 기사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습니다. 본인의 피해를 단순히 ‘착취‘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착취가 아니었어요. 그건……이대로 안 하면 나를 죽일 것만 같은? 나를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그런 게 전혀 (기사엔)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냥 ‘고수익 알바‘ 이 단어들만 보고 ‘피해자들도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시작은 그랬을 수 있죠. 저도 바보 같다고 생각도 해요. 근데 솔직히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만 들어가도, ‘룸 술집 알바 구한다‘ 이런 글 많잖아요. 저는 그냥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 P244

그런데 K씨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대화방에 올라온 자신의 사진을 보거나, 협박을 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K씨는 경찰에 신고를 한 이후에도, 자신의 사진이 텔레그램 방에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앞에서 말했듯이 ‘박사 자료 모음‘ ‘박사 샘플 공유방‘에 들어가 일반 이용자인 양하며 지켜봤습니다.
"어느 날 대화방 관리자가 ‘저녁 시간이고 날씨도 좋은데, 저희 투표 한번 할까요?‘ 그러더니 저랑 다른 피해자 세 분의 이름을 보내면서 ‘네 명 중 제일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의 자료를 뿌려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2등을 했어요. 그런데 이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다른 피해자의 자료가 공유되는 현실을 보면서도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K씨는 털어놨습니다.
"대화방의 대표 사진이 제 사진이었어요. 사진이 바뀌던 날도 저는 안도하고 있는 거죠. 저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애 얼굴로 바뀌었는데, 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대화방에 있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빨리 내 차례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P245

피해자는 "(물질적 · 정신적) 보상보다는 갓갓이 영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가 만나본 피해자들의 바람은 한결같았다. ‘영상 영구 삭제.‘ - P272

‘스토킹방지법만 있었어도……‘라는 탄식이 나온다. 1999년, 처음으로 스토킹방지법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통과되지 않고 있다. 2018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스토킹은 행위 유형이 다양하고 단순한 애정 표현이나 구애와 구분하기 어려우며, 심각한 스토킹은 형법상 폭행죄, 협박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어 별도 법률을 신중해야 한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단순한 애정 표현과 구애‘의 주체는 ‘가해자‘다. 가해자의 입장이 반영된 해석이다. 피해자가 상대방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스토킹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국회의원 다수는 남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범죄를 바라보는 것이다. - P275

우리가 직접 어플을 깔고 실태를 확인해본 결과, 채팅 상황은 몇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방은 여전히 "열다섯 살이면 좋지." "아다야?(한 번도 성관계를 맺어보지 않았냐는 의미다)"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함정수사‘다. 함정수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단순히 범행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제공형‘, 범행 동기나 범행 의도가 없던 사람에게 범행 의도를 갖게 하는 ‘범의유발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수사는 기회제공형이다.
예를 들면, 경찰이 만취한 척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지갑을 훔치도록 유도하거나 경찰이 인터넷에 올린 살인청부 위장 광고를 보고 살인청부를 의뢰하는 것은 기회제공형이다. 또 경찰이 휴대전화를 길거리에 일부러 떨어뜨리고 지켜보다가 누군가 주워 우체국이나 지구대에 가져다주려 하면 그를 설득해 자신에게 팔라고 꼬드기는 것이 범의유발형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예시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범죄 수법은 진화한다. 현재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기회제공형‘만으로는, 범죄 수법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고 범인을 검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P279

이미 많은 국가에서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함정수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거세다. 함정수사로 범인을 검거해 기소한 경우, 공소 제기 절차가 적법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동 · 청소년이 "15세 여자, 잘 곳 구해요"라고 대화창에 올려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범의‘(범죄임을 알고도 해당 행위를 하려는 의사)를 유발하기 때문에 불법이다. 평범한 사람에게 범의를 유발했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법은 성인이 아이에게 불온한 마음을 품는 것을 선제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 정책은 피해가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280

그동안에도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위력형 성범죄가 반복되고, 웰컴 투 비디오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거부되고, 고등학교 교사가 불법촬영을 저질렀다. 한국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버겁게 느껴지는 일주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이 땅에서 살아남아, 외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연대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추적단 불꽃은 성범죄 피해자의 고발을 지지한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몸을 통과해 심장을 건드렸다. 피해자의 상처가 나의 고통으로 바뀌어 발화하는 순간, 뜨거운 용암이 심장에서 솟구친다.
우리가 써내려간 지난 1년간의 기록이,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의 발자취로 이어지길 바란다. - P2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 공감을 넘어선 상상력 '엠퍼시'의 발견
브래디 미카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는 일본어와 어순이 반대여서 엠퍼시의 뜻을 영문으로 읽으면 능력the ability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온다. 한편 심퍼 - P15

시는 감정the feeling, 드러냄showing, 행위the act, 우정 friendship, 이해understanding 같은 명사가 맨 앞에 온다. 엠퍼시는 능력이므로 배워서 익히는 것이고, 심퍼시는 감정 · 행위 · 우정 · 이해처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거나 차오르는 것이다.
엠퍼시와 심퍼시가 다루는 대상의 정의만 보더라도 두 단어의 차이는 뚜렷하다. 엠퍼시의 대상인 ‘타인‘에는 지정된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 하지만 심퍼시의 대상에는 가엾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 지지나 동의를 표할 사상 · 이념을 지녔거나 그러한 조직 등에 속한 사람,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제약이 붙는다.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품는 감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나오는 행동이고, 엠퍼시는 딱히 가엾지는 않고 나와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보는 지적知的 작업이라 하겠다. - P16

1955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서는 엠퍼시를 ‘자기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판단력을 유지한 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현재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정의나 인지적 엠퍼시의 정의와 같다. - P22

폴 블룸은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의 차이를 논하며 둘 중 더 위험한 것은 감정적 엠퍼시라고 지적했다. 감정적으로 대상에 몰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1950년대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은 진짜 엠퍼시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맥이 닿는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하지만 폴 블룸은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 자체도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정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스포트라이트와 비슷하다. 결함이 있는 백신을 맞 - P23

고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 어린이 한 명을 보고 백신 접종 중지를 외친다면 백신으로 살릴 수 있는 다른 어린이 수십 명을 죽이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폴 블룸은 "이때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공감하는 일은 없으리라. 통계적인 수치에 공감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숫자는 신발을 신지 않기에 없는 신발을 신을 수는 없으며, 인간은 아는 사람의 신발을 신으려 하지 모르는 사람의 신발은 신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반면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엠퍼시야말로 지금 이 사회에 꼭 필요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2015년 1월 24일자에 실린 「엠퍼시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기사는 엠퍼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로 유명해졌다. 크리스토프는 미국에 ‘엠퍼시 갭(타인의 처지를 상상하기어려워하는 인지적 편견)‘이 존재한다면서 사람들이 빈곤에 빠지게 되는 복잡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자고 호소했다. 빈곤에 빠진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다면 ‘빈곤은 자기 책임이다‘라거나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빈곤한 사람이 일정 수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의한 비뚤어진 인식임을 알게 되고, 그런 깨달음이 배려 있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프에게 엠퍼시란 각자의 인지적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폴 블룸은 - P24

엠퍼시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기분을 헤아리는 일‘이 몇몇 개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탓에, 사회 전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을 실현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주장 같지만 방향성을 일부분 공유하고 있다. ‘벗어나서, 넓히다‘라는 지점이 겹치기 때문이다. ‘엠퍼시가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인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고를 확장시키자고 말한다. 한편 ‘엠퍼시가 문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상을 한정시키지 말고 거기서 벗어나 시야를 넓히자고 말한다.
벗어나서, 넓히다.
이 말은 앞으로 엠퍼시를 사고할 때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있으리라. - P25

폴 블룸은 ‘자신을 모델로 타인을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행(과 받아도 별로 기쁘지 않은 생일 선물)이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 - P28

에게 해주어라"라는 마태복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이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일‘과 ‘타인이 남에게 바라는 일‘은 분명 다르므로, 그것이 늘 일치한다고 믿을 때 갖가지 불행이 일어난다는 고찰은 확실히 옳다. 제멋대로 피해자 대신 범인에게 복수하러 간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믿는 일이 ‘타인과 내가 같다고 가정‘한 결과라고 한다면, 거울 뉴런은 타인의 신발을 신기는커녕 타인에게 억지로 내 신발을 신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남의 행위를 흉내 내는 뇌 기능이 과연 엠퍼시와 관련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적지 않다. 물건을 손가락으로 집거나 옆으로 걷는 등의 육체적 움직임은 뇌의 미러링으로 모방할 수 있겠지만, 남이 비탄에 잠기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은 감정에 빠지기는 쉽지 않다.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심 웃고 있을 수도 있고, 기뻐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를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모방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오히려 다 안다는 생각이 타인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남에게 나를 투사하는 일은 타인을 ‘자기투영을 위한 객체‘로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므로, 나를 ‘벗어나기‘는커녕 타인이라는 존재를 이용해 자신을 확대시키는 꼴이 될 수 있다. - P29

가네코 후미코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self-governed‘ 삶을 목표로 하는 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학교와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이런 삶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외톨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애초에 ‘아웃사이더‘로 자랐거나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후미코는 전자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사람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위한 엠퍼시 스위치를 자연스럽게 켤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후미코를 떠올리면 아주 이기적인 것과 아주 이타적인 것이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네코 후미코는 세상에 ‘소속된belonging‘ 감각이 전혀 없이 성장한 사람이었기에 ‘친구 vs 적‘ 구도에서 자유롭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소속‘이라는 감각에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람일수록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인간은 특정한 소속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믿고 그 감각에 기댈수록 자기 신발에 얽매여 자기 세계를 좁혀간다. - P35

"인간은 ‘자유‘를 얻으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아나키와 엠퍼시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전부터 어렴풋이 들었는데, 그걸 자유라는 명쾌한 언어로 표현해주었다. - P36

언어. 그것은 해답인 동시에 새로운 질문이다.
‘스스로 자自에 말미암을 유曲‘의 상태가 ‘self-governed‘이며, LEXICO(옥스퍼드 제휴 무료 사전 사이트)는 ‘self-governed‘를 ‘스스로 통치하고 자기 문제를 컨트롤하는 자유를 갖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아나키적 엠퍼시. - P37

사카가미 감독이 《세카이》 연재에서 제시한 ‘감정적 리터러시‘ 개념이 언어화 능력과 엠퍼시의 관계를 푸는 하나의 힌트가 될 듯하다. 사카가미 감독은 감정적 리터러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직역하면 ‘감정의 언어화 능력‘으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말한다. 동시에 이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도 포함된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한 방법이다.
《세카이》, 2020년 2월호

시마네 아사히 교도소에서는 감정적 리터러시를 ‘감식感識‘으로 번역하여 쓰고 있는데, 사카가미 감독은 그 언어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감식(감정적 리터러시) 자기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느 - P47

끼고 이해하며 그것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힘. 감정 능력. 감정 근육을 강화하는 힘.
《세카이》 2020년 2월호 - P48

자신의 진심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감각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사회에서 타인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많든 적든 경험하는 일이리라. 우리는 날마다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자기 생각을 언어화하지 않은(혹은 못한) 채 대화가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 P51

주체성이란 ‘I‘를 말한다. ‘I(나는)‘라는 주어가 없다면 사람은 무슨 글을 쓰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엠케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적인 연대‘(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해하는 일)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타인과 언어를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언어적 존재이며, 인간의 자의식은 고독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계속해서 증명되고, 인식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체험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형식화하는 일이 가능하다. 인간의 갖가지 특색과 상이점, 유사점, 다양성(즉 개인성)은 타인의 승인 혹은 거절을 통해 비로소뚜렷해진다. - P54

여기서는 ‘개인성‘이라는 단어로 아이덴티티를 표현했다. 여즘 아이덴티티라고 하면 인종, 성적 취향, 젠더 등 소위 귀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본디 아이덴티티는 ‘나를 찾는 일‘이나 ‘나답게 사는 일‘과 연관 지어 쓰이는 일이 많다. 《옥스퍼드 영영사전》 사이트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identity 1. 누군가는 어떤 사람인가, 혹은 무언가는 어떤 사물인가
2. 사람들을 타인과 구분 짓는 특징, 의식, 혹은신조
3. 누군가/무언가와 아주 비슷해서 알기 쉬운상태, 혹은 기분

엠케는 아렌트가 말한 ‘인간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타인과 구분 짓는 특징, 의식, 신조‘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적인 연대‘에 자기 자신으로서 참가하지 않는(계속 거짓말하는) 행위는 ‘I‘라는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결국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방관자 입장(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도 할수 있다)으로 인식하게 된다. - P54

피해자 역할을 한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며‘ 켄타로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느꼈을 심정을 상상했고, 동시에 자기 범죄의 피해자의 신발도 신어본 것이다. 다른 참가자들을 통해 피해자들의 분노와 공포를 대면한 켄타로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반응했지만 차츰 ‘철가면‘이 녹아내리고 ‘I‘가 표출되었다.
롤플레잉이란 놀이이자 연기다.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I‘의 획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는 중학교 교과목으로 연극이 있어서 아이들의 표현력이나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하는데, 이 롤플레잉 장면을 보면서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I‘를 획득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엠퍼시 능력을 향상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여기서도 〈‘I‘의 획득=이기적이 되는 일〉과 〈엠퍼시=이타적이 되는 일〉의 접점이 분명하게 보인다). - P57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회학 분야에서 드라마투르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삶이 끝나지 않는 연극과 같으며 인간은 그 안에 사는 배우라고 주장했다.
어빙 고프만에 따르면 인간은 ‘일상‘이라고 불리는 무대에서 아기로 태어난다. 인간의 ‘사회화‘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연기하는 일이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역할을 확립한다.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만들고 타인에게도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조직 내 - P58

에서는 상사와 부하, 사장과 신입사원, 가족 내에서는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이고 그밖에도 선생과 제자, 의사와 환자, 손님과 점원 등 인간은 실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이런 역할들을 각각의 장면에서 연기하며 자기 캐릭터가 생겨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자기 인식에 닿을 수 있다는 엠케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고프만은 일상이라는 우리의 연극에는 ‘무대 앞‘과 ‘무대 뒤‘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 앞에서 대사를 할 때는 ‘무대 앞‘이니(직장이나 교실, 식사 테이블 등) 인간은 일상의 대부분을 연기하며 지낸다. 하지만 가끔씩 무대에서 내려와 ‘무대 뒤‘에서 쉴 수 있다. 이 사적 영역에서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무대 뒤‘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음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한다.
〈프리즌 서클〉에서 원형으로 늘어선 의자는 무대의 앞일까 뒤일까? 사람들 앞에서 자기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므로 ‘무대 앞‘으로 보아야 하리라. TC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그동안 ‘무대 앞‘에서의 자기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역할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아마도 양쪽 다이리라) 사람들이며, 그들이 ‘변하는‘ 때란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마주하는(파악하는) 상황이다.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타인에게도 마땅히 역할을 부여하게 된다. 이처럼 방관자와도 같이 적당한 태도로 대 - P59

화를 흘려보내던 사람이 TC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자기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어, 의미 있는 말을 하고 ‘대화의 언어가 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원형으로 늘어선 의자는 설령 주위에 타인이 있다고 해도 ‘무대 뒤‘, 혹은 그곳에서 상당히 가까운 ‘무대 앞‘(무대 축이라거나)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프리즌 서클〉을 보고 ‘나도 저 의자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 관객이 많았던 게 아닐까. ‘실은 이런 나를 연기하는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라거나 ‘그때는 그런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라고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하는 사람이많다는 뜻이 아닐까.
(...)
사카가미 감독은 이렇게 안심할 수 있는 장소를 ‘안식처‘라고 불렀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던 사람이 ‘I‘를 주어로 말할 수 있게 되려면 자기를 낱낱이 밝혀도 안 - P60

전하다고 느끼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TC가 ‘안식처‘로 기능했기에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
인터넷 상의 ‘공감‘(=심퍼시)에 기반을 둔 관계는 안식처나 안전지대가 되지는 못한다. 어빙 고프만의 ‘인상관리‘ 개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인상관리란 인간은 누구나 사회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본인의 무대 앞 이미지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환경(집, 방, 만날장소 등), 겉모습, 타인과 교류하는 방법 등을 통해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프로듀스하는 것이다. - P61

관련하여 아민 말루프의 《아이덴티티가 인간을 죽인다Les Identités meurtrières》라는 책이 떠오른다. 우리가 소속된 아이덴티티를 고찰한 책으로, 그는 소속감이 우리 피부에 새겨진 무늬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의 경우 일본인, 이민자, 여성,어머니, 작가, 서구에 사는 아시아인 등 다양한 그룹에 속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아민 말루프는 ‘나‘라는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단 하나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두르고 있는 피부는 한 장밖에 없다. 여러 장의 피부를 몸에 두르고 복수의 인생을 동시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소속된 아이덴티티는 각자가 두르고 있는 피부에 그려진 복수의 무늬 중 하나에 불과하며, 무늬들의 조합이 한 사람 한 사람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모양의 집합체를 ‘개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피부에 그려진 무늬 하나에 불과한 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라고 믿어버리거나 타인이 일방적 - P64

으로 단정지어버릴 때, 우리는 사람을 죽이거나 전쟁을 벌이게 된다고 말루프는 말한다.
‘무늬‘ 개념은 드라마투르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얼굴(역할이라고 해도 좋다)을 가진다. 어떤 남자는 의사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고, 이웃으로 구성된 럭비팀의 일원이고, 공원을 관리하는 자원봉사자다. 그때그때 그는 의사를, 아버지를, 공원에서 잡초를 뽑는 상냥한 아저씨를 연기한다. 그 남자라는 개인은 이 얼굴들의 집합체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진짜 나‘라고 굳게 믿을 필요도, 누군가로부터 ‘이게 진짜 당신의 얼굴이다‘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다.
이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위한 대단히 중요한 인식이리라. 특정 상태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어떤 식으로(못생기고, 아름답고, 상냥하고, 비인도적이고, 올바르고, 악의에 가득 차)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가 가진 하나의 얼굴에 불과하다. 그 사람에게 다른 얼굴(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고의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연기하는 다양한 얼굴의 집합체이므로 ‘이것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결정은 논점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소속된 아이덴티티를 하나로 결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오와 폭력과 비극으로 이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저런 나쁜 놈은 죽여버려야 해‘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이 생겨나는 이유도 그중 하나다). - P65

이러한 관점은 ‘더러운 신발이나 냄새나는 신발은 신고 싶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신고 있는 신발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중 하나)을 보고 저 사람의 신발은 더럽고 냄새날 것이라 단정하는 행위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이 신는 신발(혹은 인생) 그 자체에는 냄새나거나 더럽다는 특성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 P66

이런 점을 생각하면 폴 블룸이 《공감의 배신》에서 전개한 사이코패스 담론이 떠오른다. 블룸은 인지적 엠퍼시가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욕망이나 동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은 완전범죄를 거둔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엠퍼시라는 능력이 늘 선善을 추구하고 인간을 돕는 것은 아니며, 그 능력을 사용해 잔혹한 짓을 저지르거나 타인을 착취하는 인간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엠퍼시를 경제에 도입할 때도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엠퍼시 이코노미라고 하면 선량한 경제, 인도적인 경제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조작하여 착취하는 경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73

《인터넷의 망상 인터넷의 자유가 지닌 어두운 면The Net Delusion: The Dark Side of Internet Freedom》의 저자이자 테크놀로지 작가인 예브게니 모로조프는 이런 케이스를 ‘엠퍼시 워싱Empathy Washing‘라고 부른다. 더러운 비즈니스를 엠퍼시라는 인도적인 이미지의 언어로 세척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이렇듯 허구적인 인도주의에 끌리는 것은 ‘내가 나서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라는 바람이나 테크놀로지가 세계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줄 거라는 순수한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사람들의 선의가 단순히 자기 뱃속을 채우는 돈벌이나 사기나 다름없는 비즈니스에 이용당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익살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엠퍼시 이코노미가 미심쩍은 이유이며, 고도의 알고리즘이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경제와 엠퍼시를 연결하는 일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 P75

스콧이 프티 부르주아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국가가 친 그물망에 잡히지 않고, 서민 계급이면서 자립과 자치에 보다 가까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자치 중 하나다. 주권재아主權在我(삶의 방식에 대한 주권은 나에게 있다)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스콧은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 산업 부문 노동자에게 ‘공장 노동보다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결과, 수십 년에 걸쳐 일관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한 답변은 상점이나 레스토랑 경영, 혹은 농업이었다고 지적했다.
프티 부르주아는 부동산을 포함해 ‘자기 재산‘을 갖는 일에 집착한다. 따라서 ‘졸부‘, ‘중산층‘이라는 의미로 모멸적인 취급을 받아왔지만(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귀족 · 지식인 계급으로부터도), 스콧은 이러한 행위에도 합리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하층 계급에게 허락된 자치와 자립은 주로 두 가지 형태였다. 국가의 손이 닿지 않는 주변부에서 생활하든가, 국가 안에 있더라도 소규모 재산을 보유하면서 최소한의 권리를 갖고 생활하든가.
많은 사회에서 보이는, 약간의 토지와 자신의 집과 가게를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그것들 덕에 가능한 자유로운 - P110

행동과 자치와 안전이라는 실제적 여유와 함께, 국가나 이웃사람들의 시선에 비치는 소규모 재산으로 얻을 수 있는 존엄과 지위와 명예를 향한 희구 때문에 발생한다.

소규모 재산으로 얻을 수 있는 존엄과 자립을 찾아 행동하는 힘은 곧 자주와 자율을 향한 강한 열망이다. 영국 청교도때의 디거스와 레벌러스, 1910년 멕시코 혁명 때의 농민 운동, 아울러 셀 수 없이 많은 반식민지 운동 등 급진적인 대중 운동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토지를 갖고 싶다‘, ‘토지를 되찾고 싶다‘라는 갈망이었다. 이는 폭력 세력(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그리하여 자기들의 토지를 찾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로써 스콧이 말하는 ‘자립自立‘과 대처가 믿은 ‘자조自助’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둘 다 ‘자自’로 시작하는 두 글자라서 비슷한 말이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립한다는 것은 영어로 independent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independent‘의 의미를 캠브리지 영영사전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제일 먼저 이런 뜻이 나온다. - P111

다른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혹은조종당하지 않는다.

즉 자기 일은 어떻게든 자기가 알아서 해야만 하는 ‘자조‘와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자립‘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정부가 ‘스스로 노력해서 상황을 헤쳐 나가라‘라고 말하는 순간이미 국가가 명령을 내리는 지배가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곧 ‘국가는 당신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지만 당신들을 돕지는 않습니다‘라는 뜻이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다.
참고로 같은 사이트에 ‘자조‘를 뜻하는 영어 단어 ‘self-help‘의 의미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신, 혹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과 역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공적 조직에 가지 않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행위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경험과 역경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조‘는 자기 주위 사람들로 한정되며,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느끼는 심퍼시와도 이어진다.
여기서도 대처에게 심퍼시는 있었지만 엠퍼시는 없었다는 지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P112

마르크시즘에서는 자본주의가 낳은 새로운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재산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까지 서구의 급진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중심에는 프티 부르주아(직공, 구두장이, 인쇄소 등)가 있었다고 스콧은 지적한다. 그렇기에 스콧은 ‘소규모 재산이 주는 불가침성의 자립을 향한 그들의 갈망 없이는, 평등을 외치는 싸움의 역사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스콧은 프티 부르주아들이 발명과 창조의 선구자라고도 한다. 지배자에게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토지와 가게와 공방을 갖기 때문에 ‘이 물건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지 않으니 다른 제품을 만들어라‘나 ‘효율이 나쁜 상품은 그만 만들고 국가를 위해 생산성 높은 상품을 만들어라‘ 같은 위에서 내려오 - P114

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 그렇게 팔릴 것 같지도 않은 물건을 개발하고 효율이 나쁜 비즈니스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본 적 없는 기발하고 새로운 것은 종종 이런 곳에서 나온다. - P115

적어도 대처는 자기 밑에서 일하던 랭키스터에게는 "내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심퍼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대처에게는 주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자조를 위한 자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그녀처럼 강한 야심을 갖지는 않고 온화하게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서민의 바람은 알지 못했다. - P118

2020년 4월 25일자 <가디언>에는 뉴욕대학 사회학과 교수 캐슬린 거슨의 흥미로운 발언이 실렸다. 남성 정치가들은 여성에 비해 ‘리더란 이래야 한다‘라는 틀에 갇히기 쉬워서 엠퍼시에 능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라면 감정적으로 배려하고 상냥하기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림 없는 강력함과 파워를 드러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지도자들처럼 강하고 결단력 있지만 배려심 넘치는 모습도 보이는 다면적인 지도자상을 연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성 지도자들은 엠퍼시 능력이 낮은 것이 아니라 젠더 이미지에 갇혀 엠퍼시 능력이 있더라도 이를 봉인하면서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닐까. - P125

이처럼 엠퍼시라는 한 단어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 감정과 사고의 전염에 의해 자동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는 - P131

(동일화하는) 것이 감정적 엠퍼시이며, 그 정반대에 놓인 것이 인지적 엠퍼시다.
인지적 엠퍼시는 자연스럽게 대상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과 타인은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 후, 타인의 시점을 취득하여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는 능력이다. 하품은 인간뿐 아니라 침팬지, 원숭이, 강아지 사이에서도 전염되는데, 팔라기는 이를 근거로 동물 역시 인간의 감정적 엠퍼시와 유사한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지적 엠퍼시처럼 복잡한 능력도 지니는데, 이는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가 뇌에서 생성되는 프로세스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적 엠퍼시와 인지적 엠퍼시의 차이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이라는 두 방향 개념으로 설명된다. 하향식과 상향식이라고 하면 정치, 사회운동, 기업 등과 관련된 조직의 구성 방식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인간의 감정도 이 두 가지 경로로 발생한다고 한다.
덴버대학과 스탠포드대학 연구자들은 「상향식 감정과 하향식 감정의 발생: 감정 조절의 영향」(2012년 3월 7일)이라는 - P132

논문에서 상향식 감정이란 어떤 즉각적인 자극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으로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동차가 가까이 달려들어 공포감을 느끼는 리액션을 취할 때의 감정이다. 한편 하향식 감정은 보다 의식적인 반응에 의한 것으로, 자극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두고 스스로 생각할 때 파생되는 감정이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불안해지는 것과 같다.
상향식 엠퍼시란 타인의 행위나 상태를 뇌에서 미러링하여 리액션이 나타나는, 즉 감정적 엠퍼시다. 한편 ‘인지적 타자시점 취득cognitive perspective-taking‘이나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하향식 엠퍼시는 타인의 감정이 완전히 나의 상상이나 이해를 바탕으로 존재하고 뇌신경의 제어나 억제 메커니즘에 의해 나타나는 엠퍼시다. 즉 햐항식 엠퍼시는 미러링으로 자기도 모르게 느껴 ‘억누르기 어려운‘ 공감과 달리, 뇌의 제어 기능이 작용하는 범위에서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을 사고하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행하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P133

심리학자 비키 헬게손과 하이디 프리츠는 이렇듯 타인을 지나치게 배려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우선하는 성질을 연구하며 이를 ‘과도한 교감unmitigated communion‘이라 불렀다. 과도한 교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보호적 · 침략적 · 자기희생적‘이고, ‘남이 나를 싫 - P135

어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남이 자신의 도움이나 조언을 바라지 않으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과도한 교감‘에 빠진 사람은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만 얽매여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을 게을리 하는데,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심장병, 당뇨병, 암 등의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고 한다.
‘과도한 교감‘을 측정하기 위해 두 사회학자는 ‘내가 만족하려면 남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남의 문제로 고민하는 일이 많다‘와 같은 평가 항목을 포함한 척도를 개발했으며, 이러한 측정 방식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점수가 높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몇몇 심리학자들은 이런 연구 결과에서 나타나는 성별의 차이가 불안이나 억울함에 빠지기 쉬운 것이 여성의 성향임을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교육학자 바버라 오클리는 ‘여성이 일반적으로 많이 걸리는 질병과 병증은 타인에게 초점을 두고 강한 공감을 느끼는, 여성의 일반적인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빅토리아시대로부터 이어진 ‘여성 뇌 · 남성 뇌‘ 논쟁이 또 출현한 것이다. - P136

그런데 블룸은 ‘과도한 교감‘은 위험하지만 ‘교감‘은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는 ‘교감‘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는 정도‘,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 ‘친절한 마음‘, ‘타자이해‘ 등을 제시한다. 블룸의 책에는 이 평가에서 남녀 어느 쪽의 점수가 높은지는 나와 있지 않고, ‘교감‘에는 ‘과도한 교감‘에서 나타나는 공감적 고통(타인의 고통을 느끼면 자신도 괴로운)이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한다. ‘과도한 교감‘은 대상을 미러링하여 순식간에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는 상향식 감정적 엠퍼시이며, ‘과도하지 않는 교감‘은 자기 제어가 가능한 뇌 시스템에서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하향식 인지적 엠퍼시라는 것이다. 전자는 자기와 타인을 동일시하기에 공감적 고통을 느끼지만 후자는 자신과 타인을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에 자기 억제가 가능하다. 나는 나이며 타인과 나는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 타인의 생각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뇌의 거울로 타인이 된 나를 그려보는(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과 같은 신발을 신고, 어쩌면 같은 옷을 입고 머리 모양이 똑같은 상태) 것이 아니라 타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자기 신발을 벗고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블룸의 주장처럼 ‘교감도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균형에서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를 정의해 보려고 질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불완전한 괴물‘이라는 대답이 따라 붙었다. 나라는 존재는 파괴적으로 무능력해서, 자신을 망치는 식으로만 완전해지는 듯했다. 앞으로도 책에 쓰인 대로 망해 가겠지, 충동과 우울을 뭉쳐 공기놀이나 하며 살겠지 싶었다.
스티브 잡스나 에디슨도 ADHD라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폰이나 전구에 버금가는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동등해진 느낌에 기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희망이 옅어질 때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싶었다. 작가가 한국의 미혼 여성 ADHD이고, 자기애로 가는 걸음마 중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없었다. 세상에는 ‘네가 무엇이든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는 식의 낙관이 유행했지만 내게 적합한 안심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울던 사람은 쉽게 웃는 방법을 경계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난 괜찮지 않았고, 몇 년째 도망다니며 그저 삶을 유예하는 중이었다.
다른 ADHD들도 나처럼 새하얀 밤과 깜깜한 낮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친근하고 정중하게 안부를 묻기 위하여, 일단 나의 이야기를 썼다. 모자란 글들을 초대장 삼아 전송할 - P10

수 있다면, 나의 해묵은 패배감도 즐거운 파티의 호스트가 될 것이었다.
책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 질환들을 무작정 사랑하려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긍정은 홍정영역이 아니었다. 책다운 기승전결보다는 내가 여기 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살아 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네모난 책장에서 만난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마모시키며 둥글어진다면 그제야 의문 없이 기쁠 것 같았다.
기뻐 본 적이 별로 없어 기쁨을 설계하려는 시도가 낯설었다. 모든 글을 지우고 숨고 싶은 충동에 자주 시달렸다. 하지만 쓰다 보면 슬픔과 삶의 주종 관계가 전복될 것임을 믿었다. - P11

세상은 양쪽으로 봐야 좀 더 재미있는 곳이다. 자꾸 깜빡깜빡 잊고, 아주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는 내가 예전에는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망각이 신이 주신 선물이고,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든 것 없이 가벼운 인생‘은 관점을 바꾸자 ‘잊음으로써 가뿐해지는 인생‘이 되었다. 나는 계속 사사로이 절망스럽겠지만,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기에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다. - P19

지금 내 좌우명은 ‘뭐 어때ㅑ용‘이다. ‘뭐가 어때요‘가 아니고 오타 그대로 ‘뭐어때ㅑ용,‘ 별 뜻 없지만 그 어떤 규칙성도 찾아볼 수 없는 배열이 내 인생과 닮은 것 같다. 지금도 심각한 열등감이나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저 말을 떠올린다.

ADHD라도 뭐 어때ㅑ용.
또 지각했어도 뭐 어때ㅑ용.
맨날 돈이 없어도 뭐 어때ㅑ용.
끝맺을 말이 마땅치 않아도 뭐 어때용! - P49

ADHD 진단 후, 너무 충격을 받아 내게 쏟아지는 타인의 피드백을 전부 수용하려 들었다. 평판 수집가처럼 굴면 - P100

서 시분초 단위로 뭔가를 개선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큰 실수는, ADHD가 아닌 모든 인류를 정상인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단지 ADHD가 아닐 뿐 다들 제각기 미쳐 있는 세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럴 땐 우리의 주특기인 ‘잊기‘와 ‘관심 끄기‘를 사용해 안전해지자. 일단 안전해야 행복도 있으니 말이다. - P101

가끔 ADHD란 존재하지도 않고, 약도 치료도 정신과의 상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쭈그려 앉아 껌 떼던 순간이 떠오르곤 했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는 단체생활을 못 하던 내가, 자기혐오를 방패 삼던 10대의 내가 껌 대신 처방전을 뗐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었다. 지금 여상히 삼켜 대는 알약이 그때도 주어졌더라면 나는 밖으로 나도는 대신 내 안으로 내달렸을지 모른다. 어 - P148

차피 내가 뗄 껌을 뱉는 친구한테 "야, 이 시발새끼야 다시 안 처먹어?"라고 하는 대신, 아주 차분하게 올바른 환경 미화에 대한 의견을 전할 수 있었을지도. 그럼 서른 살의 나는 동창회에 떳떳하게 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ADHD 약을 먹는다고 갑자기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이 되진 않았겠지만 누군가의 상냥한 친구나 딸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 P149

난 패 주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유형의 가족, 친구, 애인, 상사, 부하직원, 동료로서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듣기로 나의 최악은 ‘변할 듯 변하지 않으며 끝끝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점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말은 고의성에 대한 오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부족한 행동에 대고 "너 일부러 그러냐?"라고 물어 댔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다. 그 질문을 들으면 머리 뚜껑을 열고 속을 보여 줘서라도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P207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정신과에 얼마만큼의 편견을 갖고 있는가? 나를 좋아하니까 편견을 버릴 것인가? 어쩌면 불쌍히 여길까? 혹여 내 불행을 행복의 재료로 삼진 않을까? 그러나 최우선 과제는 남을 빼고 오롯이 나 스스로 ADHD의 수용 정도를 재 보는 것이었다. ADHD에 대한 내 생각이 불분명하면 타인의 반응에서도 모호함밖에 느낄 수 없었다. 위로도 위로 같지 않고, 침묵은 반드시 비난 같았다. 사실 그것은 왜곡이다. 나에게 어떤 위로도 무효하니까, 침묵엔 빈 공간이 많으니까, 내 생각이 타인의 입을 빌어 힘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ADHD를 수치로 여기던 시절엔 누구에게 내 비밀을 털어놔도 개운하지 않았다. - P212

굳이 따지자면 ADHD는 개인정보이니 밖을 나돌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다. 메일 주소나 SNS 계정, 휴대폰 번호를 생각하면 공유 대상을 가리기 쉽다. 가족이어도 싫으면 알리지 않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필요에 따라 말할 수 있다. 정보의 개폐 유무를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내 질환명을 공지 사항처럼, 자유 게시판처럼, 리뷰 이벤트처럼 다룰 것 같은 사람에게는 말을 아껴야 한다. 적재적소에 말을 아끼면 품을 들이지 않고도 나를 아낄 수 있다.
그럼에도 헷갈릴 때는 마지막 관문처럼 나 자신을 돌아본다. ADHD가 탄로날 ‘뻔‘했을 때, ‘실상은 모르지만 왠지‘ 탄로 난 것 같을 때, 나는 내가 믿던 상대방을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라는 상대의 진술을 집에 와서 되새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란 물음들이다. 이런 질문들에 명확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편이 낫다. 애초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말하고 말한 후에는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 P214

마음만 먹으면, 글 속의 나는 천사나 돌고래가 될 수 있었다. 스님이나 노숙자, 다음 대선의 서른 살 대통령도 가능했다. 반대로 대통령이 되길 거부한 서른 살도 쉬울 거였다. 좀 더 넓게 역사를 망가뜨리며 나를 섞자면, 닐 암스트롱 대신 최초로 달에 간 인간이나 여성 걸리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단 생각이 들자, 왠지 절실히도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건 이상하게 눈물 나는 감각이었다. 나는 허접하고 추하고 멍청하고 사랑스럽지 않은데 왜 하필 나 자신을 원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남이 되길 원했다면 소설을 시도했을 거다. 하지만 나 자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에세이를 쓰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를 원했다기보다 나 자신을 구하길 원한 것 같았다. - P217

글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내 경우엔 ‘멋짐을 포기하는 태도‘였다. 글에는 별다른 장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곧 장비가 되었다. 나는 예쁜 글이나 화려한 글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감수성이나 실력 면에서 가난한 내가 취할 수 있는 강점은 그저 무식한 솔직함 하나인 듯했다. - P218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글들은 더 시시해지기 위해, 추해지기 위해, 더럽고 서러웠던 기억을 그대로 박제하기 위해 쓰인다. 나쁜 것들은 일단 꺼내어 촘촘히 뜯어봐야만 앞으로 사랑할지 영영 미워할지 결정 내릴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한 번 쓰고 나면, 싫은 것들과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두 번 쓰면 악감정과 나는 데면데면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세 번 네 번이 되면 어느새 온갖 부정들도 놓치기 아까운 삶의 일면으로 체화되는 듯했다. - P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 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에서 누제닉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 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 - P15

었다. - P16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 P29

수많은 수감자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이 크게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 P30

정신 의학에는 소위 ‘집행 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 사람들이 수감자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과 수년 동안 매일같이 이 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접대반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 P32

이런 일을 당하면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 하나둘씩 차례로 무너져 갔다. 그다음에는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섬뜩한 농담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
이런 종류의 이상한 유머 외에 우리를 사로잡는 또 다른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궁금증이었다. 그전에도 나는 어떤 낯선 상황에서 제일 먼저 궁금증이 고개를 드는 것을 경험했다. 언젠가 등반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 가장 먼 - P40

저 궁금증이 생겼다. 이 위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개골이 박살날까? 부상을 당한다면 어떤 부상일까?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우리에게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결말은 어떻게 될까? 이런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 P41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자네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보자. 나치대원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당장 따로 분류하고, 그다음 날 틀림없이 가스실로 보낼 거야. 자네들은 ‘회교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불쌍하고, 비실비실하고, 병들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고된 육체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회교도‘라고 한다네. 조만간, 아니 대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회교도들은 가스실로 보내지지.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는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 P45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 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 P47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 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 P51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 P50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 P54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즉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돼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 P58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치는 걸 보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깨우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 P59

시시때때로 의식을 파고드는 먹는 것과 좋아하는 요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앞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과 의지력의 충 - P61

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사람들은 모른다. 참호 속에서 땅을 파고, 빵이 배급되는(만약 배급이 된다면) 오전 9시 반이나 10시―30분 동안의 점심시간―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감독에게―그가 마음씨 좋은 사람일 경우―지금이 몇 시냐고 계속 물어보고,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빵을 장갑도 끼지 않은 언 손으로 살살 만지다가 손톱만큼 떼어 먹어 보고, 그러다가는 마지막 남은 의지력으로 빵을 도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오후까지 참겠다고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상황을 말이다. - P62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 - P67

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P68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간에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 사람들이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 - P76

이다. - P77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 - P78

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 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79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 P82

수용소에서는 자기 목숨이나 친한 친구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와 관련 없는 그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었다는 얘기를 이미 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가 희생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 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강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 - P86

로 떨어져 다니는―다니게 된다.
그런데 비록 수는 적지만 매우 위험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고문을 하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방법에 아주 능통한 자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함치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 대며 무리를 뒤에서 앞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그러면 행렬 양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렬 한가운데에서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치 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P87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서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환자의 호송을 맡은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환자의 유일한 소유물, 즉 끔찍한 해골 위에 씌워 놓은 넝마 옷뿐이었다. 호송을 맡은 사람들은 뻔뻔한 호기심으로 호송되는 ‘회교도‘의 외투나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은 것인지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순서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 P91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 P96

수감자들의 무감각이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는 것 외에 여기에는 또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굶주림과 수면 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이 무감각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수면 부족은 밤새 이와 벼룩 등에 시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건 - P103

시설과 위생 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와 벼룩이 사람들로 꽉 찬 막사 안에서 무섭게 퍼져 나갔다.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됐다.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수용소라는 사회의 구조를 관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수감자, 카포, 요리사, 군수 창고 관리인, 보안대원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계층이 하락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약간의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불평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농담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어떤 사람이 한 카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들은 적이 있다.
"상상해 봐! 내가 알고 있기로 저 사람은 그전에 큰 은행 총재에 - P104

불과했거든. 그런데 지금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출세한 거야!" - P105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 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 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이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 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라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 - P107

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 - P108

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P109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 - P110

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그 자신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 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난다. - P111

우리는 앞에서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 - P113

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 안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 P114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내면의 시간―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 P115

삶이 날아간 것 같은 이런 느낌은 다른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갇혀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사실 수감자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다)과 갇혀 있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그 요인이다. 철조망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주 멀리 떨어있는 것,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정상적인 삶은 수감자에게는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바깥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저세상에서 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승과 같이 비쳐졌을 것이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 - P116

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 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 P117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 병리적 상처를 정신 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 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 P118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수용소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친구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 밖에 도움에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 P120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 치료와 정신 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를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기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 P123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 P124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우리 같은 수감자에게 이런 생각들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사색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살아서 그곳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 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 - P125

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받는 것과 죽어 가는 것까지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 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26

나는 아직도 두 개의 자살 미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두 사건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자살 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것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중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일이었다. 과학자였던 그 사람은 책을 써 왔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의 - P127

아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베푸는 데 있어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P128

이제 강제 수용소에서의 정신 의학,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됐다.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이다. 해방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개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극도로 긴장했던 며칠이 지난 후 수용소 정문 위에 흰 깃발이 펄럭였던 그날 아침의 경험담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겠다.
정신적 흥분 상태에 이어 전체적인 긴장이완 상태가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피하려고 자맥질하는 오리처럼 몸을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감시병들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빠르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 - P137

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천히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곧 다리가 아프고 구부러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절뚝거리며 걸었다. 자유인의 눈으로 그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수용소 주위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렀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부끄러운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 P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