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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 - 인간관계부터 커리어까지, 생각이 많은 나를 위한 철학 수업
크리스토프 크바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6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철학은 다르게 생각할 용기를 주는 활동이다'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 공감한다. 일상은 평범하게 흐르다가도 예기치 못한 일에 흔들린다. 그런 삶과 철학이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 학문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진짜 물음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반갑다.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해도 괜찮을까?",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할까?" 같은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것들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내 삶의 장면에서 시작하니, 철학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키르케고르와 니체를 다룬 대목이 좋았다.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완성되는 상태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과정이며, 다 되었다고 믿는 순간 나를 잃는다. 니체가 위버멘시라 부른 창조하는 인간도 그렇다. 창조는 낡은 것을 허무는 일이라 늘 위험하지만, 니체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자를 사랑했다. 그 넘어섬이 곧 살아 있다는 것이다. 두 철학은 모두, 고정되지 않고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나'를 향한다. 완성이 곧 상실이라는 말이, 무언가를 자꾸 끝맺고 확인하려는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이 책은 일상의 질문마다 '예' 혹은 '아니오'로 먼저 답을 내놓는다. 정답이 없어 보이는 물음 앞에서 누군가 "이게 맞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면 편리하다. 다만 편리함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략한 대가로 온다. 답은 대체로 저자 자신의 의견이 먼저 있고, 철학자는 그 뒤에 소환된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와 상황에 불려 나온 철학자의 사상이, 애초에 그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어긋나는 지점이 눈에 띄었다.
가령 헤겔의 변증법이 그렇다. 저자는 그것을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도 타협하라"로 읽는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주인노예 변증법에 타협은 없다. 그것은 목숨을 건 투쟁에서 시작된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기대어 산다. 반면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된 듯 보이지만,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예속된 쪽은 오히려 주인이다. 변증법은 양보와 절충이 아니라 대립을 끝까지 밀어붙여 전복시키는 힘이다. 그것을 타협으로 옮기는 순간, 헤겔의 핵심은 사라진다.
레비나스를 가져온 챕터도 비슷하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게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을 노숙인에게 건네는 연민의 적선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그 적선이 우리의 인간성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좋은 의도의 말이고 행동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무한이며, 나로 환원되지 않는, 신성에 가까운 부름이다. 나는 그 앞에서 무한히 응답하도록 소환될 뿐, 그를 결코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타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좁히고, 무한한 부름을 '나의 인간성'을 위한 수단으로 되돌린다. 나를 높은 곳에서 부르던 얼굴이, 내가 내려다보며 돕는 자리로 끌어내려지는 것이다. 타자를 결코 나를 위한 도구로 쓸 수 없다고 한 철학자가, 정작 나를 위해 타자를 돕는 자리에 세워진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철학자들의 언어를 가져오는 설정은 흥미롭고 유용하다. 하지만 빌려온 언어가 원래의 뜻과 어긋날 때, 그 유용함은 오해가 되기도 한다. 철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철학이 삶의 물음에 답할 때조차, 그 답은 세계를 보는 틀에서 따라 나온다. 틀을 떼어내고 결론만 옮기는 순간, 그것은 처세의 요령이 되고 만다. 철학을 삶에 붙인다는 것은 당장의 답 대신 삶의 방향과 의미를 묻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물음을 닫지 않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용하지 않다. 그리고 유용하지 않기에 철학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정답을 찾는 이에게는 유용하고, 철학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이에게는 시작점 정도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