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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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 메리 하트만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유학파 영문과 교수가 쓴 글이라 하면, 어딘가 세련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장영희 교수의 글은 그와는 전혀 다르게, 슴슴할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다정하다. 화려한 수사를 걷어낸 문장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치기 쉬운 소중한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라는 말만 점점 커지는 시대에, ‘우리나의라는 말은 나만큼 소중한 타인을 함께 품는 언어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말썽만 피우던 한 제자는우리 상호, 많이 다쳤구나라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마음을 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라는 단어에 담긴 연대의 힘이, 그의 닫힌 마음을 천천히 녹여낸 것이다.

야학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은 성적 부진으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정비공이 되기로 한다. “에이, 선생님.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겠어요?”라는 자조 섞인 질문에, 장영희는 유학 시절 만났던 경비 아저씨 토니의 이야기를 꺼낸다.

전직 택시 기사였던 토니는 크리스마스 새벽, 한 할머니 승객을 태운다. 호스피스 병원 주소를 내민 할머니는 시내를 돌아서 가자고 부탁한다. 그는 그녀가 젊은 시절 일했던 곳, 처음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를 차례로 돌며 조용한 드라이브를 함께한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정말 행복했다우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삶이 특별한 사건이나 위대한 성취로 채워져야 한다고 믿지만, 작가는 말한다. 진짜 위대한 순간은 어쩌면무심히 건넨 한마디 말, 별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살게 하는 근본적 힘은 문학이다.
문학은 삶의 용기와 사랑,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준다.
나는 기동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문학을 통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워왔다.”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신체가 자유롭지 못했던 그녀는 세상의 많은 문턱 앞에 자주 가로막혔다. 입학조차 거절당하는 현실 앞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문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과 연결되는 창이자 날개였다. 자유롭게 걷는 대신 문장 위를 걸었고, 타인과의 거리는 언어의 온기로 좁혀갔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에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고통을 외면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주홍 글자』 속 칠링워스에게서 느낀 연민도, 어쩌면 자신의 그림자를 조용히 들여다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암 투병 끝에 2009년 세상을 떠난 장영희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영문과 교수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로 활동했던 그녀는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아이방 책장을 뒤적여 봤지만, 그녀의 이름이 적힌 책은 이미 정리된 듯 보이지 않았다.


폭염 속에서 그저 시원한 것만을 찾던 내게, 이 책은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 아련하고 따스한 온기를 남겼다. 마치 이른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고요히 하루를 열어주는 그런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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