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
장성남 지음 / 클래식북스(클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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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


여름의 유혹인 복숭아는, 과육이 완전히 무르익으면 감춰두었던 눈물처럼 갈색 그늘 사이로 진득한 과즙을 흘린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나무에 매달린 복숭아들은 여름 햇살 아래 살을 올리며 여물어간다. 그러나 자라는 과정에서 열매에 생채기가 나기도 한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벨벳 같은 껍질로 감싸인 부드러운 속살에 멍든 자욱으로.


『기억이 나를 멈추게 한다면』은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공허를 느끼며 글쓰기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무심코 흘려보낸 기억들과 관계의 미묘한 불협화음이 모두 내면의 목소리를 깨우는 신호였음을 저자는 뒤늦게 알아차린다. 타인의 인정과 책임감으로 빼곡했던 삶이 위기를 맞자, 저자는 멈춰 선 시간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의 칭찬과 인정에 늘 목말랐고, 타인의 한마디에 내 존재 가치가 출렁였다."


이 고백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난 때문에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에도 그는 밭일을 도우며 맏딸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했다. 절대 권력처럼 느껴졌던 아버지 앞에서 연약하기만 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향한 연민과 사랑은 동시에 미움, 책임감, 죄책감으로 뒤섞여 그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오랫동안 삶의 페이지 어딘가에 묻혀 읽히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한번의 이혼과 딸의 방황, 그리고 또 다시 만난 사랑. 그 힘든 시간들 속에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면의 공허함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그는 펜을 들고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이제 그는 그 상처들을 들여다보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숨겨진 상처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살면서 우리는 흉터를 꽁꽁 감추며 그럭저럭 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봉인이 터져버릴 때가 온다. 그 순간 비로소 오래된 아픔을 직면하게 된다.


기억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어떨까?

치유는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상처가 선명해질 때, 우리는 글을 통해 그 아픔을 어루만지고 재해석할 수 있다.

진솔한 글쓰기는 마음의 멍 자국 위에 부드러운 위로를 스스로 얹어 주고,

오롯이 자신의 못난 과거를 끌어안는 용기가 새로운 싹을 틔우는 첫걸음이 된다.


어느 날 어떤 기억이, 상처가 당신을 불러 세울 때, 고요히 들여다보며 작은 노트를 하나 꺼내 응답하기를. "지금까지 충분히 잘 살아왔고, 견뎌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어도 좋겠다.

조금…간지러우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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