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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음 - 도시는 어떻게 시민을 환대할 수 있는가
김승수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월요일 아침 9시 40분, 강남역 11번 출구.
한때 나는 그 도시를 매일 걷곤 했다. 출근길의 인파와 뒤엉켜, 도시의 속도를 따라 걷던 날들. 주말 밤의 열기로 반짝이던 거리는 아침이면 언제나 빛 바랜 듯 창백했다. 뜨거운 숨결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상점과 빌딩들만 기계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도시도 사람들도 어딘가 지쳐 있었다. 나는 그 창백함 사이를 어색하면서도 익숙하게 걸었다. 유리창 너머 진열된 물건들이 반짝였지만, 그 빛깔은 차갑기만 했다. 손에 들린 커피 한 잔이, 그 아침의 유일한 쉼이었다.
『도시의 마음』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이름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가 말한,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떠돌던 산책자 플라뇌르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목적 없이 걷되 예리하게 관찰하고, 무심히 스쳐가는 풍경 속에서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는 그 감각. 벤야민에게 도시는 하나의 텍스트였고, 그는 간판과 진열창, 군중의 발걸음 속에 감춰진 근대의 얼굴을 읽어냈다. 김승수 역시 전주라는 도시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도시는 시민을 환대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25년의 행정 경험과 8년간의 전주시장 재임 동안 집요하게 붙든다. 우리는 지하철 요금만 있으면 도시 어디든 닿을 수 있지만, ‘닿는 것’과 ‘환대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갈 수 있다는 것은 이동의 권한이지만, 환대는 존재에 대한 인정이다. 어느 공간이 나를 받아들이는가? 어떤 장소에서 나는 스스로를 시민이라 느낄 수 있는가?
물론 도시에서도 환대를 ‘살’ 수는 있다. 카페나 상점, 브런치 맛집. 돈을 지불하면 우리는 고객이 되고, 일정한 친절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래로서의 환대, 유효기간이 정해진 관계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런 환대라도 필요하기에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가 진정한 삶의 공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환대다.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머물 수 있는 자리, 말없이 앉아 있어도 괜찮은 공간. 그런 곳에서야 우리는 도시와 관계 맺는 시민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도시에 과연 그런 공간이 얼마나 될까?
수많은 장소와 건물들 속에서, 지불 없이 환대의 경험을 얻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자본이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공공 기관과 도시 계획이 설계한 자리가 더 중요해진다. 누구나 조건 없이 머물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이 있는 도시야말로 진짜 환대를 실천하는 도시일 것이다.
책에서 소개되는 ‘책의 도시’ 전주의 사례들은 단순한 정책 보고가 아니다. 한옥마을도서관, 책기둥도서관, 예술놀이터처럼, 시민 누구나 머물고 머무름으로써 관계를 맺는 공간들은 도시라는 텍스트의 문장을 새로 써 내려간다. 폐공장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고, 성매매 집결지를 재생하는 작업은 도시 문장의 주어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이 도시를 걸었다면, 변화하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 구조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포착했을 것이다.
이 책은 도시정책자나 건축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도시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의 도시에는 기억이, 감정이, 그리고 환대가 깃들어 있는가?
저자는 말한다. 도시가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고.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 도시를 산책하는 자만이 도시에 깃든 시간을 읽을 수 있다. 김승수는 우리 모두에게 그 산책자의 시선을 권한다. 이제는 시민이 도시를 읽고, 도시에게 말을 걸 차례다.
언젠가 전주를 찾게 된다면, 한옥 도서관과 숲속 도서관에 들러 조용히 머물러보고 싶다. 그 공간들이 어떤 분위기와 여운을 품고 있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