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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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레비나스가 떠올랐다. 그의 철학에서 타자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무한’이다. 이때의 무한이란, 나의 이해와 인식의 틀을 넘어서 존재하는 타자의 본질적 특성을 뜻한다. 타자는 결코 나의 것으로 환원되거나 소유될 수 없는, 고유하고도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자 마자 그곳의 주민들을 상품화 가능한 사물로 인식하고 대상화한 것은 상징적이다. 이후 유럽인들 역시 원주민의 타자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언어와 범주 속에 그들을 가두었다. 문명의 도구와 그럴듯한 외양을 갖추었지만, 그들은 타자의 얼굴이 조용히 던지는 “나를 해치지 말라”는 윤리적 요청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원주민은 ‘야만인’, ‘식인종’, ‘미개한 자’로 분류되었고, 그렇게 유럽인의 시선 안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들에게 원주민은 소유와 거래의 대상, 물건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놀라웠던 것은, 나 역시 그들에 대한 인식에서 유럽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도 그들을 이질적이고 기이한, 일종의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낯섦과 편견 속에 가둬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야만의 해변에서』는 이처럼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 저항하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을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했는지를 그들의 시선에서 복원해 나간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역설도 재미있다. 우리가 ‘야만인’이라 불렀던 이들이 유럽 땅에 도착했을 때, 오히려 그들의 눈에 비친 유럽이 ‘야만의 해변’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 본 유럽은 부유하고 신기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불평등과 모순이 가득한 사회이기도 했다. 일부는 화려한 옷을 입고 궁전에서 잔치를 벌이는 한편, 거리에는 굶주린 거지들과 병든 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특히 기독교 문명이 이러한 불평등을 묵인하는 모습은, 공동체 구성원을 돌보는 전통을 지녔던 원주민 사절단에게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유럽은 화려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세계였다.


책을 통해 나는 대항해 시대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지 수동적인 식민지의 피해자가 아니라, 역사의 능동적 주체였다. 유럽 궁정을 방문한 틀락스칼라의 사절단, 스페인 왕 앞에서도 당당했던 마야의 족장, 낯선 땅 유럽에서 스스로의 가문을 일군 잉카의 공주. 그들은 통역사이자 중재자, 지식인으로서 두 세계를 오가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협상해 나갔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하나의 범주로 환원하는 순간, 이미 타자에 대한 폭력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자신들의 이해 체계 안에 가두었고, 이는 곧 식민 지배의 시작이기도 했다. 『야만의 해변에서』는 그 폭력의 서사를 거슬러 올라가, 지워졌던 목소리와 시선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역사적 시선을 낯설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진정한 이해는 타자를 나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타자의 얼굴을 응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로부터 말을 건네받고, 응답할 수 있는 진정한 만남의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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