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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미드 『왕좌의 게임』 전쟁신을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호메로스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이처럼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를 쓰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거꾸로 호메로스에게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감정은 이성에 의해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없으며, 오직 더 강한 반대 감정에 의해서만 억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을 추동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감정이다.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리아스』는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대서사시다.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는 그 두께에 잠시 움찔했지만, 편안한 대화체와 강렬한 서사 덕분에 예상보다 수월하게 완독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서사는 단 하나의 감정, ‘분노’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그것. 서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이여, 노래하라,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단순한 개인의 감정을 넘어,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추진력이자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힘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복잡하고 불완전한 감정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리아스』 속 신들은 완전무결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제우스는 자신이 편애하는 인간의 편에 서고, 헤라는 트로이에 대한 증오로 깊이 개입하며, 아테나는 냉철함 속에서도 감정의 흐름에 따라 전투를 조율한다.
결국 『일리아스』는 인간과 신이 함께 만들어내는 거대한 감정의 분화구다. 호메로스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단지 무기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증오, 욕망과 자존심 같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의 불길은 인간의 마음을 넘어 신들의 세계까지 요동치게 할 만큼 강렬하다.
이 지점에서 고대 그리스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신은 흠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처럼 감정에 흔들리고 격정에 휘둘리는 존재였다. 차이가 있다면 불멸성과 힘의 크기 정도였을 뿐이다. 감정에 따라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신들의 모습이 왜인지 친숙하고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을 인간과 다르지 않게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은 인간 내면의 정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감정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문학, 신화,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초반부에 디오메데스가 아프로디테를 공격하며 엄포를 놓는 장면은, 『일리아스』에서 가장 놀라웠던 대목 중 하나였다. 유한한 인간이 불멸의 존재에 도전하는 이 상상력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정신적 강인함과 상징적 저항의 태도를 보여준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한계를 넘어 행동하게 만드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하나의 압축된 상징처럼 다가온다.
이 서사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단지 전쟁의 파괴력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권위에 맞서 싸우는 용기, 그리고 그 감정의 정당성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분노와 용기를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낸다. 감정을 절제해야 할 정념이 아닌 창조적 에너지로 바라본 고대 그리스의 시각이 분명히 드러난다. 감정을 억제하고 통제하도록 학습된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는 낯설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세계관이다.
우리는 흔히 분노, 질투, 욕망 같은 감정을 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이러한 정념들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그를 최고의 전사로 만든 원천이다. 감정은 통제해야 할 위험 요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때로는 신의 권위조차 뒤흔드는 근원적인 힘이다.
현대 사회는 이성과 논리를 우위에 두며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서사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 요소이며, 인간을 춤추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