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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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주의자’라는 단어에 드리운 이미지는 무엇일까? 유약함, 탁상공론, 이상주의자. 아마도 이 세 단어로 정리가 될 듯하다. 실제로 ‘반전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만큼이나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다. 이미 이 세계는 ‘반전’을 이야기할 때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비겁자’들은 어느 때보다 ‘용감한 자’가 되어 있다.

 

우리는 반전주의자들에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네가 하는 말이 옳은 줄은 알아. 하지만 그건 꿈이라구. 현실은 그렇지 않아.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야.’ 이 말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는 외침보다는 ‘전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겠어. 독재가 다 그런 거지.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자신의 견해를 발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은 종종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일종의 자기검열을 행한다.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좋은 전쟁’이었던 세계2차 대전에 폭격수로 직접 참전했던 하워드 진의 이 용감한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금세 불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워드 진이 알리려는 내용이 바로 그 ‘나름의 이유’다. 현대에 벌어진 대부분의 참극은, 그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 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참극을 굳이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참극을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했다는 주장의 실제 효력은 이미 끝난 그 전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쟁들에 미치는 것이다. ……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는 전쟁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켜 줬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전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일단 전쟁이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뒤로는 사고하는 것을 중지한 채 승리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고백대로, 자신이 3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 것과 파시즘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비겁하지 않은 우리가 한 번 답해보자.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시가 일으킨 전쟁도, 하다못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마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절대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한은 그 ‘나름의 이유’로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나름의 이유와 전쟁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군사 행동은 애초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워드 진은 연대와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연대와 불복종이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실례를 들어가며 역설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불복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와 방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하워드 진의 논리에 ‘현실’을 들이대는 것은 결국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는 오늘날의 누군가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태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성격은 그리 고민할 것도 없이 노골적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베블런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이야기하는 불복종의 논리는 무엇인가.

 

시민불복종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법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 법률을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법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실은 때때로 법률을 어김으로써만 공표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법률을 모든 상황에서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을 전능한 국가에 내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국가는 ‘자의적으로만’ 전능하다. 때문에 불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2가지 본질적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권리 행사를 위한 문제가 ‘생명이나 건강, 자유 같이 근본적인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는 ‘불만의 원인을 시정할 수 있는 법적 통로의 불충분함’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작년의 촛불시위야 말로 최근의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직접행동’일 수 있겠는데, 한국 사회는 직접행동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특이한 것 같다. 촛불시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생각 없이’ 혹은 ‘남이 하니까 나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소리를 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왜 나왔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은 논리로 ‘남이 하니까 나는’ 싫었던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었거나.

 

  우리 시대는 죄악을 대량생산하는 데 점점 더 엄청나게 복잡한 분업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뒤이어지는 참사를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 그 기계에 렌치를 던져 작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극적으로 책임이 있다. …… 사회라 불리는 이 왜곡된 자연(자연은 각 종에게 저마다 특수한 필요물을 갖춰준다) 속에서는 간섭 능력이 큰 사람일수록 간섭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필요성은 가장 많이 느끼지만 렌치를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당면한(또는 내일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만 한다(왜 반란이 드문 현상인가는 이로써 설명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빈손보다 뭔가를 약간 더 갖고 있으며 기계를 멈추는데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 사회적 궁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유한 역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자, 이제 가장 민감한 문제인 ‘폭력’이 남아있다. 시민불복종과 폭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사실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하는 말은 모두 부정확한 말이다. ‘그것이 사용되는 정치적, 이념적, 수사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칼과 그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칼이 모두 같은 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또 공권력이라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도 아니고, 무조건 ‘정당한 폭력’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할 때, 소렐의 폭력혁명을 옹호할 수만도 없다. 에이프릴 카터의 말을 들어보자.

 

정치적 가능성과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근거로만 계산한다면 원칙적으로 폭력적, 비폭력적 방식 모두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폭력 또는 비폭력을, 항의운동가 자신과 사회 전체의,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신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행동을 위한 전술적 사고는 이러한 반응과 신념을 고려해야만 한다.

 

사실 폭력의 사용은 그 효용성(?)에 비해 많은 불리함을 떠안고 있다. 카터의 지적대로 대중의 폭력투쟁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부분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로 하여금 자유를 제한하도록 유도하기 쉽고 저항자와 사회전체에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계층, 계급 및 성별 간의 연대도 어렵게 만든다(폭력시위에서 소외되고 마는 여성을 생각해 보았는가? 투쟁을 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도 집단 내에서 ‘안전’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외치며 주장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 그리 현명한 전략적 선택이 아님은 분명하다. 힘 대 힘으로 맞붙는 논리는 ‘힘의 논리’를 비난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면서, 보수유한계급들을 향해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깨끗해야만’ 한다. 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하워드 진은 스페인 내전에 자신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즉 그는 모든 폭력과 전쟁을 뭉뚱그려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너와 나'의 싸움으로 생긴 것이 아니건만, 전쟁옹호론자들은 반전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항상 '너와 나'의 미시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려고 한다. 즉 반전주의자, 비폭력주의자에게 '그럼 내가 너 때릴 거니까 너 가만히 있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는 거다. 그러나 정작 전쟁옹호 자체 논리는 너무나도 거시적이다. 그러니 이건 분명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워드 진이 전쟁과 관련하여 기고했거나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재향군인의 날이 이 따위로 전쟁 찬미의 구실이 되서는 안된다고 실명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그 날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는 전쟁 희생자와 참전 군인들을 양산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맹세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왔다.

 

나로서는 주요한 주장들을 모두 널리 읽고 주의 깊게 경청하긴 했지만, 냉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논평가 행세를 하지는 않겠다.

 

이 책의 미덕은, 하워드 진이 역사학자라는 것에 있다. 폭력과 전쟁은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당위적인 외침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이용하여 전쟁과 폭력의 '맥락'을 훑어간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그 침략이, 공습이, 폭격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무조건 '국가'를 사랑해야하는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애국심은 불한당의 마지막 도피처이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유명한 말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던져야 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벙커에 들어가는 대통령을 보라). 저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지, 왜 위기감을 고조시키려 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희생자가 되기 싫다면.

 

꽤 전에 사놓았던 '폭격의 역사'와 '공습', '국가와 희생'을 함께 읽어봐야겠다. 조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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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 경제 위기의 시대에 경제학이 갖는 의미와 무의미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오승훈 옮김 / 부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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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라는 문구는 클린턴의 선거 운동 본부에 걸려있던 유명한 선전 문구다. 공화당의 경제정책 실패가 큰 빌미가 되어 클린턴은 당선이 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었던 부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지난 대선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좌파정권 청산’, ‘잃어버린 10년’ 따위의 말은,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과 개그)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곁가지에 불과했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도덕성이니 경력이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말 그대로 ‘닥치고 경제’였다(좌파야말로 경제 쪽에 무능력하다는 이미지 또한 ‘닥치고 경제’를 잘 증명해주는 것이다). 경제만 살려준다면야 국밥을 말아먹든 비빔밥을 비벼먹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쪽도 마찬가지. 전 정권의 정책이 어떠했는가를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저 녀석들이 경제를 말아먹었다’라고만 외치면 될 일이었다. 결국 ‘경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경제는, 살아났는가?(‘경제’라는 아이는 항상 죽어가고 있었다. 기억하시는가? 15년 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죽어가는 ‘경제’를 붙들고 살아나라고 울부짖었다)

 

폴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마법의 경제가 왜 사라져버렸는지, 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고 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이 무책임해 보이는 해답에 독자는 당황할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그것이야 말로 제일 ‘덜 위험한’ 답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미국 경제사를 훑어가며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거칠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으리라. ‘경제학과 교수는 고민하고, 정책 기획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폴 크루그먼은 이 고민하지 않는 정책 기획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인데, 폴 크루그먼이 보기에 이들의 학문적 대립은 실제 정부의 경제 정책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일부분 경제학 부문의 학문적 성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하겠지만, 정책 기획가는 경제학 일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저자가 정책 기획가의 의견에 반박할 때, 고도의 수학적 계산이나 어려운 이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저 경제학의 매우 기본적인 개념만 사용하면 된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경제상식’이 모두 오해나 오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단히 증명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세가 미국이 겪는 경제난의 근원이라거나(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조세감면을 외친다), 국가경쟁력(아,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인가)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일견 자유주의자로 보이는 크루그먼은 통화주의자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그 비판은 이 책 117페이지의 각주 5번만으로도 해결이 된다.

 

폴 크레이그 로버츠와 같은 공급 중시론자들의 글에는 묘한 모순점이 있다. 그들은 통화 확대 정책이 경기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으면서도 경기 후퇴는 통화 긴축 때문이라고 거리낌 없이 비난한다.

 

문제는 경제학 교수들의 논쟁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위선죄’이다.

 

요약컨데,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가장 나쁜 죄는 위선죄이다. 그들은 성장을 목표로 내걸고, 성장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떠벌렸지만 사실상 그에 따른 모든 정책은 최소한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바로 정치였다. "It's not the economy but the politics, stupid!"

 

보수주의자들은 소득 이동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기회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의 역사적 이미지, 즉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늘 진실이었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밝혀 놓고 보면, 소득 이동에 대한 사실은 확대되는 불공평이란 거대한 그림에 거의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거대 담론을 좋아하는 그들이, ‘거대한 그림’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데도 특수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왜일까? 정답은 뻔하다. 해답이 없으면서도 해답이 있다고 주장을 할 때 생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표’다.

 

전쟁으로서의 국가 경쟁력이란 신화에 토대를 둔 경제적 수사법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진다. 목표를 국가 안보에 둠으로써 증세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삭감 등 고통스러운 정책을 유권자들이 지지하도록 동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현실의 정치적 성공은 대중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이익에 무작정 호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익을 재정립하고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조절할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서 얻어진다. …… 바꿔 말하자면, 정치란 넓은 의미에서 이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상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폴 크루그먼이 생각하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경제정책에 경제는 없고 정치만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 다만 ‘정부가 국가의 문제 해결(solve)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줄일(diminish)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늘리고, 가용 수단을 최대한 동원하여 빈곤층을 도우면서, 가능한 한 많은 정책 현안에 대해 똑바로 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밖에도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의 허상이 실재하지 않는 ‘전쟁’을 현실로 불러낸다고 경고한다. 또 생각 없는 민영화가 얼마나 큰 파탄을 불러일으키는지 ‘경제학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선 정말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 정부는 ‘열정은 있지만 관심의 부족으로 지금까지의 결과에서 배운 것이 거의 없는 셈’이다(정부는 항상 ‘선진국’을 열창하지만, 정작 선진국이 몸소 보여준 실패사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었던 부분은 QWERTY 이론이 어떻게 국가경쟁력 강화로 왜곡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 부분과, ‘근사 합리적’이라는 개념이었다. ‘근사 합리적’이란 말이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는 합리적 기대학파가 가정하는 ‘인간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합리적 기대학파는 정부의 적자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불황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착각에서 (제대로 된 정보에 의해) 곧 벋어나는 순간 불황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적자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가령 평범한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은연중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보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앞으로 5년 동안 사회 기반 시설에 150억 달러를 투자할 모양이야. 대통령이 말은 안하지만, 자금을 조달하려면 세금을 올릴 수밖에 더 있겠어. 그러니 이제부턴 우리도 월간 예산을 12.36달러 줄여야 돼.”

왜 이 이야기가 우스울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 평범한 가족이 어리석거나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탁월한 보수주의 경제학자라고 해도 가족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점은 이와 같은 노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대충 눈대중으로 얼마를 소비할 것인지 결정하였다면, 정부 지출의 미래적 의미까지를 감안하여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측을 함으로써 대강의 눈대중 셈법을 개선하려고 애써 보아야 그 가족의 결정은 거의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각 가정은 대강의 눈대중만으로도 완전한 합리성을 가진 것만큼이나 잘 해낸다-오히려 완전한 합리성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할 정도이다. 바로 여기서 애컬로프의 위대한 통찰력이 등장한다. 즉 “근사 합리적인” 행동과 완전히 합리적인 행동은 정책에 관한 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경기 침체는 사람들이 감지는 하면서도 완전히 합리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웃긴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꼭 현실 경제와 결부 짓지 않더라도, 일종의 지성사라고 할 수 있을 이 책은 하나의 지적 유희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현실을 떠날 수는 없는 법. 몇 가지 의문점은 남아있다. 그 중에 세 가지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의 주장대로 국가경쟁력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리고 미국경제에 있어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이 주도하는 FTA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그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전쟁들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국내 정세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인가? 둘째, 미국이야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수만으로 힘든 또는 힘든 상황에 들어가 버린 국가들은 저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미 경제의 파탄이 무역국 간의 생산성 차이 혹은 국가경쟁력 차이와 전혀 무관한가? 그렇다면 남미 경제 파탄의 주범은 내수시장인가? 셋째, 생산성의 규정은 어떻게 하는가? 실업률과 생산성의 관계는? 그리고 무균질의 실험실이 아닌 오늘의 현실에서 실업률과 경제성장률의 상관성(아서 오쿤의 법칙)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기계화되는 공장, 고용인원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 서비스업종을 생각해보라)

 

이런 의문점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정치인들이 경제가 문제(point)라고 외치는 반대편에 서서, 정치가 문제(problem)라고 외치는 경제학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 깊다. 그가 말하는 대로, 현실은 아수라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포기-상아탑으로 철수하든가 정책 기획가로 나서든가-를 종용한다. 무엇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매번 이기는데, 정책에 대한 복잡다기한 생각이나 또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가지 답변은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란 사실이다. 훌륭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과에 불평할 권리도 없다.

그러나 훌륭한 생각이 편리한 허튼 생각에 패배하는 일은 앞으로도 흔할 것이다. 그 같은 일이 벌어져도 모든 진지한 경제학자들은 올바른 사고가 결국은 이길 것이라는 신념을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책 기획가들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는 달리, 경제학에 관한 훌륭한 생각은 누적된다. ……

적어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지만, 훌륭한 사상은 영원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350페이지 정도되는 책이지만 글씨가 꽤나 빡빡해서 처음 펼칠 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학에 완전 백지인 나조차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특히나 퀴즈를 하듯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바로 제시한 후, 증명을 하는 방식으로 서술이 되어 있어 그리 지치지 않고 읽을 수가 있다. 폴 크루그먼의 다른 저작과 장준하의 저작, 그리고 스티글리츠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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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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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린 '계급'이란 말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레드 바이러스'인건가?

하긴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하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국은 열심히 일을 하면 누구나 정상에 설 수 있는 계급 없는 사회라고 믿었다. 그런데 계급 없는 사회에 정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등한 사회, 모두가 평등한 '자유 경쟁'의 이미지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유포되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 영문학자인데, 그는 이 책에서 '계급'에 주목한다.

(나의 선입관인지는 모르겠는데, 많은 페미니스트들 또한 '계급'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진보영역에서도 이제 성이나 인종에 비해 계급은 산뜻하지 않은 주제이다. 계급이란 말을 하면 왠지 먼지가 날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한다.

벨 훅스는 계급이 없다는 인식을 유포시키는 광고나 대중문화를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사회문제가 성이나 인종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핵심은 바로 계급인 것이다.

 

  언젠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데이비드 힐파이커처럼 강의를 그만두고 저술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말하자 이구동성으로 큰 실수하는 것이라고 겁을 줬다. 모두들 일 년에 2~3천 달러 수입으로 어떻게 먹고사냐고 걱정을 했다. 실제로 4인 이상의 가구도 그 정도 수입으로 생활한다고 했더니 "그건 다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바로 계급이 다르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원래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하고 (질 나쁜 옷, 공산품과 음식처럼) 수준 낮은 생활환경을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 반면, 부자들은 더 많이 가져야 하며 갖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도록 사회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상층계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말살시켜야하는 것일까? 불타는 용산처럼?

 

가난한 이들을 은밀하게 공격해 말살시킨다면 부자들의 세계가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더 강력한 도난 경보기를 달고, 더 많은 감옥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이 잡혀온 것처럼 사는 포로수용소 같은 거주 단지를 구축하는 조치는 포위 같고, 충돌 같고, 전쟁 같은 일상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다. 벨 훅스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단순한 삶', 나눔과 연대는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잘 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위해서는 이 책의 원제처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명확하게 인지해야만 한다.

그 명확함은 '단순함'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의 가난은 성의 문제와 인종의 문제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성은 그렇다치고 인종은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다문화 가정이 이미 소수가 아니며, 게다가 대한민국엔 사회적 인종이 이미 등장하고 있다.

강남인, 강북인, 지방인, SKY출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강남인은 강남인이 된다. 마치 흑인의 아이가 흑인인 것처럼.

 

벨 훅스는, 계급 문제를 거론할 때 성이나 인종을 부각시키고, 인종의 문제를 거론할 때 다시 계급의 이야기를 꺼내는 기만을 직시한다.

지배계급이 필요에 따라 갈등요소를 자의적으로 부각시켜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백인이 백인에게 강도나 폭행을 당할 확률이 더 높다고 아무리 말해도 백인은 주택 문제에 대해서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인종 문제를 두려움의 원인으로 설명한다.

 

  계급 문제가 거의 혹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미국에서 부동산과 주택 분야의 인종차별이 거론될 때마다 백인들이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이라고 하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내가 아는 백인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친구들조차 부동산 문제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사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 주민들이 백인 우월주의의 침투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집값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미국만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전략'은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실질적으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만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현대사회에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로?

혹자는 그럴 것이다. 설사 계급이 존재한다하더라도 계급이동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아. 그래. '자유경쟁'의 시대였지.

누구는 100만원짜리 과외를 받아가며 학습하고, 누구는 경제생활에 힘든 부모를 두어 혼자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있을 뿐이고.

그런데 이것도, 그 아이들의 능력 때문인건가?

(실제로 아이들이 학습성취도와 부모의 소득이 상관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심각한 연구 결과들이 널려있다.)

나도 '다양한 계급을 넘나드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먼지가 좀 날리더라도 다시 '계급'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 계급은 성이나 인종의 문제를 배제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실타래처럼, 아니 오늘 날엔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드리워있는 계급을 인지하고, 과연 내가 어디 서있는가를 생각해야할 때다.

그러니 지금은, '계급에 대해 말'해야만 할 때다.

 

22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고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중간 부분엔 너무 뻔한 소리를 반복하고 있어서 흥미가 좀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눔, 단순한 삶... 이런 것들이 옳기는 하지만, 나는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의 문제'가 개인적 행동으로만 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개인행동의 방향이 좀 더 정치적인 방향, 정책적인 방향을 지향해야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도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강한 주장에 비해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가 부족하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이야기하는 계급 이야기가 신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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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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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전공한 세 명의 여성이 쓴 조선시대 14명의 여성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사실 이런 류의 책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를 안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여성은 이옥봉.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          天入雁愁長

 

  번역하기 어려운 시란 이런 시일 것이다. 어려운 글자도 없건만, 번역을 해놓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비문이거나 반쪽이 된다. 워낙 교묘하게 말을 놓았다. 강이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이 기러기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이 강과 하늘에 들어와 담기는 것을 수도 있는 문법구조이다. 그래서 넓고 먼 것이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강과 하늘일 수도 있게 만들어놓았다. 넓고 먼 강과 하늘은 철새인 갈매기나 기러기와 사슬처럼 얽히며 더욱더 넓고 멀어진다. 동시에 물에 젖은 꿈도, 하늘에 번진 슬픔도 아득히 넓고 멀어진다. 가을 하늘에 깔리는 깃털 구름처럼 여러 겹의 정서적 결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며 잔잔히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법구조 속에 짜 넣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시적인 애매성으로 기막히게 살려낸 경우이다. 가를 모를 쓸쓸함과 맑고 유장한 호흡이 이런 의도적 모호성과 다의성 속에 녹아 있다. 이런 시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말 밖에 무한한 정취가 있다고 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낼 문재가 있었던 여성은, 그러나 조선의 여성이었다. 하긴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테지만.

저자는 이옥봉의 도도함 속에서 컴플렉스를 발견해낸다. 아니, 직접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옥봉은 그(정실의 아들 조희철)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도 놀래키고, 내 시는 귀신도 울린다고, 그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나란히 부각시킨다. '귀신도 울린다'는 것이 애당초 이태백의 시를 지칭하는 말이니, 그녀 자신, 이태백에 필적하는 시인이라는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소실이지만 예술적 재능으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 도도한 선언에서는 역설적으로 옥봉의 신분적 컴플렉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교유한 인물들과 조원(남편)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옥봉은 조원과 나이 차가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세대로는 조희철의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명예가 모두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적자를 향해 '모자'라고 내세우는 그녀의 힘겨운 자존심이 안타깝다. 소실을 자처해 예술가로서 삶을 선택했던 그녀의 자의식에 놓인 분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밖에 열녀의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풍양 조씨의 '자긔록'이나, 현실과 욕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김삼의당의 경우도 매우 흥미롭다.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한듯 싶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의식은 언제나 진지하고, 보통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법.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타인들의 동감을 얻어내기에도 쉬운 방법인 셈이다.

 

책 표지를 검은색으로 하는 것은 종종 도박일 때가 많다. 그만큼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그런 의미에서 표지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쉬운 것은 제목. 내용에 비해 다른 그런저런 책들과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섹시한 제목을 뽑으려 노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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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 히스토리아 001
곽차섭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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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루벤스가 그렸다는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이탈리아 알비의 꼬레아 씨들.

그리고 최초로 유럽에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오란 조선 청년.

이 세 가지 흥미로운 사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보려는 역사가의 시도가 돋보이는 책.

 

  안토니오와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알비의 코레아 씨들 간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나는 탐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단편적인 자료들을 실마리 삼아 한 장면 한 장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작업은 정말 흥미진진하였다. 통상적인 역사의 분야를 넘어서, 때로는 미술사로 때로는 복식사로 경계를 넘나들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수정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면서 설득력 있는 나름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하였다. …(중략)… 나는 이 작업의 전 과정을 통하여,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사용하되 때로는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에도 주목하였다. 역사적 상상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나름의 진실'을 찾기 위해 꽤나 꼼꼼히 그리고 처음부터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 나타나는 복식을 살펴보는 부분도,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으로 보인다.

이럴 때야말로 '기존 연구'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용이 빛을 발하는 법. 이것이 바로 '학문'이 아닐까?

 

저자가 꽤나 조심조심하기 때문에(나는 이 태도를 긍정적으로 본다), 결국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이 확연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결과들에서 보여진 크나큰 헛점과 신화들이 이 책에 의해 한꺼풀 벗겨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특히 '민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분명 확인할 수 있는 사실조차 당위적인 것으로 '왜곡'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이 책의 핵심.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비록 안토니오 코레아와 루벤스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오히려 현대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현대에서 '만들어지는' 과거들. 무엇을 목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는가 하는 것.

 

이 책을 쓴 곽차섭 교수는 서양사 전공자다. 사실 서양사 전공자들 중에 '저작'을 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번역을 하거나, 메타비평 성격을 가진 글을 많이 쓰고는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서의 서양사 전공자'가 가지는 슬픈 한계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를 바라보는 서양사 전공자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생각한다면, 저작물이 드문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그 동안 문화사 관련 글을 꾸준히 번역하고 또 써왔던 저자가, 이렇게 분량이 적은 책이라도 출간했던 것은 환영할 일이다.

최근에 다른 서양사 전공자가 쓴 '대항해시대'라는 책도 나왔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히스토리아'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후 이 시리즈의 책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장에서의 성과가 어떠한가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혹은 이 출판 기획에 맞는 좋은 저자의 좋은 글이 없었을 수도...

시리즈로 나오면 사서 조로록 꽂아놓으면 이쁘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아쉽다. (응? 역시 나는 페티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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