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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 - 히스토리아 001
곽차섭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루벤스가 그렸다는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이탈리아 알비의 꼬레아 씨들.
그리고 최초로 유럽에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오란 조선 청년.
이 세 가지 흥미로운 사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보려는 역사가의 시도가 돋보이는 책.
안토니오와 '한복 입은 남자', 그리고 알비의 코레아 씨들 간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나는 탐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단편적인 자료들을 실마리 삼아 한 장면 한 장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작업은 정말 흥미진진하였다. 통상적인 역사의 분야를 넘어서, 때로는 미술사로 때로는 복식사로 경계를 넘나들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수정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면서 설득력 있는 나름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노력하였다. …(중략)… 나는 이 작업의 전 과정을 통하여,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사용하되 때로는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에도 주목하였다. 역사적 상상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나름의 진실'을 찾기 위해 꽤나 꼼꼼히 그리고 처음부터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 나타나는 복식을 살펴보는 부분도,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으로 보인다.
이럴 때야말로 '기존 연구'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용이 빛을 발하는 법. 이것이 바로 '학문'이 아닐까?
저자가 꽤나 조심조심하기 때문에(나는 이 태도를 긍정적으로 본다), 결국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이 확연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결과들에서 보여진 크나큰 헛점과 신화들이 이 책에 의해 한꺼풀 벗겨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특히 '민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분명 확인할 수 있는 사실조차 당위적인 것으로 '왜곡'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이 책의 핵심.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비록 안토니오 코레아와 루벤스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오히려 현대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현대에서 '만들어지는' 과거들. 무엇을 목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는가 하는 것.
이 책을 쓴 곽차섭 교수는 서양사 전공자다. 사실 서양사 전공자들 중에 '저작'을 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번역을 하거나, 메타비평 성격을 가진 글을 많이 쓰고는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서의 서양사 전공자'가 가지는 슬픈 한계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를 바라보는 서양사 전공자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생각한다면, 저작물이 드문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그 동안 문화사 관련 글을 꾸준히 번역하고 또 써왔던 저자가, 이렇게 분량이 적은 책이라도 출간했던 것은 환영할 일이다.
최근에 다른 서양사 전공자가 쓴 '대항해시대'라는 책도 나왔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출판사에서 기획한 '히스토리아'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후 이 시리즈의 책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장에서의 성과가 어떠한가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혹은 이 출판 기획에 맞는 좋은 저자의 좋은 글이 없었을 수도...
시리즈로 나오면 사서 조로록 꽂아놓으면 이쁘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아쉽다. (응? 역시 나는 페티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