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1.




 “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던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라면, 지성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걸맞은 인격을 가지고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흥분하던 그 신입생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에 수긍했다. 하긴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단어들을 사전에서 뒤적거려 본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지성인 [知性人]

[명사]

1 지성을 지닌 사람.

지성인의 면모를 갖추다

대학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에티켓쯤 지니란다.≪이청준, 조율사≫

2 <철학>=호모 사피엔스.




지식인 [知識人]

[명사]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전문가가 좀처럼 지식인으로 발전하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전문가의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한 특징이라고 그는 말한다.≪이청준, 조율사≫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법정, 무소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건대, 지성인과 지식인의 개념 사이에는 그처럼 심오한 간극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그 간극을 쉽사리 인정했던 것은 그가 순진무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아직 ‘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지성인과 지식인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지식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쿡쿡 찔러볼 뿐이다. 이 현상은 ‘지식인’의 개념 혹은 위상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이 ‘섹시’해야 책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에 속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 따위의 제목보다는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이 더 ‘섹시’하다(실제로 이 책/기획의 최초 제목은 ‘우리시대 지식인의 초상(肖像)’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식인의 죽음’ 앞에 ‘민주화 20년’이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민주화하면 생각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권력에 항거했던 ‘민중’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민중은 얼굴도 이름도 없다. 때문에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저항적 지식인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지 20년이 지나, 정작 그것을 앞장서서 추구했던 지식인들이 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리뷰는, 때문에 매우 근본적인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2.

  이 책에도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지식인 위기론’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로 답변을 시작했다’(71쪽). 그들(그러니까 경향신문사에서 지식인이라고 찾아갔던 이들)이 위기에 처했다고 평한 지식인상은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이었다. 인텔리겐치아는 러시아어 intelligentsia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원래 뜻은 말 그대로 ‘지식인’이다. 하지만 인텔리겐치아는 단순히 지식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사회에 비판적이고 혁명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인텔리겐치아라고 칭했던 것이다(두산백과사전 참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개념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뒤집어 생각하면 지식인의 삶 혹은 ‘살아있는 지식인’이 어떤 개념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접근하고 있는 지식인의 ‘생명’은 사회순응이 아니라 사회비판에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바로 ‘권력’이다. 목차만 찬찬히 뜯어봐도 그러하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책의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무리해서 요약하자면, 지식인과 권력, 이 두 단어를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든 간에,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대부분의 펜은 칼에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칼의 첨병이 되어, 칼이 묻힌 피를 닦아주거나 이제는 자리를 잡은 칼이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도록 잉크를 함부로 튀기고 다녔다. 그것은 어찌 보면 ‘펜’의 숙명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식인에 관련된 문제제기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렇다면 권력에게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수사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책임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죽은 이가 타살‘당했는가’ 아니면 자살‘했는가’하는 지점이다. 자살과 타살의 판단이 선 이후에야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유독 지식인의 죽음을 논할 때는 그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를 묻지 않는다. 지식인은 힘이 없으므로 타살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면 또 다른 영생이 열릴 경우, 우리는 자살을 의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권력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에 ‘굴복’하거나 ‘종속’된 지식인이 권력을 ‘잃었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인임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지식인계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를 대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한 다른 ‘노동’과 동급으로 놓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교수님’이며 ‘박사님’이고 ‘선생님’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배운 자가 아니면 권력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경제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간에. 권력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을 유지/세습하기 위해 간판으로 걸 학위를 받아내고 자식을 유학보내고. 이런 현상이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인가? 천만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인’을 추구할 뿐이다.




#3.

  지식인은 죽지 않았다. 지식인의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들은 더욱 강성하게 살아있다. ‘잡초와 같은 생명력’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 맞다. 흔히들 잡초를 민중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먹물들의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제일 빨리 감지하고는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시작하고는 했다. 변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지식인들의 능력은 더 힘을 발휘하고, 그들의 ‘세습’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도 지식인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지식인들을 만족시켜줄 그 무엇이 약해진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그것. 존경심. 그렇다. 이제 그 누구도 지식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이상적 지식인’(그러니까 저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바라보았던 ‘지성인’)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데도 지식인들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 없는 지식인의 생사를 논하고 있을 수밖에. 그러므로 이처럼 웃긴 기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니. 마치 자신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이 기획은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물들이 더 ‘쿨’해질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지식인들은 굳이 ‘존경’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질 것만 같다. 그것만이 지식인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엔, 되돌아올 답변이 너무나도 차갑고도 단순명료하다.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그러니 한 때 ‘쿨가이’였던 푸코의 말도 이제 우리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두 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지식인들이 공식화해 왔던 모든 예측과 전망, 지령, 그리고 프로그램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그 혹은 그녀 자신의 영역에서 분석을 수행하면서,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행위와 사고의 방식 및 습성을 흔들어 놓으며, 상투적인 믿음을 일소하고, 규칙과 제도들을 새롭게 파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행할 것을 요구받는 곳에서, 정치적 의지의 형성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푸코 · 둣치오 뜨롬바도리, 『푸코의 맑스』,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04, 26쪽. )




  그렇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권력에 소탈한 도인들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존경을 바라지 않지만 그들 또한 지식인이고 싶어 한다. 아니 지식인이라는 애매한 칭호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지식인도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라는 고병권의 지적(219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촌철살인인 셈이다.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우리를 먹여살려주지는 않으니 이제 지식을 ‘파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일까? 어차피 먹물들의 자아비판인만큼,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보자. 그래,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니 지식을 파는 행위를 무슨 버러지 보듯이 하지는 말자.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이제 ‘존경’따위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 허영에 넘치는 것도 얘기하지 말자(아직까지 존경에 미련을 둔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존경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 달라.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어떤 물건을 팔았는데 그것이 만든 이가 광고한 것만큼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소비자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 품질만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배상을 해줘야 한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배상/보상을 하지 않을 자유를 외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상도(商道)를 지키지 않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지식인이다. 대운하가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의 권위에 기대어 주장하다가 순식간에 말을 바꾼다면, 자신이 앞서 기댔던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민영화해야한다고 강력 주장하는 교수라면, 자신이 속해있는 ‘국립대’부터 민영화하고 ‘고객’인 학생 앞에서 머리 숙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 먹물들은 자신들이 시장논리와는 상관이 없는 ‘선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네이버 지식in에서 한 네티즌이 잘못된 답변을 내놓았다고 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의 답변은 ‘무료’였으니까. 하지만 대학 교수는 무보수 명예직종이 아니다. 하다못해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라도 그에게 지불되는 출연료의 일부에는 시청자가 납부하는 시청료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 지식인들은, 그들이 결코 속한 적이 없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쿨한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생계를 보장 받는 사람이라면, 지식인이 아닌 척 쿨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변명대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면, 그의 생계는 보장될 필요가 없다. 너무 먹고 사는 문제, 돈이 오고 가는 문제로만 ‘지식인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고? 앞서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고상한 지식인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달라고.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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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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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파란츠 파농이 그의 나이 27살에 쓴 저작. 프란츠 파농의 첫 저서이기도 하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알제리 혁명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한국에선 이 책이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사실 문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라기 보다는 정신병리학에 관한 임상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피부색', 즉 인종이 인간에게 어떠한 병리적 상흔을 남기는지 관찰하고 있다.

 

  백인에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말이다. 흑인에게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사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말이다.

 

물론 그는 흑인이기에 흑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을 부정하는 흑인을 보라.

그리고 오륀지라고 혀를 굴려야만 하는, 오륀지를 위해 아이의 혀를 찢기까지 하는 한국인을 보라.

 

  자의적이면서 보편적인 흑인 신화의 노예인 교육받은 엘리트 흑인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종족이 자신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흑인들의 끊임 없는 자기부정은 바로 백인들의 끊임 없는 타자화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이제 그것이 '병'인지도 알지 못한다.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 된다.

 

  그가 말라가시인인 이유는 백인의 출현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한 특정단계에서 그가 그 자신에게 진정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자문해야만 하는 이유도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실체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려있다.

 

  아, 이 부끄러움, 수치, 지기 경멸, 그리고 오역질.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파농은 6, 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나도 '흑인에게 강간 당하고 싶어하는 백인 여성'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그런 비난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인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카페시아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가지고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파농과는 별개로 식민주의에 관한 논의를 할 때, 항상 '강간'이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환상' 혹은 '공포'다.

 

유태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조 및 후손과의 관계에서 그들 인종의 종교적 정체성이 가학당한 것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을 가학할 때, 가학자들은 주로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거세한다. 박해받는 한 유태인, 그는 박해받는 한 개인이 아니라 박해받는 한 인종인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 박해를 당하는 곳은 그의 신체이다. 흑인 자신의 구체적 인성의 상징으로서 신체가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흑인들의 성기는 거대하고, 그들의 성적 능력은 뛰어나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백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백인 여성들을 흑인 남성들이 강간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반대로 백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마구 뒤엉켜 갈팡질팡 한다(바로 이 부분이 논쟁적인 부분이다).

 

첫 저작인만큼 표현이 좀 장황하고 굉장히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의 논지는 매우 명확하다.

 

  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마도 파농은 자신의 임상관찰 결과, 흑인들의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은 단순한 의료적 치료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런 병들을 생산해내는 환경, 즉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뒤집지 않고서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을테니까.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 또한 그가 아직 '현장'에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도 '인간사랑' 출판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아마 푸코의 '광기의 역사'였던듯), 이 출판사, 좀 특이하다.

어째 역자의 약력이 전혀 나와있지 않고, 역주는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건지;;

이 책을 역주 없이 읽으려면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마르티니크라 하면 대체 몇 명이나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 건지 알겠는가?;

그리고 '피진'이니 '크레올'이니 하는 것들이 괄호에 묶인 원어조차 명시되지 않고 마구 쓰인다면, 과연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번역상으로는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지만(분명 번역이 쉬운 책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역주 없는 번역은 여전히 성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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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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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에 이런 책을 읽으면 잡혀갈라나. ㅎㅎ 2009년도에 농담이라지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여튼, '공산당 선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총 3부로 나눠져있는데, 1부는 아마도 황광우씨의 글인듯.

1부에선 공산당 선언의 일부를 발췌해가면서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에세이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대중적인 면을 고려할 때 이 전략은 꽤나 괜찮은 선택 같은데 문제는 내용.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이 너무 많은데다 교조적인 냄새까지 풍겨서 읽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글도 있다.

차라리 1부 2장과 같이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놓기만 했어도 그와 나 사이의 세대차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을텐데.

'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정작 그의 글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활동 중 그가 받았던 상처를들을 무시하자는 얘긴 아니지만.)

 

273페이지에 가서야 핵심 텍스트인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다. 2009년에 읽는 공산당 선언이 이렇게 현실적일 줄 누가 알았으랴.

 

반대만하면 좌빨이니 배후세력이니 외치는 저들을 보라.

 

  반정부당치고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들의 적들로부터 공산주의라고 비난받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또 반정부당치고 자기보다 더 진보적인 당이나 혹은 반동적인 적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되돌려보내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리고 '자유무역'이란 미명으로 불평등 무역을 강요하는 저들도 보라.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자신들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난관을 타계하는 방법으로 전쟁과 착취를 택하는 저들의 전술.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확대하면서 기존의 시장을 보다 더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한다.

 

비정규직, 최저임금에 관련된 개악도 예외는 아니다.

 

기계가 여러 노동 간의 차이를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리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대오 내부의 이해관계와 생활상태는 더욱더 균일해진다.

 

뒷부분의 해제(아마도 장석준 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와 함께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좌빨, 좌빨 하기 전에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 자들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뭐... 기대도 안한다만. -_-)

 

당시 전략적 선동 팜플렛으로 제작되었을 이 선언은 2009년의 한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선언문이다.

그래서 기쁘냐고? 천만에. 정말, 뼈저리게 아프다.

단결한 저들을 보라. 그러니 우리도 단결해야만 한다.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지배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노예들에게 노예적 생활조차 보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브루주아지가 노예들로부터 부양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노예들을 부양해 주어야 할 만큼 그들을 비참한 처지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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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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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에서 출간되고 있는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공산당 선언의 원문과 함께 등장배경, 공산당 선언의 여파/유산이 서술되어 있다.

'선언'은 이미 '레즈를 위하여'에서 많이 인용했으므로 한 구절만 인용해본다.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다.……

  힘들게 일해 혼자 힘으로 얻은 스스로 번 소유라니! 부르주아적 소유 이전에 있었던 소규모 장인의 소유나 소농민의 소유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 소유라면 폐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산업의 발전으로 이미 상당 부분 폐지되었고 또 지금도 나날이 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언'으로 시작된 공산주의는 이후 여러가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하거나 왜곡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이 스탈린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왜곡이 아니라면 변화나 차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로 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공동체 개념이 '함께 존재함'에 가까운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겨났다. 모든 인간을 생산자(프롤레타리아트)로 환원하는 대신에 각자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다차원적인 사회로. 이 새로운 공동체 개념이야 말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는 '선언'의 꿈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길고도 험난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선언'으로 되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지적대로 '현실적 운동'임을 강조하는 '선언'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일단 가보아야 한다"는 식의 회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수수께끼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라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책의 말미에는 고병권의 짧은 해제가 들어있는데, 이 해제의 한 구절이 오늘날 '선언'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 같다.

좀 길 수도 있지만 인용해본다.

 

'선언'은 위험한 책이다. 하지만 이때 '위험하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협하다'는 말과 혼동되어선 안된다. '선언'의 유명한 문장,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가 위협하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선언'의 위험성은 오히려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위협하다'는 것과 '위험하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위협하는 자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사용할 때조차 거래를 원한다.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말하는 제국의 지도자도, 직장을 폐쇄하겠다는 사장도, 총파업으로 위협하는 노조도,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교사도 원하는 것은 거래이다. 위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들은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폭력은 여전히 거래의 메시지이다. 일정한 개량이 이루어지면 그만하겠다는 메시지. 따라서 이들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득권이 강화되고 법이 강화될 뿐이다. 부시를 보라. 위협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세계 속의 이권이지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자는 세계의 이권에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이다. 폭력은 그에게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 위험한 자는 결코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폭력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저들이 비난할 때 애용하는 '국가위기'라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전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어떻게 가지고 있지도 않는 것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보수'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극명하게 충돌했던 용산에서의 '폭력'을 보라. 한 쪽은 위협을 하며 생존권에 대한 '거래'를 원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거래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하다'.

 

종이질을 조금 낮추고 가격을 조금 더 내린 문고판 형식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선언'을 부담 없이 읽어보기에는 괜찮은 선택 같다. 유강은 씨의 번역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꽤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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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무일푼으로 시작하셨던 부모님의 상황상 여유 있는 가정도 아니었다. 때문에 외식이란 것은 정말 연례행사였다. 성적표가 나오거나 기타 특별한 일이 있어 외식을 하게 되어 갔던 곳 중에 ‘맘모스’라는 경양식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을 처음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양식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식당은 재래시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허름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가면 넓직한 공간 가운데에 분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하얀 천이 덮인 테이블이 20개 정도 놓여있었다. 샹들리에나 테이블이나 의자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촌스러웠고 분수 또한 제대로 물을 뿜어내는 날이 드물었던 그곳은, 내겐 가슴 설레는 곳이었고 한 편으로는 긴장되는 곳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본 적이 없던 내 머릿속에는, 돈까스를 주문한 뒤 나오는 스프를 받아들던 순간까지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만이 떠돌고 있었다. 외식장소로 숯불고기집이 낙찰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경양식 식당’만의 아우라가 내 주변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 사실 왼손잡이였던 나는 당연히 왼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돈까스를 썰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매너’를 지켜 오른손으로 힘들게 나이프를 사용했고, 스프를 먹을 때는 숟가락을 몸 쪽으로 쓸어 ‘불편하게’ 먹어야했다. 또 단무지보다 맛없던 마카로니를 입에 넣을 때에 그 맛과는 별개로 무언가 ‘불편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다. 이 모든 것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같이 갔던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먹는 법에 대해 간단히 가르쳐주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이 친절히 가르쳐준 대로 행동하는 착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맘모스’에만 들어가면 자발적으로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왼손에 나이프를 들게 되면 누가 그것을 보기라도 한 듯 부끄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렇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맘모스’의 추억을, 베블런은 100년도 더 전에 집요하게 분석했다.

 

즉 훌륭한 예절을 갖추는 데는 그만큼 많은 시간, 열성,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빼앗기는 사람들이라면 예절을 습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세련된 취미, 예절, 생활습관은 상류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용한 증거이다. 훌륭한 예절에 관한 지식은 상류층 사람들이 일반인들의 시선에 띄지 않게 숨긴 생활의 일부를 아무런 돈벌이도 안 되는 성과물들을 획득하기 위한 가치 있는 활동에 소비했다는 자명한 증거이다.

 

  계급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자의적 판단 하에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시절 그 식당을 처음 가는 이와 함께 했다면 나는 두려움을 의기양양함으로 가장했으리라. 그렇다면 나의 몸부림과 두려움, 의기양양함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그렇다. 바로 경제적 계급이다. 그리고 그 계급에 기반한 나의 감정들은, 까딱하면 노동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들의 아이들은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없음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노동에 대한 과시적인 불참은 우월한 금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관습적 표현이 되고 또 명성을 획득할 만하다는 관습적 지표가 되기에 이른다. 그와는 반대로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가난과 예속의 징표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금력과시경쟁은 생산이나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획일적으로 조장하는 한편으로 생산노동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수치심을 안겨준다. 초기 단계의 문화를 물려받은 고대의 전통 하에서는 그처럼 비천하게 평가되지 않았던 노동이 이제 불가피하게 가난을 증명하는 수치스러운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단순한 ‘가난함’을 넘어선 인간적인 차별을 내포한 것이었고,

 

우리의 사고습관에는 비천한 고용살이를 연상케 하는 직업들에 특별히 결부되는 의례적 불결함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직무를 관습적으로 요구받는 피고용인들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상류층 취향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이다.

 

“따라서 차별적 비교는 결국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과 다름없”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끼니를 굶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끼고 아끼던 부모님 덕에 부모님의 가난을 직접 겪지 않고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내 기억의 언저리에 작은 상처처럼 남아있는 ‘빈부차’는 어디에서 생겼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 무렵의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들은, 바로 옆집에 있던 비디오, 재믹스, 현미경, 피아노….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교육 수준이 높았던 옆집 아주머니의 말투, 옷차림. 그 ‘고상함’은, 아무도 종교생활을 하지 않던 우리 집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 모두가 아침 일찍 성당으로 가곤 했던 옆집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심지어 종교까지, 내게는 ‘소비재’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소비재는 우리 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왜?

 

다른 한편으로 오로지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의 구성원이나 계급들을 살펴보아도 생존이나 육체적 안락이라는 동기는 결코 그처럼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최저한도의 생존조건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탄생하여 인간의 제도로 성장했다. 지배적인 동기는 처음부터 부에 대한 시샘과 선망을 낳는 명예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후 발달한 어떤 단계의 문화에서도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만한 지배력을 발휘한 다른 동기는 결코 없었다.

 

  때문에 나의 ‘가난’은 분명 존재할 ‘절대적 가난’에 의해 상쇄되지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윤리’와 종교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 몇 년 전에, 베블런이 지적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즉 ‘차별적 비교’를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그리고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이 증명하듯이) 그 비교의 화살표는 항상 위로 향해있다.

 

그래서 사회적인 기준에 비추어 자기보다 월등한 계급이나 그 바로 아래 계급과 자기를 비교하는 계급은 거의 없는 반면, 바로 자기보다 바로 한 단계 위의 계급을 시샘하고 따라잡기 위해 경쟁하는 계급은 어디서나 같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강남에 아파트를 살 확률은 거의 없으면서도 강남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것에 대한 분노는 여전하다. 마치 자신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 가격이 올라 그러지 못했다는 냥.  이러한 분노는 개혁과 변혁을 위한 에너지로 치환되지 못한다. 자신들의 ‘생존수단’이 박탈됨으로 인해 거꾸로 보수화되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 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제로부터 ‘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베블런의 날카로운 인식은, 마르크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비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을 예고했지만 베블런은 보수화를 예견했던 것이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혁명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억제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간”으로 알려진 인간형이 정상적이고 결정적인 인간성의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라는 베블런의 예견은, 100년 후의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또 생산력이 극대화된 오늘날에도 극단의 현상들이 출현하는 이유를 ‘과시적 소비경쟁’을 통해 명확히 설명하고, 수요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혁명적인 인식 또한 굉장히 놀라운 측면이다(현대의 소비재를 보라. 베블런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명품.... 유행....).

 

개인적 장신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주요목적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것을 착용함(소유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물건의 심미적인 유용성은 그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크게 높아지지도 않고 보편적으로 향상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반화해보면, 어떤 물건이 우리의 미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 가치를 획득하려면 아름다워야 함과 동시에 비싸야 한다. …… 비싸다는 표시는 비싼 물건이 아름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

 

생산력 증가 덕분에 좀더 적은 노동으로도 생활수단들을 조달할 수 있게 된 사회의 생산담당자들은 생산속도를 좀더 늦추기 위한 방안보다는 과시적 소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데 정력을 쏟게 된다. 그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고 생산의 긴장도 완화되었지만, 그것이 과시적 소비경쟁을 줄이지도 못하고, 증산된 생산물들도 과시적 소비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전용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표현은 베블런의 의도가 단순히 냉소적 비판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한계급의 특징적인 태도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格率)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제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자연선택의 법칙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 그런 낡은 생활양식[반동]은 좀더 가까운 과거로부터 계승되고 공인된 낡은 생활양식보다도 당장 절박한 생활환경에 대한 적응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100년 전에 한 젊은 학자가 써내려간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이 보여주는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이 ‘고전’을 무비판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베블런이 말하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에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태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베블런은 개인이 추구하는 ‘경쟁’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배치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엔 ‘경쟁’이 공동체에도 기여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부분은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 아닌가?


  둘째, ‘금전거래가 일상화되고 기계화될수록 기업총수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고 ‘기업총수를 “영혼 없는” 주식회사로 대체하는 경향’, 그리고 ‘유한계급이 담당하는 중대한 기능인 소유(권)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베블런의 장기적 예측은 자본주의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예언인가, 아니면 자본이 지배하는 종말의 한 장면인가?


  셋째, 계급에 대한 정의. 부를 축적한 ‘유한계급’은, 그렇다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가? 유한계급은 세습되는가? 아니면 유전되는가?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유전’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이 책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는 것 같다. ‘격세유전’은 유전이 아니라 오히려 돌연변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경제적인 조건으로만 계급을 살펴보는 것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되지만, 그 계급이 형성된 배경이나 원인을 조명하기는 힘들다.


  넷째, 베블런이 말하는 ‘생산’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가? 그는 직접적으로 재화를 생산하는 행위만을 ‘생산’으로 보고 있다. 만약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산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다면, 베블런의 핵심개념인 ‘과시적 소비’, ‘대리 여가활동’ 또한 심각한 개념적 위기를 맞을 것이다. 만약 한 남자 배우가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생산은 아니더라도 ‘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소비나 여가라고 할 수 없는 행위다. 그리고 재화가 아닌 ‘자본’을 ‘생산’하는 행위는 또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인용 각주도 붙어 있지 않은 이 ‘문화비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등학문의 예속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말미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통찰’이 바로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고전이 2005년에야 제대로 번역이 되었고, 그나마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되어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또 다른 비극이다.

 

  솔직히 읽기가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400페이지의 책이 800페이지처럼 느껴지는, 오랜만의 체험을 했다. 어떤 부분은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이 책은 분명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요상한(?) 출판사에서 고전의 부분만을 발췌해서 책을 마구 찍어내고 있는 모양인데(이게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더라), 그런 식으로 고전을 읽는 것보다는 조금은 힘들더라도 전체를 읽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액기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타인이 만들어준 액기스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400페이지 내내 야지를 놓는 그 매력을 더 좋은 번역이 뒷받침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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