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The Perfect Jazz Collection : 25 Original Recordings [25CD 박스세트] - Colombia/RCA 재즈앨범 재즈 명반 박스세트 3
빌리 홀리데이 (Billy Holiday) 노래, 데이브 브루벡 쿼텟 (Dave Brube / Sony(수입)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구성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고..  

이런 박스셋을 사면 구성보다는 박스셋의 질이 어떠한 가가 적지 않게 문제가 됩니다. 

앞서 재즈트레인 박스셋도 구입을 했습니다만, 적어도 박스셋의 상태만 보면 이 박스셋이 압승이네요. 물론 재즈트레인엔 더 두꺼운 책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앨범 자켓의 상태는 이 박스셋이 더 양호합니다. 게다가 박스셋에서 원하는 앨범을 찾아 듣기에도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이드 라벨이 찍혀있고, 뒷면엔 LP 미니어쳐답게 완전 축소로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비닐 슬리브가 없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비닐 슬리브가 더 지저분하고 좋지 않더군요;; 

 어쨌거나 가격대비 만족할만한 제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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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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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을 읽다가 저자가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있었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각주를 보니 마침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이라,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음. 니시카와 나가오가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6시 45분발 전차로 빠리를 향한 귀로에 올랐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남구계(南歐系) · 중남미계 · 아프리카계로 짐작되는 노동자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내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인도나 파키스탄 쪽 사람 같았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위엄이 있었으나 몸차림은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고, 피로로 충혈된 눈이 나날의 고뇌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일찍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 밑바닥 노동에 시달렸던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보다 2주일쯤 전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입국할 때, 안다유의 프랑스 입국관리소가 다른 승객들은 먼저 통과시키고 나만 기다리게 해놓고 여럿이 구수회의(鳩首會議)를 열더니 프랑스 악센트의 영어로 내게 여러가지를 물었는데, 사뭇 위협조로 "트라바유?"하고 이것만은 프랑스말로 묻는 것이었다. 당신 프랑스에서 일할 셈인가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싸구려 점퍼에 보스턴백, 수염도 깎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 신발은 먼지투성이인 행식이었다. 그래도 마드리드에서는 야바위꾼의 표적이 됐는데.

  가진 돈을 내보이시오 돌아갈 항공권 좀 봅시다, 하는 따위로 번거로움을 겪고서야 어떻게든 통관이 되긴 했는데, 그때 나는 북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어진 무수한 백색의 길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길은 스페인에서 한 가닥으로 합쳐져서 장대한 성벽과 같은 삐레네를 우회하여 유럽의 중추, 화려한 빠리로 뻗어 있다. 일찍이 식민지이던 나라들로부터 주린 배를 움켜쥔 지친 얼굴의 사람들이 그 길을 올라온다. 그 길을 통하여 군대와 장사꾼과 성직자들을 송출하고, 그 길을 통하여 모든 부를 반입한 자들은 인간들만은 한사코 통과시키지 않으려고 빈틈없는 관문을 설치하여 기어올라오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밀어던지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백색의 길은 중남미 제국과 아메리카합중국 사이, 조선 반도를 위시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일본 사이에도 놓여 있다.

 

번역자가 다르기에 약간 글이 다르긴 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그 '하얀길'이 보이는듯 했다.

그리고 그 길 양 옆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사람들도.

 

이 책은 자이니치 서경식 선생이 30대 시절에 쓴 미술순례기다.

본래 서경식 선생의 글이 밝기만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젊은 시절의 글이어서 그런지 더 침울하고 어둡다.

 

  쁘띠 빨레 미술관을 나와서 교황청 앞 박석마당에 섰을 때, 어찌된 영문인지 사람 그림자는 거의 볼 수가 없고, 10월도 그믐께인데 강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밝은 페허랄까. 너무 많은 빛은 짙은 그림자를 만들듯이 마음을 어둡게 한다. 마음뿐 아니다. 몸의 생기마저 급속하게 빼앗아가는 듯하다.

 

  흔히 안광(眼光)이라고 말하지만, 눈에서 방사상으로 밫을 발한다 또는 눈에 수렴한다고 표현되는 그것은 잘못하면 초등학생같이 치졸한 착상으로 끝나버렸으리라.

  고흐 이전에 이러한 자화상을 그린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이러한 자화상에 걸맞은 자아가 있었는가.

 

하긴 그것이 꼭 서경식 선생의 치기어린 젊음 때문만이랴.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소수자였고, 그의 두 형은 '조국'에서 1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으니.

루브르에 가서 '사상범'인 형이 좋아한다는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을 보며 형에게 엽서를 쓰려던 그.

 

  '노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형에게 보낼 그림엽서에 적을 소감을 정리해보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느니, "육체의 어두운 뇌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혼"이라느니, 그럴싸한 수사학이야 왜 없으랴.

  하지만 그런 것을 쓰고 있겠는가.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선생의 표현들은 정곡을 찌르고, 빛을 발한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쁘린시뻬 삐오 언덕의 총살'의 복제품을 사오다가 서울의 세관원들이 문제를 삼는 대목.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 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작자 미상의 '죽은 연인들'을 보면서.

 

  이 그림이 성공하고 있는 비밀은 졸렬함에 있다. 이 그림에는 그 시대의 삽화나 판화 따위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한 희화화(戱畵化)도, 유머러스한 소박함도 없다. 그뤼네발트의 처절한 터치도, 뒤러의 중후함도, 보스의 출렁이는 상상력도 없다. 이 그림은 예술로 승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때문에 이 그림 앞에 서는 일은 결코 예술감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비길 데 없이 적나라하고 무시무시한 '죽음의 이미지'와 맞서는 일인 것이다.

 

책 제목에 '나의'라는 단어가 달려 있듯, 이 책은 매우 개인적인 미술순례기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매우 자세한 설명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그야말로 개인적인 감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림이나 작가가 주어가 되지 않는, 바로 '나'가 주어가 되는 이 책이 주는 울림은 결코 개인적인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하긴 '디아스포라 기행'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읽던 책의 한 대목 덕에 다른 책으로 바로 갈아탈 수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독서의 즐거움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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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해동 외 옮김 / 역사비평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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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극적인 제목에 눈이 끌려 구입하게 된 책.
실은 일본 학자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거니와, 당시 자이니치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던 터라 구입했다.

하지만 여느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 그러나 의외로 책 내용이 상당히 좋았다.

 

저자는 '문명'과 '문화'라는 개념과 단어가 어떤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이것들이 또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주목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서양에서 '문명'과 '문화'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며, 그 둘은 상충하는 면이 있다.

문명은 제1세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프랑스에서 강조되었고, 문화는 후발주자를 대표하는 독일에서 강조되었다.

문명은 보편적인 것, 특히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는데 비해, 문화는 특수한 것, 특히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 더 검증을 해봐야하는 것이지만, 꽤 재미있는 주장이다.)

 

  다양한 국가이익을 둘러싼 다툼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해서 '문명'과 '문화'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이 '문명'의 이름으로 심판받았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명과 문화는 근대국가와 국민의 창출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문명과 문화라는 두 개념이 사실과 달리 마치 국가와는 인연이 없는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점이 두 개념의 허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화론자가 식민주의자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론자는 제국주의자로 변질되어갔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오늘날의 한국에도 잘 들어맞지 않은가?

 

실제로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에는 순수한 문화를 희구하고(배타성) 나아가 그것을 과거의 오랜 시대와 전통에서 찾는 바람(복고적 성격)이 감추어져 있고, 극히 자연스런 추세로서 국민적 통일의 구심력이 되는 존재(황제나 천황)을 불러내는 일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 '국민 특유의 문화'라는 발상은 특히 강력한 국민적 통일이 필요한 위기상황에서 국민적인 자랑과 자부를 요구하며, 그것은 자국 문화의 우월함과 타국 문화에 대한 멸시의 감정으로 쉽게 전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문화'의 대결이었던 2차대전이 종결된 뒤에도, ''문화'나 '문화국가' 슬로건의 기만성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화는 교묘하게 탈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적 행보를 꾸준히 밟아나갔던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조선일보'의 '문화면'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력, 정치력을 바탕으로한 풍부한 컨텐츠와 물량공세. 그를 통해 매우 적절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조선일보의 문화면.

'문명/문화가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 간파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마치 조선일보 문화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의 변명처럼.

 

어쨌거나.

'내셔널리즘은 '민족'으로부터 도주하여 '문화' 속에 몸을 감췄'는데, 그렇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민족은 허구라는 저자의 주장이 수긍은 가지만, 논리적으로 허구라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허구로서 존재한다'라는 괴상망측한 모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그래서 제3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솔직히 답한다. 잘 모르겠다고.

국제적 연대에 대해서도 '국가는 국가이고 국가로 기능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 영속적이고 진정한 연대는 있을 수 없다'고도 말한다.

어찌보면 대안이라고 할 것이 제시되지 않아 허망할 수도 있지만, 도발적인 질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저자는 소수를 배제하지 말자는 논리가 더 넓고 강력한 국민통합을 실현하여

'국가의 유지를 원하는 이들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거꾸로 국민국가로부터 소외된 여성이나 대중, 외국인이 비판의 관점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도발적인 질문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계속 '국민'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국민'을 그만두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가?

 

어떤 면에서는 이번에 강의를 들었던 자이니치 윤건차 선생님의 논조와도 비슷한 면이 있어 보인다.

(선생님께 메일을 드려 니시카와 나가오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해봐야 겠다.)

 

어쨌거나 굉장히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뛰어난 표현들에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역시 아무리 학문적인 글이라 할지라도, 그 표현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이번에 <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을 다시 읽어보니 꺼저가는 불을 되살리는 듯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무참한 인상이 남았다. 역사는 두려운 것이다. 역사는 일찍히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허위임을 말없이 폭로하고, 심금을 울리던 명문을 송장처럼 매장해버린다. …… 그러나 시대적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눈부신 광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맹점이기도 하다.

 

또 저자가 인용하는 루소의 표현을 보라.

 

정부와 법이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안전, 행복에 필요한 것을 주는 데 비해, 학문 · 문학 · 예술은 그만큼 전제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훨씬 강력한 것이고, 인간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꽃장식으로 가려서 인간이 그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자유의 감정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만들어 이른바 세련된 국민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출신성분 같은 것이 한 사람의 인생관, 사상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믿는 편이다.

저자가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1934년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게되는 존재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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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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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나무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인문교양시리즈, '問라이브러리'. 하지만 생각보다 실적은 좋지 않은 듯 하다.

어쨌거나 이 시리즈가 나온지 꽤 지났는데 한 권도 구입하고 있지 않다가 이번에 두 권을 구입.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가 타 출판사의 문고 시리즈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적어도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저자 때문일지도.

저자는 고려대의 경영학부 교수이기도 하지만, 신안1리 마을 이장이라는 '간판'을 내세운다.

그만큼 저자가 생각하는 대안은 마을 공동체, 작은 단위에서 시작하는 연대인 것이다.

 

제목에 비해 내용이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그 내용도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원론적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에는 거의 동감할만하다. 문제는 그 주장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하는 것.

저자의 말처럼 ''대안'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세계자본이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은 범지구적 파괴와 '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를 조장한 결과, 세계민중의 삶을 바닥으로 수렴시키고 생존의 위기감을 공유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제 '세계자본과 세계민중이 직접 충돌'하는 지점들이 증가하는 것이다. ……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저항의 세계화'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직접충돌하는 지점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체로 저항의 세계화 즉 연대의 세계화를 동반한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이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는 민중에 대한 혹은 정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은 회의주의보다도 더 위험하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관점 중 제일 덜 낙관적인 것들에 눈길이 갔다.

 

  그렇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한편으로 사회적 압력의 일정한 성취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결국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기업들이 자본주의시스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매우 주요한 매개변수(parameter)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대안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남을 설득하기 이전에,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원한 숙제다.

내 삶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어갈 때만이,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그래서 저자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연대'에 대한 다음의 일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한편, 이러한 '연대'가 단순한 '도움'과는 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있다. 1994년에 캐나다, 미국, 멕시코 사이에 북미자유협정(NAFTA)이 체결됨과 동시에 멕시코에서는 사파티스타 농민군이 출범했다. 자본과 권력의 일방적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여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 사파티스타 농민군이 전 세계 양심세력들의 집결을 호소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농민군을 지지하러 멕시코로 몰려들었다. 이때 한 농민군 여성이 외쳤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뿌리가 같다고 보고 함께 해결하자고 한다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이 단호한 목소리만큼 분명하게 '생동하는 연대'의 의미를 밝히는 논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연대는, 동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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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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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 김진숙

 

잎사귀도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침 조회 시간에 사람들이 '나래비'를 죽 서있으면 그들의 등짝엔 허연 소금꽃이 만개하곤 했다.

내 뒤에 선 누군가는 내 등짝을 또 그렇게 보며

"'화이바' 똑바로 써라. 안전화 끄내끼 단디 매라. 작업복 단추 매매 채아라."

그 지엄하신 훈시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을 게다.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러이 지는 꽃.

 

이 책을 읽으려고 꺼내들었던 것이 2달 전이었던가. 그리 분량이 많지도 않은 책인데 읽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책이 좋지 않아서, 재미가 없어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생각없이 새벽 3시에 책을 집어들었다가 30분을 읽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도 있었으며,

이 책이 주는 무거움을 감당할 자신이 생기지 않아서 다시 쉽게 책을 손에 쥐지 못한 탓이다.

그러다가 울산으로 가는 심야열차에 몸을 싣고는 책을 다 읽은 후, 들어가 한숨을 몇 번 내쉬고는 책 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왜 이다지도 힘든 일인 건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여성 최초의 용접공. 20년이 넘도록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

이런 경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녀의 삶, 노동자의 삶이 이 책에 녹아들어가 있다.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사람 나가고 다시 그 사람들. 생각 좀 해봤나? 기억이 나제? 우리도 니한테 이라고 싶겠나? 말해야 뭐하노? 조지는 김에 확 조져 삐야 된다니까. 골수 뻘개이들도 첨엔 다 모린다 카지. 조지야 아이구 할배요 카제.

  그 눈빛들. 스무개 가까이 되는 눈들은 각자 다른 눈이었지만 같은 빛깔로 번득이고 있었다. 묘한 비웃음을 담고 붉게 번들거리든 그 눈빛들. 그들은 또한 씨발년과 김진숙 씨의 절묘한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지옥과 천당의 차이를.

  씨발년이었던 어느 시점에선가 오줌을 쌌다. 이 씨발년, 드럽게 오줌을 싸고 지랄이고. 재수없는 년, 골고리 지랄벵하네. XX를 확 잡아 째버릴라. 어디 뻘개이 년은 XX도 빨간가 함 보자. 내가 오줌을 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했고, 지리한 대원사 계곡에서 좃 내놓고 미역 감은 얘기도 했다. 처음엔 그게 위안 같기도 하고 구원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같은 인간끼리니까 어쩌면 통할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입에서 나는 김치 냄새조차 절망이 되어 갔다. 저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쳐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

 

중간에는 집회장에서 직접 외쳤던 김진숙의 추모사를 모아놓았다.

그 중 2003년(1983년이 아니고 2003년이다!) 노동자 배달호 씨의 노제 뒤의 짦은 추신은 또 다시 책을 덮게 만들었다.

 

<추신> 박창수의 무덤이 빤히 바라뵈는 곳에 배달호 열사를 묻고 와서 이빨까지 빠지는 듯한 심한 몸살에 시달렸습니다. 난 언제까지 이런 추모사를 쓰며 살아야 하나......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라고 하기엔 우린 너무 비겁하다. 조금만 관심만 가지만 알 수 있을 일들이다.

우린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로 시선을 돌린다. 알아서 뭐하냐고 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아직 어리다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인들이여. 당신이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서야 되겠는가.

강사로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이가 나라면,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겠는가.

힘든 일인 것, 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고통스러운 현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당장 그들과 함께 비를 맞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냉소를 보내지 말자.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자.

내 일이 아니라고 백안시하는 순간, 다음 타겟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

저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여전이 이 글은 유효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 갔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들을 가두었을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때

나는 항의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 갔을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불편한 책이고 힘든 책이다. '그러니' 일독을 권한다.

그것이 유서를 꾹꾹 몸에다 눌러 쓸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권미경이라는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때부터 홀어머니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오빠와 어린 동생 둘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글재주가 유난했던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똑똑하면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혹시 아십니까?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리는 저주를 받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게시판에 걸렸던 그림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혹시 상상해 보셨습니까? 미경이의 글재주는 작업 시간에 빵 먹었다고 조장한테 터지고 온 날, 구비구비 서러운 일기를 써 내려가는 데 밖엔 써먹을 데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유서 같았던 일기장을 몇 권이나 남겨 놓고 공장 옥상에서 고단하기만 했던 스물두 살의 몸뚱이를 끝내 날렸던 미경이의 유서는 그러나 막상 짧기만 했습니다. "......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고 왼쪽 팔뚝에 볼펜으로 비명처럼 새겨넣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 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말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_권미경의 왼손 팔뚝에 쓰인 유서

 

남의 일.. 이라고? 우리 어머니는 서울 어느 공단에서 저 또래보다 더 어릴 때 미싱을 배웠다.

어머니의 언니는 버스 안내양을 하기도 했다. 내 아버지는 한 회사의 노조 부위원장이었다.

 

그들은 김진숙 씨가 써내려간 일들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세월 속에 묻어두었을 수도 있을 그들의 상처가 다시 드러날까봐.

이미 흑백이 되어버린 그들의 상처가 울긋불긋 컬러가 되어버릴까봐.

그리고 나는, 그들의 상처와 비슷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지금 그 때 그 사람들이 되려 보수적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하다고 고개돌리기엔, 고개 돌릴 곳이 마땅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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