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첨 민주주의 -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일구는 직접 정치
어니스트 칼렌바크 & 마이클 필립스 지음, 손우정.이지문 옮김 / 이매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다들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반 전체 학생이 돌아가면서 반장하기. 아니 반장은 아니더라도 줄반장 정도는 이런 랜덤 형식의 '민주주의'가 적용된 사례가 많다. 아마도 이런 형식의 적용이 가능한 것은 줄반장이 하는 역할이 별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줄반장이 되든 반의 운영에 크게 상관이 없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면? 국회의원을 랜덤, 그러니까 추첨으로 뽑는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국회의원이 하는 역할과 맡은 책임이 무슨 줄반장과 같은 줄 아냐고.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추첨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추첨을 통한 샘플의 추출이 민의를 대변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의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무작위 추출'을 통해 배심원이나 대표를 선택하는 방법이 무작위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처럼 될 대로 되라는 식은 아니다. 오히려 절묘하게 체계적인 방법이다. 무작위 추출의 정확성은 정교하며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수학 이론으로 입증됐다. 이 원리를 판사와 배심원들 앞에서 증언하기 위해 자주 불려간 피터 셰릴 박사는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에서도 추첨sampling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판사와 배심원을 이해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수프 맛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먼저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까지 완전히 섞이도록 휘저어야 한다. 대부분의 판사와 배심원들은 이렇게 휘젓는 행동이 무작위와 같은 원리라는 것을 이해한다. 미국 성인들의 명부를 얻어서 각각 번호를 부여하고, 그 번호를 완전히 섞어버리는 것은 수프를 휘젓는 행동과 유사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게 네 접시 정도의 수프 단지이든, 아니면 50갤론 정도 되는 솥단지의 수프이든 간에 수프 맛을 아는 데는 한 스푼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수프 맛을 얼마나 정확하게 아느냐는 솥단지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스프가 완전하게 섞여 있느냐에 달려 있다. (38쪽)

 

생각해보면 그렇다. 추첨으로 뽑은 의원들이 과연 전문성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보라. 지금 뽑히는 국회의원들은 어떤 '전문성'을 이유로 선출이 되는가? 그들이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투표 결과 하나로 중책을 떠맞는 것이다. 아니, 중책이 아니라 특권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게다가 선거제도는 명목상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뿐, 실제 의원 선거 출마에 현실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공천금이나 인원동원 등을 생각해보라). 또 선거는 비용의 낭비가 심하고, 득표율이 정확한 민심의 반영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선거제는 "선거 때가 아니면 국민은 국가 운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한 민주주의(112쪽)"인 셈이다.

 

선거는 공직을 맡으려고 하는 후보자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부여하지 않는다. 투표자들은 공직에 가장 적절한 기준(객관적 기준)으로 후보자들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116쪽)

 

저자들이 그냥 선거제도에 염증이 나서 "확 추첨해서 뽑는 게 낫겠다!"라고 투덜거리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타진한다.

 

새로운 하원 의원은 일을 시작하는 신임 의원들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고, 각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을 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워싱턴으로 뽑혀온 신임 의원은 적어도 3개월은 의원활동에 익숙해질 수 있게 전반적인 내용에 관한 집중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런 교육은 기초 군사 훈련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판사가 배심원에게 기본적인 사항을 설명하는것과 동일한 목적에서 진행된다. 이 학교에서는 최고 대학의 최고 교수진이 강의하며, 전직 의회 지도자들을 초대 강사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매년 충원되는 145명의 신임 임원들은 임기 동안 다루게 될 국정에 관한 이해를 돕는 교육뿐만 아니라 임기가 끝나고 지역 사회로 돌아가서도 영향력 있는 국민으로 남게 될 교육을 받는다. 지역 사회에서 이 전직 의원들이 벌이는 활동은 많은 혁신적인 교육자들에게도 활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52쪽)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실현'의 장이 미국이기 때문에 직접 한국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87년 체제 성립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 선거제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왜 90%에 육박하던 투표율이 60%를 겨우 넘어서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이유에는 뭐니뭐니해도 "투표해봐야 뭐하나. 나랑은 상관이 없는데"라는 울분과 짜증, 정치에 대한 염증이 아닐까?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좀 더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그것이 가능하게끔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비록 우리 개개인에게는 "덜 편한 시대(101쪽)"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뜻을 반영시키려면 그 정도의 수고는 반드시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의 의견이 반영이 될 때, 참여 의지 또한 점차 강해질 것이다.

 

본문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분량만큼의 보론이 뒤에 실려 있다. 이 보론은 역자들이 쓴 것인데, 추첨 민주주의를 어떻게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바로 의원 선출을 추첨으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정당 내에서의 민주주의는 추첨을 당장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여의지 부족을 이유로 드는 (예상되는) 반론에는 다음과 같은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추첨제 도입을 꺼리는 가장 큰 반론으로 '일반 성원의 참여 의지 부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 중 특정한 결사체에 참여할 정도로 능동성을 갖춘 이들을 상대로 '참여 의지 부족'을 거론할 거라면, 도대체 민주주의의 이상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135쪽)

 

이것이 절대적인 대안이다, 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거철에 다시 드러나는 공천의 문제, 후보자 자질의 문제, 순간적으로 마구 흔들리는 표심의 문제, 의회를 쥐고 흔드는 모피아의 문제 등을 생각한다면, 이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볼 때다. 성별이나 경제적, 사회적 계급에 상관없이 성인 국민 모두가 투표권을 가진다는 '당연한' 보통선거의 원칙,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음을, 그리고 보통선거권을 처음 주장했을 때의 반응은 '미친거 아니냐'라는 거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모든 시작은 어리석고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어쨌거나 시작은 '실현 가능성'보다는 현재의 '문제점'과 대안의 '타당성'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내가 이번 정당 투표에서 16번,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청소 노동자가 의회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적어도 전국에 수십 만은 될 청소 노동자들을 위해서만이라도 무언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이기적이어야 한다. 투표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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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밀란 쿤데라 전집 14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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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커튼>과 <소설의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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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cCartney - Kisses on the bottom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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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메카트니의 my valentine. 듣는 순간 숨을 멈추게 된다. 거장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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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묘지 소송 - 산송, 옛사람들의 시시비비 키워드 한국문화 10
김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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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초반부분을 구성하는데 조금 알아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구입하여 읽었다. '산송'이라고 불린 조선시대의 묘지 소송은 꽤나 흥미로운 주제다. 이게 현대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이걸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한 시대의 확실한 키워드였고,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발생했다.

 

산송이란 주제를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조금 더 자세하게 알게 된듯. 경국대전에 명시된 분묘의 한계라든지, 정자가 조상의 묘자리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라든지, 19세기 지식인들이 묘자리가 지나치게 넓어지는 것을 걱정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150페이지 남짓하는 분량에다 책의 크기가 소책자에 가깝기 대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봄직 하다. 그러나 이 시리즈 '키워드 한국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이 인문학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면, 이 책이 그 방향에 충실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책이 어렵고 지루한 면이 있다. 분명히 저자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고, 문장이 지나치게 길거나 비문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집어들었던 내가 그랬다면, 일반 대중들은 어떨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미진진하게 읽을만한 책이 아니란 것은 명확하다. '재미있고도 수준 높은 역사책'을 쓰는 것은 역시나 어려운 일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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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웰 브루노 모던 트리 책장 - 레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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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을 방에 널어놓는;; 상황이라 방이 너무 지저분 했는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좋습니다. 인테리어 효과도 있고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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