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 Yahoo 8 - 대한민국 현대사에 기생했던 짐승들의 기록
윤태호 지음, 석정현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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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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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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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 디테일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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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김형숙 지음 / 뜨인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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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안고 가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그간 금지하는 것 많은 병원의 규칙과 절차에 익숙했을 아이 엄마가 떨리는 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처참한 심정이다. '우리가 그랬나요? 그렇게까지?' 하고 묻고 싶었다. 무슨 억지 주장을 한다 해도 허용될 것 같은 시간에, 막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가, 아이의 주검을 안고 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125쪽)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병원에서 죽는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죽어간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했듯이, 노년은 사회적 죽음으로 시작된다. 사실 노년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는 얘기다. 젊은 사람도 암에 걸리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또 죽기 때문이다. 제목이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인 이 책의 배경이 모두 병원인 이유가 이상하지 않은 까닭이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병원 건물 지하나 뒷 편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장례식장에서 남은 자들은 이별의식을 행한다. 하지만 이제 그 의식조차도 '의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의 탄생을 둘러싼 기억보다 죽음을 둘러싼 기억들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일은 비슷비슷해서 별로 기억할 게 없지만 죽음은 사람마다 다른 양상으로 찾아왔고, 주인공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극적이고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22쪽)

 

무력할 만큼 분명하게, 누구나 당연하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이별하는 것이었다는 점. (8쪽)

 

과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저자의 표현대로 무조건 낭만화할 수는 없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필립 아리에스를 비판한 부분도 바로 여기다. 하지만 어찌됐건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 변화가 때로는 매우 비인간적일 때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현상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여러울 것이다. 또 어떤 한 가지 이유만을 들어 다 그것 때문이라고 매도하는 것도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학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우리가 의학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기술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고 해도 중환자실에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하여?'에 대하여 제대로 묻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간 병원 중환자실 환경은 엄청나게 바뀌었는데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는 이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된 듯 보였다. …… 심폐소생술을 비롯하여 우리가 하고 있는 처치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 여길 때가 많았다. (38~39쪽)

 

의료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명분 뒤로 숨었고, 가족들은 혹시나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41쪽)

 

의료행위 결정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환자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소외된다. 그들이 환자복을 입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심지어 자신의 건강과 목숨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도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다. 그걸 환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정말 배려일까? 배려한다고 말하기 위한 환자 주변인의 자기 위안은 아닐까? 우린 최선을 다했다라는 면죄부를 받고 싶은 그런 마음. 물론 그 배려들을 어찌 이런 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냐마는, 모든 배려가 상대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는 걸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불통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와 문화적으로 유사한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의하면 의료진은 암환자의 예후에 대해 보호자에게 설명할 때는 순순하게 의학적 판단만 말하거나 비관적으로 말하는 반면, 환자에게 설명을 할 때에는 희망적인 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대화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지금 확인하고 있다. (76쪽)

 

  내 마음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데, 좀 심란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싶다. (54쪽)

 

솔직히, 나는 저자의 저 말에 큰 위로를 느꼈다. 슬플 때 울고 우울할 때 잠시 우울에 젖어 있고, 지칠 때 좀 퍼져있고, 무서울 때 조금 무서워하고. 그 감정을 무조건 숨기고 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환자도 사람이며, 죽어가는 사람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란할 때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가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수술의 내용을 하나도 모르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중환자가 된다는 건 어쩌면 고립되고 소외된 상태에서 자신의 병과 죽음에 대해 제3자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00쪽)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머니의 경우 더 이상의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계에 의존해 생을 이어나가길 거부하는 분이란 걸 내가 잘 안다. 평소에도 그런 말씀을 해오셨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시술에 희망을 거는 가족들도 사랑 때문이겠지만, 나의 이 동의도 사랑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전에 당사자의 의사가 정확히 마련되도록 조치를 해두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이건 생명 지연 의료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행위를 거부할 권리도 당사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것들이 비단 나이가 많은 노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사전의료지시서를 진지한 마음으로 작성해놓을까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 내가 언제가 맞이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순간을 보장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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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 다중지성총서 5
임태훈 지음 / 갈무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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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제목부터가 낯설 것이다. "우애의 미디올로지"라니? 저자의 설명이 필요할 터.

 

  '우애의 미디올로지'의 전선을 크게 셋으로 정한다. 1. 신자유주의의 폭압적인 시장 논리로부터 미디어 환경의 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기획이면서, 2. '촛불'과 '3.11'의 역사적 잠재성을 밝혀 새로운 사회 문화적 상상력을 구상하고, 3. 불온하고 미천하여 별 볼일 없는 존재들(루저, 컴맹, 무식쟁이, 게으름뱅이, 잡놈, 속물, 변태, 악플러, 괴담 유포자 등등)의 특이성에 감응해 거대 미디어 기업의 하이테크에 맞설 '신체의 기술'을 개발하려 한다. (7쪽)

 

다양성, 상상력, 로우테크. 저자는 이 주요 키워드로 소위 문화평론을 시도하는데, 의외로 그 출발점은 "3.11"이다. "9.11"이 아니라 "3.11"?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숫자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3월 11일은 다름 아닌 일본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날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 인해 촉발된 '핵문제'. "아니, 그게 뭔데 숫자로 명명하느냐"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으리라(5.16 "혁명" 정도는 되어야 숫자로 명명할만 하지라며). 하지만 과자 이름으로도 하루를 명칭하는 판인데, 자칫 수 백만의 목숨이, 더 크게는 지구 한 편이 날아가버릴 뻔했던 이 사건을 '사건'으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북한이 쏘아대는 로켓(이라고 쓰고 미사일이라고 읽는다)은 언론의 메인 기사가 될 가치가 있지만, 핵발전소가 낡아서 언제 뻥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거나 발전소의 관리 상태가 엉망이라는 등의 소식은 가십 정도로 치부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3.11은 우리 시대가 더는 근대의 시간 체제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알리는 엄중한 경고"(26쪽)였음에도 우리는 금새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다. 왜? 그건 아마도 저들이 독점한 미디어,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우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새로운 미디어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미디어의 기반은 함께 하는 '우애'. 각자의 관심 분야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때로는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함께 싸우기도 하는, 여기서는 동지이기도 하고 저기서는 적이기도 한 '잡스러운 우애'. 때문에 이 책은 단순히 문학만을 텍스트로 다루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은 물론이고 책이나 복사기라는 '물건'도 텍스트로 다룬다. 아, 처음에 언급한대로 '신체'라는 물건 또한. 이 잡스러움 속에 가능성이 있고 대안이 존재할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청결한 무대엔 이미 우리의 자리가 없으므로.

 

그러니 따지고 보면 카드 결제 기록만큼 세밀한 일기도 없다. 그 안에 적힌 상품명, 거래액, 결제시간과 결제일은 너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외설적인 기록이다. 일상의 동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지각, 지식, 감정, 마음, 소통, 욕망까지도 자본의 질서에 동원되고 제약당한다. (45~46쪽)

 

전자책이 더 새롭게 혁신되길 바란다면 무엇보다도 책이 어떻게 그 많은 잡스러움을 수용할 수 있는 매체인지 생각해야 한다. (192쪽)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그래서 "'문학'은 차라리 접속력(168쪽)"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는 나름의 맥락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의문점도 많이 남아있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미적지근한 촛불"이 정말 "미적지근"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 설정 자체가 이미 과도하게 자아도취적이거나 또는 반대로 과대포장은 아닐까? 또 "미적지근한"과 "촛불"을 그렇게 딱 붙여놓고 여러사람들을 그 범주에 넣어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피하려고 했던 그 구태의연한 구도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문제제기 자체가 충분히 의미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책 앞부분의 비평보다는 뒷부분의 비평들이 좀 더 매력있었다(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4부 "구 미디어의 재발견". 복사기가 만들어낸 네트워크로 1980년대를 살펴보고 남한 사회의 SF 상상력으로 1960년대를 진단하는 시도와 그 성과는 놀랄만한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현재의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핵무기는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핵발전은 쾌적하고 편리한 미래를 위한 약속된 기술이라는 바보 같은 이분법, 끝없이 '핵'을 동어반복하는 프레임의 전형을 <학생과학>은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 프레임 안에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온갖 억압적 기제와 핵 자본주의의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작동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프레임을 꿰뚫을 수 있는 불온한 SF적 상상력은 1960년대 남한 사회에 부재했다. (263쪽)

 

'SF'는 한 사회의 사회 문화적 상상력의 임계점을 지시한다. 'SF'라는 개념은 그저 장르 용어의 하나쯤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증환을 읽는 척도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너와 나는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가? 게다가 무엇을 표현할 수 없는가? 어떤 표현의 어색함, 어떤 작품에 대해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저속함은 어느 틈에 내 몸에 새겨진 반응일까? (272쪽)

 

4부가 더 인상적이었다는 말이 자칫 문제제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역시 문제제기다. 잉여력이나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 "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게 아니라 "우린 지금 무엇을 상상할 수 없는 걸까?"를 묻는다.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건 겉보기엔 매우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태도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할 수 없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무기력한 과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불투명하게 만들어야 온건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것을 철저히 막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엉망진창이라면 작품도 엉망진창인 게 당연하다. 그걸 애써 펴고 다려서 반듯하게 만드는 게 제일 시급한 일일까? 오히려 구겨지고 찢기고 결핍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실패를 분명히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지난 시대 먼저 실패해본 자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이다. (272~273쪽)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시작은 없다. 실패는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장기지속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패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 상하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가. 선택의 각자의 몫이다. 아, 힌트가 하나 있다. 실패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조차도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고되고 불안하다는 것. 자본주의라는 대표적인 실례가 우리 눈앞에서 그걸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밑져야 본전' 정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족. 솔직히 말하자면, 난 '문학평론' 혹은 '문화평론'이라고 분류되는 글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접했던 대부분의 글들이 불친절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책은 그렇게 불친절하거나 폭력적이지 않다. 내가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앞서 얘기한 글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글이 쉽지는 않다. 저자의 문체가 만연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문제는 단어의 선택인 것 같다. 물론, 새로운 단어(조어)나 한자어의 사용이 필요한 글들이 분명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정도가 과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애"를 위해서라면 저자의 다음 글은 조금 더 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통에 목마른 우리 세대 젊은 작가이니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이 책의 주제의식을 대학원이나 다니는 사람들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우애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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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
고은 글, 한병호 그림 / 바우솔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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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선생의 시튼 동물기라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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