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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김형숙 지음 / 뜨인돌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냥 안고 가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그간 금지하는 것 많은 병원의 규칙과 절차에 익숙했을 아이 엄마가 떨리는 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처참한 심정이다. '우리가 그랬나요? 그렇게까지?' 하고 묻고 싶었다. 무슨 억지 주장을 한다 해도 허용될 것 같은 시간에, 막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가, 아이의 주검을 안고 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125쪽)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병원에서 죽는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죽어간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했듯이, 노년은 사회적 죽음으로 시작된다. 사실 노년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는 얘기다. 젊은 사람도 암에 걸리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또 죽기 때문이다. 제목이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인 이 책의 배경이 모두 병원인 이유가 이상하지 않은 까닭이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병원 건물 지하나 뒷 편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장례식장에서 남은 자들은 이별의식을 행한다. 하지만 이제 그 의식조차도 '의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의 탄생을 둘러싼 기억보다 죽음을 둘러싼 기억들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일은 비슷비슷해서 별로 기억할 게 없지만 죽음은 사람마다 다른 양상으로 찾아왔고, 주인공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극적이고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22쪽)
무력할 만큼 분명하게, 누구나 당연하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이별하는 것이었다는 점. (8쪽)
과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저자의 표현대로 무조건 낭만화할 수는 없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필립 아리에스를 비판한 부분도 바로 여기다. 하지만 어찌됐건 변화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 변화가 때로는 매우 비인간적일 때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현상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여러울 것이다. 또 어떤 한 가지 이유만을 들어 다 그것 때문이라고 매도하는 것도 부당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학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우리가 의학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기술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고 해도 중환자실에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하여?'에 대하여 제대로 묻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간 병원 중환자실 환경은 엄청나게 바뀌었는데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는 이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된 듯 보였다. …… 심폐소생술을 비롯하여 우리가 하고 있는 처치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 여길 때가 많았다. (38~39쪽)
의료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명분 뒤로 숨었고, 가족들은 혹시나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41쪽)
의료행위 결정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인 환자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소외된다. 그들이 환자복을 입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던, 심지어 자신의 건강과 목숨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도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다. 그걸 환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정말 배려일까? 배려한다고 말하기 위한 환자 주변인의 자기 위안은 아닐까? 우린 최선을 다했다라는 면죄부를 받고 싶은 그런 마음. 물론 그 배려들을 어찌 이런 식으로만 해석할 수 있겠냐마는, 모든 배려가 상대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는 걸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불통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와 문화적으로 유사한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의하면 의료진은 암환자의 예후에 대해 보호자에게 설명할 때는 순순하게 의학적 판단만 말하거나 비관적으로 말하는 반면, 환자에게 설명을 할 때에는 희망적인 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대화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지금 확인하고 있다. (76쪽)
내 마음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데, 좀 심란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싶다. (54쪽)
솔직히, 나는 저자의 저 말에 큰 위로를 느꼈다. 슬플 때 울고 우울할 때 잠시 우울에 젖어 있고, 지칠 때 좀 퍼져있고, 무서울 때 조금 무서워하고. 그 감정을 무조건 숨기고 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도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환자도 사람이며, 죽어가는 사람 또한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란할 때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가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수술의 내용을 하나도 모르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중환자가 된다는 건 어쩌면 고립되고 소외된 상태에서 자신의 병과 죽음에 대해 제3자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100쪽)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머니의 경우 더 이상의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계에 의존해 생을 이어나가길 거부하는 분이란 걸 내가 잘 안다. 평소에도 그런 말씀을 해오셨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시술에 희망을 거는 가족들도 사랑 때문이겠지만, 나의 이 동의도 사랑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전에 당사자의 의사가 정확히 마련되도록 조치를 해두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이건 생명 지연 의료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행위를 거부할 권리도 당사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것들이 비단 나이가 많은 노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사전의료지시서를 진지한 마음으로 작성해놓을까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 내가 언제가 맞이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순간을 보장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