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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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런 시대에 이런 책을 읽으면 잡혀갈라나. ㅎㅎ 2009년도에 농담이라지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여튼, '공산당 선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총 3부로 나눠져있는데, 1부는 아마도 황광우씨의 글인듯.

1부에선 공산당 선언의 일부를 발췌해가면서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에세이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대중적인 면을 고려할 때 이 전략은 꽤나 괜찮은 선택 같은데 문제는 내용.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뉘앙스의 글이 너무 많은데다 교조적인 냄새까지 풍겨서 읽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글도 있다.

차라리 1부 2장과 같이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놓기만 했어도 그와 나 사이의 세대차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을텐데.

'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정작 그의 글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활동 중 그가 받았던 상처를들을 무시하자는 얘긴 아니지만.)

 

273페이지에 가서야 핵심 텍스트인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다. 2009년에 읽는 공산당 선언이 이렇게 현실적일 줄 누가 알았으랴.

 

반대만하면 좌빨이니 배후세력이니 외치는 저들을 보라.

 

  반정부당치고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들의 적들로부터 공산주의라고 비난받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또 반정부당치고 자기보다 더 진보적인 당이나 혹은 반동적인 적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되돌려보내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그리고 '자유무역'이란 미명으로 불평등 무역을 강요하는 저들도 보라.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자신들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난관을 타계하는 방법으로 전쟁과 착취를 택하는 저들의 전술.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확대하면서 기존의 시장을 보다 더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한다.

 

비정규직, 최저임금에 관련된 개악도 예외는 아니다.

 

기계가 여러 노동 간의 차이를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리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대오 내부의 이해관계와 생활상태는 더욱더 균일해진다.

 

뒷부분의 해제(아마도 장석준 씨가 쓴 것으로 보이는)와 함께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좌빨, 좌빨 하기 전에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하는 자들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뭐... 기대도 안한다만. -_-)

 

당시 전략적 선동 팜플렛으로 제작되었을 이 선언은 2009년의 한국에도 여전히 유효한 선언문이다.

그래서 기쁘냐고? 천만에. 정말, 뼈저리게 아프다.

단결한 저들을 보라. 그러니 우리도 단결해야만 한다.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지배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노예들에게 노예적 생활조차 보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브루주아지가 노예들로부터 부양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노예들을 부양해 주어야 할 만큼 그들을 비참한 처지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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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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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린비에서 출간되고 있는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공산당 선언의 원문과 함께 등장배경, 공산당 선언의 여파/유산이 서술되어 있다.

'선언'은 이미 '레즈를 위하여'에서 많이 인용했으므로 한 구절만 인용해본다.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다.……

  힘들게 일해 혼자 힘으로 얻은 스스로 번 소유라니! 부르주아적 소유 이전에 있었던 소규모 장인의 소유나 소농민의 소유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 소유라면 폐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산업의 발전으로 이미 상당 부분 폐지되었고 또 지금도 나날이 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언'으로 시작된 공산주의는 이후 여러가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하거나 왜곡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이 스탈린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하지만 왜곡이 아니라면 변화나 차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로 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재해석 과정을 통해 공동체 개념이 '함께 존재함'에 가까운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겨났다. 모든 인간을 생산자(프롤레타리아트)로 환원하는 대신에 각자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다차원적인 사회로. 이 새로운 공동체 개념이야 말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는 '선언'의 꿈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는 길고도 험난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선언'으로 되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지적대로 '현실적 운동'임을 강조하는 '선언'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일단 가보아야 한다"는 식의 회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수수께끼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라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책의 말미에는 고병권의 짧은 해제가 들어있는데, 이 해제의 한 구절이 오늘날 '선언'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 같다.

좀 길 수도 있지만 인용해본다.

 

'선언'은 위험한 책이다. 하지만 이때 '위험하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위협하다'는 말과 혼동되어선 안된다. '선언'의 유명한 문장,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가 위협하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선언'의 위험성은 오히려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위협하다'는 것과 '위험하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위협하는 자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사용할 때조차 거래를 원한다.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말하는 제국의 지도자도, 직장을 폐쇄하겠다는 사장도, 총파업으로 위협하는 노조도, 회초리를 들고 서 있는 교사도 원하는 것은 거래이다. 위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들은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폭력은 여전히 거래의 메시지이다. 일정한 개량이 이루어지면 그만하겠다는 메시지. 따라서 이들 때문에 현존하는 세계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득권이 강화되고 법이 강화될 뿐이다. 부시를 보라. 위협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세계 속의 이권이지 새로운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자는 세계의 이권에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이다. 폭력은 그에게 수단도 목적도 아니다. …… 위험한 자는 결코 거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폭력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저들이 비난할 때 애용하는 '국가위기'라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전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어떻게 가지고 있지도 않는 것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보수'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극명하게 충돌했던 용산에서의 '폭력'을 보라. 한 쪽은 위협을 하며 생존권에 대한 '거래'를 원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거래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것이 틀림 없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하다'.

 

종이질을 조금 낮추고 가격을 조금 더 내린 문고판 형식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하지만,

'선언'을 부담 없이 읽어보기에는 괜찮은 선택 같다. 유강은 씨의 번역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꽤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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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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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무일푼으로 시작하셨던 부모님의 상황상 여유 있는 가정도 아니었다. 때문에 외식이란 것은 정말 연례행사였다. 성적표가 나오거나 기타 특별한 일이 있어 외식을 하게 되어 갔던 곳 중에 ‘맘모스’라는 경양식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을 처음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경양식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 식당은 재래시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허름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가면 넓직한 공간 가운데에 분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하얀 천이 덮인 테이블이 20개 정도 놓여있었다. 샹들리에나 테이블이나 의자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촌스러웠고 분수 또한 제대로 물을 뿜어내는 날이 드물었던 그곳은, 내겐 가슴 설레는 곳이었고 한 편으로는 긴장되는 곳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본 적이 없던 내 머릿속에는, 돈까스를 주문한 뒤 나오는 스프를 받아들던 순간까지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만이 떠돌고 있었다. 외식장소로 숯불고기집이 낙찰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경양식 식당’만의 아우라가 내 주변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의 사용법. 사실 왼손잡이였던 나는 당연히 왼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돈까스를 썰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매너’를 지켜 오른손으로 힘들게 나이프를 사용했고, 스프를 먹을 때는 숟가락을 몸 쪽으로 쓸어 ‘불편하게’ 먹어야했다. 또 단무지보다 맛없던 마카로니를 입에 넣을 때에 그 맛과는 별개로 무언가 ‘불편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다. 이 모든 것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같이 갔던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먹는 법에 대해 간단히 가르쳐주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이 친절히 가르쳐준 대로 행동하는 착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맘모스’에만 들어가면 자발적으로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왼손에 나이프를 들게 되면 누가 그것을 보기라도 한 듯 부끄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렇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맘모스’의 추억을, 베블런은 100년도 더 전에 집요하게 분석했다.

 

즉 훌륭한 예절을 갖추는 데는 그만큼 많은 시간, 열성, 비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빼앗기는 사람들이라면 예절을 습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세련된 취미, 예절, 생활습관은 상류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용한 증거이다. 훌륭한 예절에 관한 지식은 상류층 사람들이 일반인들의 시선에 띄지 않게 숨긴 생활의 일부를 아무런 돈벌이도 안 되는 성과물들을 획득하기 위한 가치 있는 활동에 소비했다는 자명한 증거이다.

 

  계급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자의적 판단 하에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시절 그 식당을 처음 가는 이와 함께 했다면 나는 두려움을 의기양양함으로 가장했으리라. 그렇다면 나의 몸부림과 두려움, 의기양양함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그렇다. 바로 경제적 계급이다. 그리고 그 계급에 기반한 나의 감정들은, 까딱하면 노동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들의 아이들은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없음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노동에 대한 과시적인 불참은 우월한 금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관습적 표현이 되고 또 명성을 획득할 만하다는 관습적 지표가 되기에 이른다. 그와는 반대로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가난과 예속의 징표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금력과시경쟁은 생산이나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획일적으로 조장하는 한편으로 생산노동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 수치심을 안겨준다. 초기 단계의 문화를 물려받은 고대의 전통 하에서는 그처럼 비천하게 평가되지 않았던 노동이 이제 불가피하게 가난을 증명하는 수치스러운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단순한 ‘가난함’을 넘어선 인간적인 차별을 내포한 것이었고,

 

우리의 사고습관에는 비천한 고용살이를 연상케 하는 직업들에 특별히 결부되는 의례적 불결함에 대한 구체적 감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직무를 관습적으로 요구받는 피고용인들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오염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상류층 취향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이다.

 

“따라서 차별적 비교는 결국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과 다름없”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끼니를 굶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끼고 아끼던 부모님 덕에 부모님의 가난을 직접 겪지 않고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내 기억의 언저리에 작은 상처처럼 남아있는 ‘빈부차’는 어디에서 생겼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 무렵의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들은, 바로 옆집에 있던 비디오, 재믹스, 현미경, 피아노….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교육 수준이 높았던 옆집 아주머니의 말투, 옷차림. 그 ‘고상함’은, 아무도 종교생활을 하지 않던 우리 집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 모두가 아침 일찍 성당으로 가곤 했던 옆집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베블런이 지적했듯이 심지어 종교까지, 내게는 ‘소비재’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소비재는 우리 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왜?

 

다른 한편으로 오로지 부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는 사회의 구성원이나 계급들을 살펴보아도 생존이나 육체적 안락이라는 동기는 결코 그처럼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최저한도의 생존조건과는 무관한 환경에서 탄생하여 인간의 제도로 성장했다. 지배적인 동기는 처음부터 부에 대한 시샘과 선망을 낳는 명예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후 발달한 어떤 단계의 문화에서도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만한 지배력을 발휘한 다른 동기는 결코 없었다.

 

  때문에 나의 ‘가난’은 분명 존재할 ‘절대적 가난’에 의해 상쇄되지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윤리’와 종교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 몇 년 전에, 베블런이 지적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즉 ‘차별적 비교’를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그리고 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이 증명하듯이) 그 비교의 화살표는 항상 위로 향해있다.

 

그래서 사회적인 기준에 비추어 자기보다 월등한 계급이나 그 바로 아래 계급과 자기를 비교하는 계급은 거의 없는 반면, 바로 자기보다 바로 한 단계 위의 계급을 시샘하고 따라잡기 위해 경쟁하는 계급은 어디서나 같은 비율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강남에 아파트를 살 확률은 거의 없으면서도 강남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것에 대한 분노는 여전하다. 마치 자신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 가격이 올라 그러지 못했다는 냥.  이러한 분노는 개혁과 변혁을 위한 에너지로 치환되지 못한다. 자신들의 ‘생존수단’이 박탈됨으로 인해 거꾸로 보수화되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 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명제로부터 ‘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베블런의 날카로운 인식은, 마르크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비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을 예고했지만 베블런은 보수화를 예견했던 것이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혁명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억제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간”으로 알려진 인간형이 정상적이고 결정적인 인간성의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라는 베블런의 예견은, 100년 후의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또 생산력이 극대화된 오늘날에도 극단의 현상들이 출현하는 이유를 ‘과시적 소비경쟁’을 통해 명확히 설명하고, 수요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혁명적인 인식 또한 굉장히 놀라운 측면이다(현대의 소비재를 보라. 베블런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명품.... 유행....).

 

개인적 장신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주요목적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것을 착용함(소유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물건의 심미적인 유용성은 그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크게 높아지지도 않고 보편적으로 향상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일반화해보면, 어떤 물건이 우리의 미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 가치를 획득하려면 아름다워야 함과 동시에 비싸야 한다. …… 비싸다는 표시는 비싼 물건이 아름다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습관적으로 비싼 물건을 찾게 되고 아름다움과 명성을 습관적으로 동일시할수록 아름답지만 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게 평가되지 않기에 이른다.

 

생산력 증가 덕분에 좀더 적은 노동으로도 생활수단들을 조달할 수 있게 된 사회의 생산담당자들은 생산속도를 좀더 늦추기 위한 방안보다는 과시적 소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데 정력을 쏟게 된다. 그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고 생산의 긴장도 완화되었지만, 그것이 과시적 소비경쟁을 줄이지도 못하고, 증산된 생산물들도 과시적 소비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전용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표현은 베블런의 의도가 단순히 냉소적 비판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한계급의 특징적인 태도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格率)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제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자연선택의 법칙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틀렸다”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 그런 낡은 생활양식[반동]은 좀더 가까운 과거로부터 계승되고 공인된 낡은 생활양식보다도 당장 절박한 생활환경에 대한 적응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100년 전에 한 젊은 학자가 써내려간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이 책이 보여주는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이 ‘고전’을 무비판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베블런이 말하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는 산업사회나 공동체에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 태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베블런은 개인이 추구하는 ‘경쟁’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배치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엔 ‘경쟁’이 공동체에도 기여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부분은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 아닌가?


  둘째, ‘금전거래가 일상화되고 기계화될수록 기업총수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고 ‘기업총수를 “영혼 없는” 주식회사로 대체하는 경향’, 그리고 ‘유한계급이 담당하는 중대한 기능인 소유(권)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베블런의 장기적 예측은 자본주의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예언인가, 아니면 자본이 지배하는 종말의 한 장면인가?


  셋째, 계급에 대한 정의. 부를 축적한 ‘유한계급’은, 그렇다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가? 유한계급은 세습되는가? 아니면 유전되는가?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유전’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이 책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는 것 같다. ‘격세유전’은 유전이 아니라 오히려 돌연변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경제적인 조건으로만 계급을 살펴보는 것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되지만, 그 계급이 형성된 배경이나 원인을 조명하기는 힘들다.


  넷째, 베블런이 말하는 ‘생산’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가? 그는 직접적으로 재화를 생산하는 행위만을 ‘생산’으로 보고 있다. 만약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산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다면, 베블런의 핵심개념인 ‘과시적 소비’, ‘대리 여가활동’ 또한 심각한 개념적 위기를 맞을 것이다. 만약 한 남자 배우가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생산은 아니더라도 ‘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소비나 여가라고 할 수 없는 행위다. 그리고 재화가 아닌 ‘자본’을 ‘생산’하는 행위는 또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인용 각주도 붙어 있지 않은 이 ‘문화비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등학문의 예속을 이야기하는 이 책의 말미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통찰’이 바로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고전이 2005년에야 제대로 번역이 되었고, 그나마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되어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또 다른 비극이다.

 

  솔직히 읽기가 그리 만만한 책은 아니다. 400페이지의 책이 800페이지처럼 느껴지는, 오랜만의 체험을 했다. 어떤 부분은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이 책은 분명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요상한(?) 출판사에서 고전의 부분만을 발췌해서 책을 마구 찍어내고 있는 모양인데(이게 도서관에도 들어와 있더라), 그런 식으로 고전을 읽는 것보다는 조금은 힘들더라도 전체를 읽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액기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타인이 만들어준 액기스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400페이지 내내 야지를 놓는 그 매력을 더 좋은 번역이 뒷받침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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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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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주의자’라는 단어에 드리운 이미지는 무엇일까? 유약함, 탁상공론, 이상주의자. 아마도 이 세 단어로 정리가 될 듯하다. 실제로 ‘반전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만큼이나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다. 이미 이 세계는 ‘반전’을 이야기할 때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비겁자’들은 어느 때보다 ‘용감한 자’가 되어 있다.

 

우리는 반전주의자들에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네가 하는 말이 옳은 줄은 알아. 하지만 그건 꿈이라구. 현실은 그렇지 않아.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야.’ 이 말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는 외침보다는 ‘전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겠어. 독재가 다 그런 거지.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자신의 견해를 발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은 종종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일종의 자기검열을 행한다.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좋은 전쟁’이었던 세계2차 대전에 폭격수로 직접 참전했던 하워드 진의 이 용감한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금세 불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워드 진이 알리려는 내용이 바로 그 ‘나름의 이유’다. 현대에 벌어진 대부분의 참극은, 그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 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참극을 굳이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참극을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했다는 주장의 실제 효력은 이미 끝난 그 전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쟁들에 미치는 것이다. ……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는 전쟁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켜 줬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전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일단 전쟁이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뒤로는 사고하는 것을 중지한 채 승리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고백대로, 자신이 3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 것과 파시즘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비겁하지 않은 우리가 한 번 답해보자.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시가 일으킨 전쟁도, 하다못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마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절대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한은 그 ‘나름의 이유’로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나름의 이유와 전쟁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군사 행동은 애초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워드 진은 연대와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연대와 불복종이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실례를 들어가며 역설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불복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와 방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하워드 진의 논리에 ‘현실’을 들이대는 것은 결국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는 오늘날의 누군가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태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성격은 그리 고민할 것도 없이 노골적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베블런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이야기하는 불복종의 논리는 무엇인가.

 

시민불복종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법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 법률을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법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실은 때때로 법률을 어김으로써만 공표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법률을 모든 상황에서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을 전능한 국가에 내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국가는 ‘자의적으로만’ 전능하다. 때문에 불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2가지 본질적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권리 행사를 위한 문제가 ‘생명이나 건강, 자유 같이 근본적인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는 ‘불만의 원인을 시정할 수 있는 법적 통로의 불충분함’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작년의 촛불시위야 말로 최근의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직접행동’일 수 있겠는데, 한국 사회는 직접행동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특이한 것 같다. 촛불시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생각 없이’ 혹은 ‘남이 하니까 나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소리를 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왜 나왔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은 논리로 ‘남이 하니까 나는’ 싫었던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었거나.

 

  우리 시대는 죄악을 대량생산하는 데 점점 더 엄청나게 복잡한 분업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뒤이어지는 참사를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 그 기계에 렌치를 던져 작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극적으로 책임이 있다. …… 사회라 불리는 이 왜곡된 자연(자연은 각 종에게 저마다 특수한 필요물을 갖춰준다) 속에서는 간섭 능력이 큰 사람일수록 간섭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필요성은 가장 많이 느끼지만 렌치를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당면한(또는 내일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만 한다(왜 반란이 드문 현상인가는 이로써 설명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빈손보다 뭔가를 약간 더 갖고 있으며 기계를 멈추는데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 사회적 궁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유한 역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자, 이제 가장 민감한 문제인 ‘폭력’이 남아있다. 시민불복종과 폭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사실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하는 말은 모두 부정확한 말이다. ‘그것이 사용되는 정치적, 이념적, 수사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칼과 그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칼이 모두 같은 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또 공권력이라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도 아니고, 무조건 ‘정당한 폭력’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할 때, 소렐의 폭력혁명을 옹호할 수만도 없다. 에이프릴 카터의 말을 들어보자.

 

정치적 가능성과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근거로만 계산한다면 원칙적으로 폭력적, 비폭력적 방식 모두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폭력 또는 비폭력을, 항의운동가 자신과 사회 전체의,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신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행동을 위한 전술적 사고는 이러한 반응과 신념을 고려해야만 한다.

 

사실 폭력의 사용은 그 효용성(?)에 비해 많은 불리함을 떠안고 있다. 카터의 지적대로 대중의 폭력투쟁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부분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로 하여금 자유를 제한하도록 유도하기 쉽고 저항자와 사회전체에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계층, 계급 및 성별 간의 연대도 어렵게 만든다(폭력시위에서 소외되고 마는 여성을 생각해 보았는가? 투쟁을 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도 집단 내에서 ‘안전’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외치며 주장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 그리 현명한 전략적 선택이 아님은 분명하다. 힘 대 힘으로 맞붙는 논리는 ‘힘의 논리’를 비난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면서, 보수유한계급들을 향해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깨끗해야만’ 한다. 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하워드 진은 스페인 내전에 자신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즉 그는 모든 폭력과 전쟁을 뭉뚱그려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너와 나'의 싸움으로 생긴 것이 아니건만, 전쟁옹호론자들은 반전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항상 '너와 나'의 미시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려고 한다. 즉 반전주의자, 비폭력주의자에게 '그럼 내가 너 때릴 거니까 너 가만히 있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는 거다. 그러나 정작 전쟁옹호 자체 논리는 너무나도 거시적이다. 그러니 이건 분명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워드 진이 전쟁과 관련하여 기고했거나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재향군인의 날이 이 따위로 전쟁 찬미의 구실이 되서는 안된다고 실명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그 날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는 전쟁 희생자와 참전 군인들을 양산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맹세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왔다.

 

나로서는 주요한 주장들을 모두 널리 읽고 주의 깊게 경청하긴 했지만, 냉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논평가 행세를 하지는 않겠다.

 

이 책의 미덕은, 하워드 진이 역사학자라는 것에 있다. 폭력과 전쟁은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당위적인 외침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이용하여 전쟁과 폭력의 '맥락'을 훑어간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그 침략이, 공습이, 폭격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무조건 '국가'를 사랑해야하는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애국심은 불한당의 마지막 도피처이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유명한 말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던져야 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벙커에 들어가는 대통령을 보라). 저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지, 왜 위기감을 고조시키려 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희생자가 되기 싫다면.

 

꽤 전에 사놓았던 '폭격의 역사'와 '공습', '국가와 희생'을 함께 읽어봐야겠다. 조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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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 경제 위기의 시대에 경제학이 갖는 의미와 무의미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오승훈 옮김 / 부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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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라는 문구는 클린턴의 선거 운동 본부에 걸려있던 유명한 선전 문구다. 공화당의 경제정책 실패가 큰 빌미가 되어 클린턴은 당선이 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었던 부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지난 대선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좌파정권 청산’, ‘잃어버린 10년’ 따위의 말은,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과 개그)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곁가지에 불과했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도덕성이니 경력이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말 그대로 ‘닥치고 경제’였다(좌파야말로 경제 쪽에 무능력하다는 이미지 또한 ‘닥치고 경제’를 잘 증명해주는 것이다). 경제만 살려준다면야 국밥을 말아먹든 비빔밥을 비벼먹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쪽도 마찬가지. 전 정권의 정책이 어떠했는가를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저 녀석들이 경제를 말아먹었다’라고만 외치면 될 일이었다. 결국 ‘경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경제는, 살아났는가?(‘경제’라는 아이는 항상 죽어가고 있었다. 기억하시는가? 15년 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죽어가는 ‘경제’를 붙들고 살아나라고 울부짖었다)

 

폴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마법의 경제가 왜 사라져버렸는지, 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고 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이 무책임해 보이는 해답에 독자는 당황할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그것이야 말로 제일 ‘덜 위험한’ 답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미국 경제사를 훑어가며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거칠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으리라. ‘경제학과 교수는 고민하고, 정책 기획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폴 크루그먼은 이 고민하지 않는 정책 기획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인데, 폴 크루그먼이 보기에 이들의 학문적 대립은 실제 정부의 경제 정책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일부분 경제학 부문의 학문적 성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하겠지만, 정책 기획가는 경제학 일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저자가 정책 기획가의 의견에 반박할 때, 고도의 수학적 계산이나 어려운 이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저 경제학의 매우 기본적인 개념만 사용하면 된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경제상식’이 모두 오해나 오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단히 증명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세가 미국이 겪는 경제난의 근원이라거나(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조세감면을 외친다), 국가경쟁력(아,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인가)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일견 자유주의자로 보이는 크루그먼은 통화주의자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그 비판은 이 책 117페이지의 각주 5번만으로도 해결이 된다.

 

폴 크레이그 로버츠와 같은 공급 중시론자들의 글에는 묘한 모순점이 있다. 그들은 통화 확대 정책이 경기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으면서도 경기 후퇴는 통화 긴축 때문이라고 거리낌 없이 비난한다.

 

문제는 경제학 교수들의 논쟁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위선죄’이다.

 

요약컨데,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가장 나쁜 죄는 위선죄이다. 그들은 성장을 목표로 내걸고, 성장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떠벌렸지만 사실상 그에 따른 모든 정책은 최소한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바로 정치였다. "It's not the economy but the politics, stupid!"

 

보수주의자들은 소득 이동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기회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의 역사적 이미지, 즉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늘 진실이었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밝혀 놓고 보면, 소득 이동에 대한 사실은 확대되는 불공평이란 거대한 그림에 거의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거대 담론을 좋아하는 그들이, ‘거대한 그림’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데도 특수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왜일까? 정답은 뻔하다. 해답이 없으면서도 해답이 있다고 주장을 할 때 생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표’다.

 

전쟁으로서의 국가 경쟁력이란 신화에 토대를 둔 경제적 수사법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진다. 목표를 국가 안보에 둠으로써 증세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삭감 등 고통스러운 정책을 유권자들이 지지하도록 동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현실의 정치적 성공은 대중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이익에 무작정 호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익을 재정립하고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조절할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서 얻어진다. …… 바꿔 말하자면, 정치란 넓은 의미에서 이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상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폴 크루그먼이 생각하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경제정책에 경제는 없고 정치만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 다만 ‘정부가 국가의 문제 해결(solve)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줄일(diminish)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늘리고, 가용 수단을 최대한 동원하여 빈곤층을 도우면서, 가능한 한 많은 정책 현안에 대해 똑바로 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밖에도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의 허상이 실재하지 않는 ‘전쟁’을 현실로 불러낸다고 경고한다. 또 생각 없는 민영화가 얼마나 큰 파탄을 불러일으키는지 ‘경제학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선 정말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 정부는 ‘열정은 있지만 관심의 부족으로 지금까지의 결과에서 배운 것이 거의 없는 셈’이다(정부는 항상 ‘선진국’을 열창하지만, 정작 선진국이 몸소 보여준 실패사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었던 부분은 QWERTY 이론이 어떻게 국가경쟁력 강화로 왜곡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 부분과, ‘근사 합리적’이라는 개념이었다. ‘근사 합리적’이란 말이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는 합리적 기대학파가 가정하는 ‘인간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합리적 기대학파는 정부의 적자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불황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착각에서 (제대로 된 정보에 의해) 곧 벋어나는 순간 불황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적자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가령 평범한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은연중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보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앞으로 5년 동안 사회 기반 시설에 150억 달러를 투자할 모양이야. 대통령이 말은 안하지만, 자금을 조달하려면 세금을 올릴 수밖에 더 있겠어. 그러니 이제부턴 우리도 월간 예산을 12.36달러 줄여야 돼.”

왜 이 이야기가 우스울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 평범한 가족이 어리석거나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탁월한 보수주의 경제학자라고 해도 가족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점은 이와 같은 노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대충 눈대중으로 얼마를 소비할 것인지 결정하였다면, 정부 지출의 미래적 의미까지를 감안하여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측을 함으로써 대강의 눈대중 셈법을 개선하려고 애써 보아야 그 가족의 결정은 거의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각 가정은 대강의 눈대중만으로도 완전한 합리성을 가진 것만큼이나 잘 해낸다-오히려 완전한 합리성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할 정도이다. 바로 여기서 애컬로프의 위대한 통찰력이 등장한다. 즉 “근사 합리적인” 행동과 완전히 합리적인 행동은 정책에 관한 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경기 침체는 사람들이 감지는 하면서도 완전히 합리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웃긴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꼭 현실 경제와 결부 짓지 않더라도, 일종의 지성사라고 할 수 있을 이 책은 하나의 지적 유희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현실을 떠날 수는 없는 법. 몇 가지 의문점은 남아있다. 그 중에 세 가지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의 주장대로 국가경쟁력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리고 미국경제에 있어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이 주도하는 FTA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그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전쟁들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국내 정세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인가? 둘째, 미국이야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수만으로 힘든 또는 힘든 상황에 들어가 버린 국가들은 저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미 경제의 파탄이 무역국 간의 생산성 차이 혹은 국가경쟁력 차이와 전혀 무관한가? 그렇다면 남미 경제 파탄의 주범은 내수시장인가? 셋째, 생산성의 규정은 어떻게 하는가? 실업률과 생산성의 관계는? 그리고 무균질의 실험실이 아닌 오늘의 현실에서 실업률과 경제성장률의 상관성(아서 오쿤의 법칙)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기계화되는 공장, 고용인원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 서비스업종을 생각해보라)

 

이런 의문점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정치인들이 경제가 문제(point)라고 외치는 반대편에 서서, 정치가 문제(problem)라고 외치는 경제학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 깊다. 그가 말하는 대로, 현실은 아수라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포기-상아탑으로 철수하든가 정책 기획가로 나서든가-를 종용한다. 무엇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매번 이기는데, 정책에 대한 복잡다기한 생각이나 또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가지 답변은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란 사실이다. 훌륭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과에 불평할 권리도 없다.

그러나 훌륭한 생각이 편리한 허튼 생각에 패배하는 일은 앞으로도 흔할 것이다. 그 같은 일이 벌어져도 모든 진지한 경제학자들은 올바른 사고가 결국은 이길 것이라는 신념을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책 기획가들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는 달리, 경제학에 관한 훌륭한 생각은 누적된다. ……

적어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지만, 훌륭한 사상은 영원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350페이지 정도되는 책이지만 글씨가 꽤나 빡빡해서 처음 펼칠 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학에 완전 백지인 나조차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특히나 퀴즈를 하듯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바로 제시한 후, 증명을 하는 방식으로 서술이 되어 있어 그리 지치지 않고 읽을 수가 있다. 폴 크루그먼의 다른 저작과 장준하의 저작, 그리고 스티글리츠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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