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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의 향연 - 경제 위기의 시대에 경제학이 갖는 의미와 무의미
폴 크루그먼 지음, 김이수.오승훈 옮김 / 부키 / 1997년 11월
평점 :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라는 문구는 클린턴의 선거 운동 본부에 걸려있던 유명한 선전 문구다. 공화당의 경제정책 실패가 큰 빌미가 되어 클린턴은 당선이 되었고, 그 반대편에 있었던 부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지난 대선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좌파정권 청산’, ‘잃어버린 10년’ 따위의 말은,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과 개그)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곁가지에 불과했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도덕성이니 경력이니 하는 것 다 집어치우고, 말 그대로 ‘닥치고 경제’였다(좌파야말로 경제 쪽에 무능력하다는 이미지 또한 ‘닥치고 경제’를 잘 증명해주는 것이다). 경제만 살려준다면야 국밥을 말아먹든 비빔밥을 비벼먹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경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쪽도 마찬가지. 전 정권의 정책이 어떠했는가를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저 녀석들이 경제를 말아먹었다’라고만 외치면 될 일이었다. 결국 ‘경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경제는, 살아났는가?(‘경제’라는 아이는 항상 죽어가고 있었다. 기억하시는가? 15년 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죽어가는 ‘경제’를 붙들고 살아나라고 울부짖었다)
폴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마법의 경제가 왜 사라져버렸는지, 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고 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이 무책임해 보이는 해답에 독자는 당황할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그것이야 말로 제일 ‘덜 위험한’ 답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그 이유를 미국 경제사를 훑어가며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거칠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으리라. ‘경제학과 교수는 고민하고, 정책 기획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폴 크루그먼은 이 고민하지 않는 정책 기획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인데, 폴 크루그먼이 보기에 이들의 학문적 대립은 실제 정부의 경제 정책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일부분 경제학 부문의 학문적 성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하겠지만, 정책 기획가는 경제학 일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저자가 정책 기획가의 의견에 반박할 때, 고도의 수학적 계산이나 어려운 이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그저 경제학의 매우 기본적인 개념만 사용하면 된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경제상식’이 모두 오해나 오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단히 증명하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세가 미국이 겪는 경제난의 근원이라거나(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조세감면을 외친다), 국가경쟁력(아,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인가)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일견 자유주의자로 보이는 크루그먼은 통화주의자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그 비판은 이 책 117페이지의 각주 5번만으로도 해결이 된다.
폴 크레이그 로버츠와 같은 공급 중시론자들의 글에는 묘한 모순점이 있다. 그들은 통화 확대 정책이 경기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으면서도 경기 후퇴는 통화 긴축 때문이라고 거리낌 없이 비난한다.
문제는 경제학 교수들의 논쟁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위선죄’이다.
요약컨데, 보수주의자들이 범한 가장 나쁜 죄는 위선죄이다. 그들은 성장을 목표로 내걸고, 성장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떠벌렸지만 사실상 그에 따른 모든 정책은 최소한 아주 조금이라도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바로 정치였다. "It's not the economy but the politics, stupid!"
보수주의자들은 소득 이동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기회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의 역사적 이미지, 즉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늘 진실이었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밝혀 놓고 보면, 소득 이동에 대한 사실은 확대되는 불공평이란 거대한 그림에 거의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거대 담론을 좋아하는 그들이, ‘거대한 그림’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데도 특수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왜일까? 정답은 뻔하다. 해답이 없으면서도 해답이 있다고 주장을 할 때 생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표’다.
전쟁으로서의 국가 경쟁력이란 신화에 토대를 둔 경제적 수사법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진다. 목표를 국가 안보에 둠으로써 증세나 사회 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삭감 등 고통스러운 정책을 유권자들이 지지하도록 동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현실의 정치적 성공은 대중들이 현재 인식하고 있는 이익에 무작정 호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익을 재정립하고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조절할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서 얻어진다. …… 바꿔 말하자면, 정치란 넓은 의미에서 이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상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폴 크루그먼이 생각하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경제정책에 경제는 없고 정치만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해답은 ‘모른다’. 다만 ‘정부가 국가의 문제 해결(solve)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를 줄일(diminish)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산성을 늘리고, 가용 수단을 최대한 동원하여 빈곤층을 도우면서, 가능한 한 많은 정책 현안에 대해 똑바로 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밖에도 세계화와 국가경쟁력의 허상이 실재하지 않는 ‘전쟁’을 현실로 불러낸다고 경고한다. 또 생각 없는 민영화가 얼마나 큰 파탄을 불러일으키는지 ‘경제학적’으로 조곤조곤 설명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선 정말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 정부는 ‘열정은 있지만 관심의 부족으로 지금까지의 결과에서 배운 것이 거의 없는 셈’이다(정부는 항상 ‘선진국’을 열창하지만, 정작 선진국이 몸소 보여준 실패사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었던 부분은 QWERTY 이론이 어떻게 국가경쟁력 강화로 왜곡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 부분과, ‘근사 합리적’이라는 개념이었다. ‘근사 합리적’이란 말이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는 합리적 기대학파가 가정하는 ‘인간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합리적 기대학파는 정부의 적자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불황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착각에서 (제대로 된 정보에 의해) 곧 벋어나는 순간 불황은 자연적으로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적자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가령 평범한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은연중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보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앞으로 5년 동안 사회 기반 시설에 150억 달러를 투자할 모양이야. 대통령이 말은 안하지만, 자금을 조달하려면 세금을 올릴 수밖에 더 있겠어. 그러니 이제부턴 우리도 월간 예산을 12.36달러 줄여야 돼.”
왜 이 이야기가 우스울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 평범한 가족이 어리석거나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탁월한 보수주의 경제학자라고 해도 가족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점은 이와 같은 노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대충 눈대중으로 얼마를 소비할 것인지 결정하였다면, 정부 지출의 미래적 의미까지를 감안하여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측을 함으로써 대강의 눈대중 셈법을 개선하려고 애써 보아야 그 가족의 결정은 거의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각 가정은 대강의 눈대중만으로도 완전한 합리성을 가진 것만큼이나 잘 해낸다-오히려 완전한 합리성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할 정도이다. 바로 여기서 애컬로프의 위대한 통찰력이 등장한다. 즉 “근사 합리적인” 행동과 완전히 합리적인 행동은 정책에 관한 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경기 침체는 사람들이 감지는 하면서도 완전히 합리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웃긴 일일 수 있다.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증거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꼭 현실 경제와 결부 짓지 않더라도, 일종의 지성사라고 할 수 있을 이 책은 하나의 지적 유희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현실을 떠날 수는 없는 법. 몇 가지 의문점은 남아있다. 그 중에 세 가지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의 주장대로 국가경쟁력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리고 미국경제에 있어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이 주도하는 FTA와 경제적 문제로 인해 그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전쟁들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국내 정세를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인가? 둘째, 미국이야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수만으로 힘든 또는 힘든 상황에 들어가 버린 국가들은 저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미 경제의 파탄이 무역국 간의 생산성 차이 혹은 국가경쟁력 차이와 전혀 무관한가? 그렇다면 남미 경제 파탄의 주범은 내수시장인가? 셋째, 생산성의 규정은 어떻게 하는가? 실업률과 생산성의 관계는? 그리고 무균질의 실험실이 아닌 오늘의 현실에서 실업률과 경제성장률의 상관성(아서 오쿤의 법칙)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기계화되는 공장, 고용인원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된 서비스업종을 생각해보라)
이런 의문점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정치인들이 경제가 문제(point)라고 외치는 반대편에 서서, 정치가 문제(problem)라고 외치는 경제학자의 모습은 꽤나 인상 깊다. 그가 말하는 대로, 현실은 아수라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포기-상아탑으로 철수하든가 정책 기획가로 나서든가-를 종용한다. 무엇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매번 이기는데, 정책에 대한 복잡다기한 생각이나 또 사실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 가지 답변은 포기하는 것도 잘못이란 사실이다. 훌륭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그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과에 불평할 권리도 없다.
그러나 훌륭한 생각이 편리한 허튼 생각에 패배하는 일은 앞으로도 흔할 것이다. 그 같은 일이 벌어져도 모든 진지한 경제학자들은 올바른 사고가 결국은 이길 것이라는 신념을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정책 기획가들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는 달리, 경제학에 관한 훌륭한 생각은 누적된다. ……
적어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지만, 훌륭한 사상은 영원하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350페이지 정도되는 책이지만 글씨가 꽤나 빡빡해서 처음 펼칠 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학에 완전 백지인 나조차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가 있었다. 특히나 퀴즈를 하듯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바로 제시한 후, 증명을 하는 방식으로 서술이 되어 있어 그리 지치지 않고 읽을 수가 있다. 폴 크루그먼의 다른 저작과 장준하의 저작, 그리고 스티글리츠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