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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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나쁘다, 제국주의 혹은 미국의 전쟁 사업은 여러 모로 나쁘다.

 

이제 이런 말들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 상식이 실천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식이라는 점이다.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비판 논리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거다.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이 책의 부제)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반전주의가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매우 얇긴 하지만(90쪽 안팎) 큰 판형 때문에 굉장히 애매하게 느껴졌다.

또 만화라고는 하지만 글자가 굉장히 많아서 처음엔 적응이 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애매한(?)' 책에는 운동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구체적 사실들, 역사적 사실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미국 땅을 밟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왜 중요한지 그 이유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얼마전 마이클 무어의 'sicko'도 봤지만, 미국내의 의료시설, 교육시설이 예산부족을 이유로 폐기되거나 사기업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무기를 사고 만들 돈은 넘쳐 난다는 사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다. 만화로서는 흔치 않게 미주가 빼곡히 달려 있고 인용된 말들의 출처가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다는 것.

저항과 연대를 위해서는 구체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 적절한 타이밍에 읽게 된 책.

 

가격도 싸니(정가 6,500원) 한 번 사서 읽어보심도.. ^^;

 

p.s. 표지에 '이 반전 만화를 부시 대통령에게'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이 책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낼 필요는 없다.

읽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가 어디 이런 사실을 몰라서 전쟁을 일으키고 다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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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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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아둔 지는 꽤 된 책인데, 이제서야 꺼내어 읽었다.

사실 이렇게 술술 읽어버릴지는 몰랐는데 정말 피서하는 기분으로 여유있게, 그러면서도 속도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던 책.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역시 '대중적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국문과 출신으로 여러 문인들의 문집을 굉장히 많이 섭렵한 것 같다.

그 바탕에 글쓰는 솜씨까지 더해지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뭔가 가볍지만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독서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특히나 많은 자료들의 출처를 밝혀가며 글을 쓰고, 그 꼭지들을 적절하게 묶어내는 기술(물론 이것은 '편집'의 힘이 크겠지만).

옛사람들과 함께하는 에세이랄까. 여튼 '운치'를 느끼며 하루 정도 피서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도구가 될 것 같다.

문장을 잘게 썰어 쉽게 쓰자는 연습을 계속하는데도 잘 안되는 나로서는, 이 책의 문장이 꽤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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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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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면, 개인적으로 3개 정도의 경험이 생각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한 번은 산림청 관련, 또 한 번은 중국 쪽 관광지 개발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번역한 적이 있다.

둘 다 초벌 번역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부담이 덜하기는 했는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인지라 꽤나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미천한 영어실력 때문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또 한 번은 모 출판사에서 출간될 책을 교정을 본 거였는데, 필자가 재중교포인 까닭에 책을 거의 다시 쓰는 정도의 교정을 봤었다.

물론 마지막 것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그야말로 '번역'해야만 했기에 생각이 나는 것이다.

(몇몇 문장은 정말 일하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_-... 지금 생각할 때 참 어이 없는 것은 내가 받아든 원고가 초고가 아니라 책의 형식으로 인쇄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출판사의 편집자는 뭐하는 사람일까? --;;)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있겠으나, 이 말은 대부분 '원전'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며, 반역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번역이 왕성해야 우리말도 풍부해지고, 우리말이 풍부해져야 세상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으로 육화되는 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적 역량은 향상되고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수준인 우리 번역문화를 진단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 학계의 문제,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갈 수록,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게 될 수록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가의 수입 대리석이나 외제 욕조, 세면기, 홈시어터 따위로 집안에 '돈'을 바르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책으로 집안 장식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읽지도 않는 책을 꽂아놓기만 하는 건 위선 아니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선도 그립다'고 한 김교신의 말을 떠올린다. 김교신은 성경에서 위선자의 표본으로 꼽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비록 자신들이 선을 행하지는 못 할지라도 선을 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 선에서 어그러지는 일을 두렵게 여길 줄은 알았는데 반해, 20세기의 현대인은 '위선을 꺼린 나머지' 공공연하게 불의를 말하고 비례非禮를 행하면 도리어 솔직하고 철저하다는 사회적 칭찬을 받는다고 지적하면서, "오호라, 이제는 위선도 그리운 세대로다"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이다. 2002, 2003, 2004년에는 예산이 15억 원씩 책정되다가 2005년에는 2억이 늘어 17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선저된 과제수는 각각 42건(2002년), 52건(2003년), 52건(2004년)이었다. 2002년부터 3년간 146개 과제가 선정되었으니 해마다 평균 50개 과제 정도가 예산을 지원받는 셈이다. 여기에는 서양 고전 뿐만 아니라 동양 고전까지 포함되어 있다.

  4천 5백만 국민을 위한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있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거다.

그 긴 문장에 주어는 없고, 조사는 멋대로 쓰이고, 접속사는 문맥을 부숴버린다.

원문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 거의 100%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거다. 요새 읽고 있는 책의 한 문장을 보자.

 

노엄 촘스키는 공공연한 반란의 동기들 중에서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에 대한 거부를 올바르게 지적한다.

 

한 번만 읽고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난 문장력이 떨어져서 이 문장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읽고도 원 저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사실 이 표현도 어색하기 그지 없다)이 ~에 대한 거부라? 뭐.. 이건 그렇다 치자.

(공공연한 반란... 도 일단 그냥 넘어가자.)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이 문장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한 것 ->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인가, 아니면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 ->의 편을 드는 것 인가?

(뒤에 이어지는 '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카오스다. -_-)

이렇게 되면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원전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원문의 문장 구조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번역'이라면 한글을 읽는 독자들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건 문학작품의 번역도 아니지 않은가.

 

번역이 정말 어려운 일인 반면에,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턱없이 부족한 일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책을 산 독자의 입장에서는, 울컥하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의무까진 없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직접 번역을 하고 있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또 인터넷 서점의 회원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리스트에 담긴 책을 구매하는 애서가의 입장에서. (아.. 동료애가 느껴진다. ㅎㅎ)

이 책은 읽기 쉽고 깔끔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문제를 종종 느꼈다면. 분명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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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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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아렌트를 한 번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읽기 시작했던 책.

한나 아렌트는 이 소고에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의문은 맑스를 추종한다는 지식인들의 오해에 대한 질문이다. (1장 진보의 역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 폭력의 새로운 전도자들이 맑스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불일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왜 그들은 사실의 전개를 통해 잘못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자신의 정치 운동과도 조화되지 않는 개념과 원리에 대해 그렇게 완고한 고집을 갖고 집착하는가에 있다.

 

두 번째 의문은 '폭력'의 정의에 관한 의문이다. (2장 폭력과 권력)

 

내 생각에, 정치과학의 현재 상태에 대한 차라리 유감스러운 성찰은 우리의 전문 용어법이 '권력power', '강성strength', '강제력force', '권위authority',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과 같은 핵심단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며 권력은 우수한 수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조직화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마오쩌뚱을 패러디 한 밑의 말로 요약될 수 있겠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폭력적으로 치닫는 권력은 오히려 권력 약화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의 상실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일으킨다는 것.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권력과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3장(폭력의 본성)에서는 폭력이 과연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폭력은 '이성적'으로 행사되었고 분노 없는 폭력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프리모 레비가 번뜩였다.)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

 

군인들은, 누군가 계속해서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살인자가 아니며, 살인자들-'개인적 공격성'을 갖고 있는 자들-은 아마 훌륭한 군인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2장, 3장으로 가면서 논의가 더욱 심화되고 더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하긴.. 1장은 이 책이 발간될 무렵 꽤 많은 논란이 되었을 법 하다. 사르트르와 프란츠 파농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와는 별개로, 가장 공감이 가던 부분은 이 세 부분.

 

나는 동물학자들의 많은 연구작업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일부 동물이 인간처럼 행위하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종종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이 집단적 텃세 습성을 가진 종種들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는 것을 승인하도록"-차라리 그 반대로, 어떤 동물 종種이 인간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가 아니라-요청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동물심리학에서 모든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을 "제거"한 후에(실제로 성공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제 "인간이 얼마나 '반인반수半人半獸인지"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가?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성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말하자면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실행 가능한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며, 그 범죄의 거대한 규모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대한 가장 탁월한 변명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그 스스로가 점차 그 힘을 잃고 있다는 증거라는 그의 분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엔 여전히 답답함을 떨칠 수 없다. 모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실에서 다시 모호해진달까.

저 폭력적인 이명박 정권이 실제로 권력을 '잃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너무 비관적인가?)

낮은 지지도와 권력의 힘이 줄어드는 것. 이 둘이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현실이 그저 내가 눈이 나쁜 탓일까.

물론 권력 상실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프란츠 파농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본문이 12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한나 아렌트의 글이 원래 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건 번역의 탓도 있는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내가, 번역을 읽으면서 영문 구조가 보일 정도니 -_-...

쉼표를 쓰는 것을 뜻을 명확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흐름을 턱턱 끊어놓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어대고 거기에 또 너무 많은 줄표를 사용하는데,

번역할 때야 명확해지기는 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이 책 제목이 '폭력의 세기'인데, 원제는 'On Violence'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투박하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책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그냥 '폭력에 대하여' 정도록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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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마녀 사냥
브라이언 P. 르박 지음, 김동순 옮김 / 소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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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사냥. 이젠 이 용어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하나의 관용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 사냥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정작 많지 않다.

이 책은 마녀 사냥에 관한 일종의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유럽을 이야기할 때 마녀 사냥은 빼놓을 수 없는 문제지만, 이 책의 필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이 책의 특징은 한 가지 주장을 결코 단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는 듯 하다가 결국에는 주저한다.

그만큼 마녀 사냥이란 주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저자가 아주 조심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던 것은, 매장마다 '단언할 수 없다',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등의 표현으로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담박 떠올랐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 짜여진 저자의 논리체계에 복잡하다는 마녀 사냥을 집어 넣어 단순한 결론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르박이 강조하는 키워드는 1대1로 매치가 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마녀술 - 악마숭배, 중앙정부 - 지방사법기관, 엄격한 사법처리 절차 - 고문, 유도심문 등의 사용, 종교적 열정 - 이성적, 회의적 사고

 

이렇게 대비되는 요소들이 마녀 사냥의 확대 및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르박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법제도'다. 현대의 마녀 사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사법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의 분석에 크게 반대하는 바는 아니지만, 애초에 그가 꺼냈던 화두-마녀 사냥은 지역, 시대에 따라 너무나 복잡한 문제라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화된 도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앞서 그가 주저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학문적 가장'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 밖에 마녀들이 당시 사회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은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이므로 생략.)

 

어쨌거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국보법' 같은 것들이 생각났는데, 마침 르박도 거기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1678년 교황의 반란 음모에 경악한 영국인이나, 1919~1920년 그리고 1947~1954년의 미국 시민이 겪은 적색 공포처럼, 촌락민과 도시인은 이웃 가운데 점차 많은 사람이 심지어 지배층까지 마녀로 고발되자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즉 가장 가까운 친구나 이웃이 마녀일지 모르고, 사회가 완전히 악마의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며,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마녀로 고발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빨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국보법을 들이대서 모 단체와 모 교수에게 딴지를 걸었다가 법원에서 퇴짜를 맞은 사건을 알고 계시는지?

저들의 목적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아직 빨갱이가 너네 주위에 있다는 걸 알아둬!'

고소가 기각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레드바이러스가 아직도 주변에 맴돌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할 뿐.

(거기에다, '빨갱이가 대학교수까지 하고 있었다니!'라는 충격!)

지목되면 부정해야하고 부정하지 않으면 처벌 받는, 이 프레임 자체를 깨부수어야 한다.

국보법 철폐가 바로 그 시작이다.

 

마녀 사냥에 관련된 사법 절차는 모두 임시로 긴급하게, 그리고 예외적으로 마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회를 '정화'한다는 엄숙한 사명하에 '잔인하게',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마녀와 그들의 의식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녀가 아니라 마녀를 처벌한 종교인, 사법관들이었다.

어떤가. 임시 법안 국보법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빨갱이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극우보수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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