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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ㅣ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말로만 듣던 아렌트를 한 번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읽기 시작했던 책.
한나 아렌트는 이 소고에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의문은 맑스를 추종한다는 지식인들의 오해에 대한 질문이다. (1장 진보의 역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 폭력의 새로운 전도자들이 맑스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불일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왜 그들은 사실의 전개를 통해 잘못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자신의 정치 운동과도 조화되지 않는 개념과 원리에 대해 그렇게 완고한 고집을 갖고 집착하는가에 있다.
두 번째 의문은 '폭력'의 정의에 관한 의문이다. (2장 폭력과 권력)
내 생각에, 정치과학의 현재 상태에 대한 차라리 유감스러운 성찰은 우리의 전문 용어법이 '권력power', '강성strength', '강제력force', '권위authority',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과 같은 핵심단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며 권력은 우수한 수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조직화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마오쩌뚱을 패러디 한 밑의 말로 요약될 수 있겠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폭력적으로 치닫는 권력은 오히려 권력 약화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의 상실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일으킨다는 것.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권력과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3장(폭력의 본성)에서는 폭력이 과연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폭력은 '이성적'으로 행사되었고 분노 없는 폭력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프리모 레비가 번뜩였다.)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
군인들은, 누군가 계속해서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살인자가 아니며, 살인자들-'개인적 공격성'을 갖고 있는 자들-은 아마 훌륭한 군인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2장, 3장으로 가면서 논의가 더욱 심화되고 더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하긴.. 1장은 이 책이 발간될 무렵 꽤 많은 논란이 되었을 법 하다. 사르트르와 프란츠 파농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와는 별개로, 가장 공감이 가던 부분은 이 세 부분.
나는 동물학자들의 많은 연구작업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일부 동물이 인간처럼 행위하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종종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이 집단적 텃세 습성을 가진 종種들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는 것을 승인하도록"-차라리 그 반대로, 어떤 동물 종種이 인간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가 아니라-요청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동물심리학에서 모든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을 "제거"한 후에(실제로 성공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제 "인간이 얼마나 '반인반수半人半獸인지"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가?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성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말하자면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실행 가능한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며, 그 범죄의 거대한 규모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대한 가장 탁월한 변명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그 스스로가 점차 그 힘을 잃고 있다는 증거라는 그의 분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엔 여전히 답답함을 떨칠 수 없다. 모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실에서 다시 모호해진달까.
저 폭력적인 이명박 정권이 실제로 권력을 '잃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너무 비관적인가?)
낮은 지지도와 권력의 힘이 줄어드는 것. 이 둘이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현실이 그저 내가 눈이 나쁜 탓일까.
물론 권력 상실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프란츠 파농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본문이 12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한나 아렌트의 글이 원래 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건 번역의 탓도 있는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내가, 번역을 읽으면서 영문 구조가 보일 정도니 -_-...
쉼표를 쓰는 것을 뜻을 명확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흐름을 턱턱 끊어놓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어대고 거기에 또 너무 많은 줄표를 사용하는데,
번역할 때야 명확해지기는 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이 책 제목이 '폭력의 세기'인데, 원제는 'On Violence'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투박하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책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그냥 '폭력에 대하여' 정도록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