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나라, 브라질 빠우-브라질 총서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창민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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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래의 나라, 브라질은 무엇보다 재미를 보장하는 책이다. 츠바이크는 브라질의 짧지만 역동적인 역사부터 경제, 문화, 도시를 훑으면서 남미에 큰 관심이 없던 나 같은 사람까지도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아들인다. 내가 브라질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축구, 삼바, 커피, 포르투갈 정도였다. 이 책은 그런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문학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 책의 뭉뚱그림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나 각주를 중요하게 여기는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뭉뚱그림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브라질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에게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부 사실의 나열보다는 전체 흐름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허나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으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츠바이크의 미래인 현재, 지금의 브라질을 과연 미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정치, 경제, 사회의 소식을 생각할 때 미래의 나라라는 표현은 너무 아득하다. 여행에 관심과 경험이 많은 사람들조차 브라질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하는 곳이다. 신문의 경제면에선 몇 년 전과 달리 브라질 경제를 침체나 위기로 표현한다. 심지어 한 때 라틴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좌파의 희망처럼 보였던 룰라 전 대통령은 위기에 몰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우리는 이 텍스트를 20세기 전반기 유럽인이 찍은 브라질의 스냅샷으로 읽을 수 있다. 당시의 유럽인이 보는 브라질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살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역으로, 당시의 유럽인이 브라질을 통해 보았던 유럽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츠바이크가 이 책 곳곳에서 보여주는 문명이나 진보에 대한 성찰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해 동안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문명''문화'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는 '문명''문화'를 흔히 생각하듯 '조직화''안락함'이라는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치명적인 오류를 가장 많이 조장한 것은 통계다. 통계는 기계적 지식으로서, 한 나라에서 국민의 부가 얼마나 증가했고, 개인의 수입은 어떻고, 자동차와 욕실, 라디오 수신기는 평균 보급률은 얼마이고, 보험료는 얼마나 되는지 계산한다. 이런 지표에 따르면, 가장 문화적이고 문명화된 국민은 생산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하고, 가장 소비를 많이 하고, 개인당 자산이 가장 많은 국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표들은 정작 중요한 요소를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화와 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척도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가장 완벽한 조직이라도 몇몇 국가들이 가장 완벽한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류를 위해 활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야만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현실을 우리는 보아 왔다. (21)

 

츠바이크가 브라질의 밝은 면만 과장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살육을 체계적으로 자행하던 유럽에 좌절한 츠바이크의 입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이 텍스트가 중요한 까닭은, 그의 글이 우리가 잊었던 상상력의 중요함을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단의 상황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자극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보는 그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이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보석이다. 다음의 글을 보라. 굳이 브라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니던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상을 실현한 지상낙원의 사례가 아니라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나 신념이 아닐까?

 

브라질에서는 시간보다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 (181)

 

아주 근래 몇 년간의 경험을 보았을 때 그저 조바심과 열망이 부족한 것을, 다시 말해, 진보를 위해 서두르지 않는 것을 단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브라질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평화로운 삶이 과장되고 과열된 역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184)

 

끝 모를 자본주의의 시대는 우리가 이 사회를 이라고 명명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만 같은,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이 시대는 실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츠바이크의 브라질과 현재 브라질 사이의 간극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상상력을 준다. 현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역사가 없는 사람, 혹은 많이 양보해서, 아주 근래의 역사만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더 브라질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170)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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