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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고,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행위가 마지막에 '쓰다'에 도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읽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뛰어난 문장가도 아니면서, 그럴듯한 시나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쓴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도 쓰고, 모두가 보는 곳에도 쓴다. 쓰고서야 이해한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방금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힘들었는지, 왜 그때 그 사람은 그랬는지, 왜 그때 나는 그랬는지. 쓰고 나서야 희뿌연 사태는 또렷해진다.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59~260쪽)
6년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많이도 우셨다.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아니어서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고, 어머니의 평소 태도나 말씀들을 생각하면 슬픈 것과는 별개로 차분하실 줄만 알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어머니께선 그때 그렇게 많이 울었던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상복을 입고 눈물 흘리고 있는 자신이 또 한 번 슬펐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객관화'라고 하면 감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이성적인 시각을 앞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때로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할 때도 있다. 나는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글쟁이'들의 오버가 눈꼴실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될 수도 있는 것들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들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상황에서 펜을 잡아야만 했던 박완서 작가의 예를 본다면, 그 힘은 무엇보다 자기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일 때에야 비로소 좋은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 책은 10년차 카피라이터의 성실한 기록이다. 서문부터 자백하고 있듯이, 저자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하지만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느끼고, 살았다. 그리하여 결국엔, 아니, 그리하였기 때문에, 자기 삶의 기록이 오롯이 몸에 남게 되었다.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 열망.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뭔가를 배울 때의 나는 확실히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기어이 짬을 내서 배우러 달려간다. 그러니 나에게 '배운다'라는 말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장밋빛 현재를 위한 말이 된다. (209쪽)
물론 육체의 지중해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유혹한다. 끊임없이 그곳으로 오라 손짓한다. 반면에 정신의 지중해는 나를 지금 이곳에 살게 한다. 내 마음가짐에 따라 이곳이 지중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바람이 불고, 달이 뜨고,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그 모든 아름다움이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가, 나의 지중해다. (92쪽)
미래에 현재를 담보잡히지 않고 꿋꿋이 뚜벅뚜벅 현재를 살아내는 이의 기록은, 그 특유의 부족한 기억력과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저자는 평소에도 자신의 몸에 새겨진 모호한 기록을 수시로 꺼내어 되새김질 하며 곱씹고 또 곱씹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만 것이다. 책 속에 수록된 수많은 사례들이 특별해보이는 것은, 작가의 행운도 아니고 작가의 과장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알량한 기억력을 믿지 못하는 자의 진지한 되새김질이자, 몸에 기록된 것을 훈장이나 복권으로 삼지 않고 끊임없이 소박한 현재로 소환해내는 작가만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내 머리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좋아하는 음악 앞에선 기꺼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에도 그 줄거리나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그 책을 떠올리면 심장의 어떤 부분이 찌릿한 것은 내 몸에 그 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7~8쪽)
또 기꺼이 울 것이다. 아니, 아무리 참으려 해도 또 눈물은 터져나올 것이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인사>에 울었을 때에도, 커서 직접 들은 <사랑의 인사>에 또 울었을 때에도, 바흐 <샤콘느>를 들으며 울었을 때에도 눈물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나는 알았다. 좋아서, 행복해서 울어본 경험을 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넘치도록 그런 경험을 해본 나는, 정경화를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행복하다. (140쪽)
이렇게 바지런하게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의 기록을 보다보면 지칠 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대체 난 뭘하고 있나하는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이 책은 나에게 그렇게 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는 점을 넌지시 알려준다. 우리 모두가 지중해에 있다는 그 사실을.
문득문득 선생님의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계속했으니까 안 거다.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안 거다. 지치지 않았으니까 그 열매를 맛본 거다. 지쳐도 계속했으니까 그 순간의 단맛을 볼 수 있었던 거다. (220쪽)
다른 의미에서 지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을 위해 매일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요일을 자연스레 내 몸에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강박이나 의무가 아니라 즐겁게. 뭐, 이 정도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낸 바로 그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