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에밀 뒤르켐의 유명한 책, '자살론'과 같은 제목의 책이다. 하지만 부제인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건조한 사회학적 분석만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대체 왜 자살하는가에 주목한다기 보다는 사회가 자살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있는 자, 이 책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자살 생존자'들은 자살을 "삶의 실패"로 받아들인다.
자살자에게는 빈소를 차려 장례를 치러주지도 무덤을 만들어주지도 않았던 것은 산 자들의 '보복'이라 할 수도 있다. 자살은 저항이거나 일탈, 죄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통계청과 경찰청의 자살률 통계가 차이 나는 것으로 현상한다. 사람들은 사망 신고서에 자살한 자기 가족의 사망 원인을 허위로 기재한다. 자살은 죽은 자에게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삶의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34쪽)
그러나 과연 자살이 삶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야말로 삶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아닐까?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 불가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살이 사회문제라는 것은 이젠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표현 등에 우린 이미 익숙해졌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자살률이 아니라(물론 자살률이 높다는 건 분명 사회문제다. 하지만) 그 자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과연 우리 사회, 혹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살이 문제라는 걸 모르고 있을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살아있는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른 척할 뿐이다. 그리고는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놀라는 것이다. 이 기만을 까발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이 "왜 죽었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자살의 이유로 무엇을 꼽고 있는가를 건조하게 분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 원인의 카테고리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주로 조선시대와 식민지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특히 식민지기 일제의 자살 원인 분류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 분류 자체가 상당히 작위적이고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자살이 '문명화 정도'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에 이르면, 이 작위성은 극에 달한다.
식민지 경찰이 파악한 자살 '원인'의 '실상'은 과연 무엇일까? 이 '원인'을 자살자가 처한 '문제상황'과 죽음의 '맥락'에 대한 식민권력의 표현이라 이해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자살의 식민지 근대'를 둘러싼 문화정치를 살펴볼 수 있다. (199쪽)
1927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인구현상>은 자살자 수의 증가를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했다. "조선의 자살 비율이 내지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것은, 민족성 문제가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주로 양자의 사회 상태의 도달한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194~195쪽)
또 하나,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은 경제 지표를 자.살과 연결시킬 때 수없이 저지르는 부주의에 대한 것이다. 자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며 여러가지 요소와 관계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서 수치와 지표를 들이대다보면, 엄청난 오류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살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이런 오류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실업과 자살의 연관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실업이 개인에게 경제력과 경제적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박탈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자아존중감과 가족 등 타자들과의 관계를 크게 훼손할 수 있기에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는 방식의 담화일 것이다. 즉 자살 유발요인과 문제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실업'이 의미 있지, 실업'률'과 자살'률'의 관계에 대한 설명 따위는 사회의 누구에게도 무의미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214쪽)
아쉬운 점은 책의 결정적인 부분마다 애매하게 처리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제를 다루면서 어찌 쉽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냐만, 그래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
'분'을 이길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 다시 말해 '분을 못 이겨' 제 목숨이나 남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정동이, 합리적이고 절차가 차갑고 지루한 법과 제도의 과정으로 대체되게끔 하는 과정과 근대화 · 문명화가 긴히 관련된다고 해도 좋을까? (82쪽)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되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과거에는 '분사'가 많았다는 것, 혹은 분사로 여겨지는 죽음이 많았다는 것 정도다. 위 추정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흥미로운 추정이지만 갑자기 몇 단계를 뛰어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최근 읽은 책 중에 머리말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은 자살에 대한 저자의 진심어린 고민의 결과물이다. "자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 따위를 운운하는 천박함에 맞선, 성의있는 때로는 분노가 어린 고민의 결과다. 앞으로도 많은 논의들이 진행되어서 "생 자체를 포함한 제대로 된 삶"을 만들길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포스팅 제목에 "자살"을 치니 "생명은 소중합니다! 지금, 희망을 클릭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자살예방센터 등등의 전화번호가 뜬다(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살자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자살을 택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자살을 왜 예방하려는 걸까? 우리 사회가 과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자살 방지라는 차원에서의 캠페인이나 행정적 처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욱 다양한 '자살론'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애초부터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을, "생명이 소중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소중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와 인식이야말로 자.살을 예방(?)하는 지름길이란 걸 당신은 정말 모르냐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또 한 명의 노동자를 생각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
사족. '자살'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되어 있으니 아예 포스팅이 안 된단다(네이버 블로그). 웃기는 일이다. 이런 식이니 뭐가 나아질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