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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ㅣ 평화 발자국 9
김수박 지음 / 보리 / 2012년 4월
평점 :
다른 사람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일이 아닌데다가, 듣기 불편한 이야기에는 고개돌려버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처음엔 귀담아 듣다가도 반복되고 반복될 수록 귀를 막거나 눈을 돌리거나 피해버린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의 불행에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눈물 흘리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하소연이 단순한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범법과 탈법에 의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그것으로 인해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면 더더욱. 그래서 때로는 듣기 괴롭더라도 더 자세히, 더 상세히 듣고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국민기업'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를 만들다 백혈병이나 암에 걸린 이가 150명이 넘는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건 음모론보다도 더 황당무계한 일이다. 현장에는 이런 심각한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화학약품들이 넘쳐나고, 근로조건에는 반도체를 위한 청결수칙만 존재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가능성은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하지만 국민기업 삼성이 언제나 그래왔듯, 그들은 법의 망을 피해간다. 아니 이제 그들은 법의 망을 직접 잡고 뒤흔들고 있다. 대체, 왜, 삼성이 국민기업인가?
나는 삼성이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적이 없는데...... 게다가 나 같은 사람들은 삼성 제품이 마음에 들면 돈을 주고 사는 소비자인데, 장사꾼이 손님한테 '우리 가게 망하면 당신들한테도 좋지 않아.'하고 말하는 거 아닌가? 흔히들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손님한테 협박하는 장사꾼도 있나?
지금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삼성이 아무리 엄청난 기업이라 해도 장사하는 주체일 뿐이지 누구를 지배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모르는 소리 그만 하라고요? (128~129쪽)
이 책은 삼성에서 20대 초반의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인지상정이라고 했던가. 말 그대로 '인간이라면' 젊은 딸이 차 뒷자석에서 죽어가던 모습을 봐야했던, 죽은 딸을 태우고 펑펑 울며 운전하고 돌아가야 했던 한 아비에게 "삼성이... 이렇게 큰 회사가, 사람이 몇 사람 죽었다고..." 따위의 말을 지껄일 수는 없는 거다. 큰 회사면,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무 상관 없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할 거다. "애플도 중국공장에서..." 이런 식의 물타기. 좋다. 그럼 당신도 '잘못된 점'은 분명 알고 있는 거니까, 당신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대로 사시라. 내가 삼성 제품 하나 안산다고 당장 뭐가 바뀌는 게 아니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최소한의 '나'를 지키는 마지노 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소비자로서 최소한의 권리이기도 하다. 삼성에 취직해 있는 사람들 모두를 악마처럼 여기겠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냥 삼성 제품 안쓴다고 내가 죽는 것도 아니고, 삼성이라는 기업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제품을 최대한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다짐이 애국적이지 않다거나 뭣모르는 어린 소리라고 비난 받는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내 심보가 아주 못된 심본가 봐.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 약해서. 꽃이 있잖아요. 이게 피어나면 보기는 이쁜데 향이 없어요, 향이...... 이 꽃이 질 때쯤 되면 최고의 향이 나거든. 사람도 똑같애. 애들 때는, 한창 클 때는 인간미가 없거든. 그냥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할 때는 인간미가 좀 없지. 사람은 나이가 먹을수록, 늙을수록 사람 냄새가 나는 거야. 그 나이 먹으면 사람으로서는 향이 아주 한창 날 때 아니겠어? 인간으로서 향이 아주 한창 나는 나이라구. 근데 사람 냄새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나이가 좀 먹으면...... 다른 사람이 좀 안되어 보이면 마음이 편치 않아. 그게 인간미야. 그 사람이 뭐라고 하면, 귀를 기울여야 돼. 안 들어주면 내가 불편해서 못 배겨. 그게 사람에 대한 예의잖아, 그게. 자기 회사에서 사람이 죽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있잖아. 게다가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밥 얻어먹겠다고, 먹고살겠다고, 유지하고 싶어서 그걸 또 떠받들잖아. 똑같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도.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잖아. 지네도 만약에 인간미가 있다면......, 얘기해야 돼. 이건 아니라고. 항상 뭐든지 맛이 있잖아. 맛과 향이...... 이 송이도 맛과 향이 있잖아.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맛과 향이 나야 돼. 맛과 향...... (113~114쪽)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사람냄새"다. 그런데 이 책을 광고하려고 하자 매체들은 광고 문구에서 '삼성'을 빼줄 것을 요구했다 한다. 출판사는 거부했고, 그래서 이 책은 광고를 타지 못했다. 네이버 책 검색에서도 '사람냄새'라고만 제목이 뜰 뿐이다.
이 책의 수익금과 작가 인세 일부는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단체, 반올림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책을 사서 읽으시길 권한다. 이 책에서 얘기되는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대한민국의 99%는 삼성이 아니고 이건희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