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평점 :
역사서(?)에서 나름 인기있는 분야가 바로 이런 종류의 책이다. '문화사' 혹은 '사회사', '미시사' 등의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책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사람 냄새나는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위대한 삶이란 공적인 생활에 해당되는 것이고, 일상에서 말하는 성공한 삶이란 사생활에 해당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이니 인격적 완성이니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공적인 삶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독립운동가니, 위대한 과학자니 하는 것은 인격적 완성의 궁극적 모습이 아니라 본받을 만한 공적인 생활의 전범일 뿐이다. 인문학의 현대적 가치가 물질 만능주의에 맞서 훼손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떳떳이 주장하려면 인문학은 더 이상 사생활을 감춰둬서는 안된다. (345쪽)
하지만 그래서 이 책이 '훼손된 인간성의 회복'에 기여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 대단한 목적을 달성조차 하고 있지 못하며, 애초에 '인문학'이라는 말을 끌어들일만큼의 수준도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인문학'이 하나의 학문임을 완전히 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학문에서 사람 냄새가 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사회를 연구하는 인문학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 냄새'라는 것이 학문적 엄격함과 정밀성을 놓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사람 냄새 나는 무언가는 될지 몰라도 절대 '인문학'이 될 수 없다. 굉장히 보수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학문으로서 갖춰야할 최소한의 소양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 책은 그 최소한의 소양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많은 자료를 읽어내는 성실함이나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는 지적 호기심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편의 좋은 글이나 좋은 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인문학적 성취'는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 안동에서 일어난 순사 살인 사건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뒤, 마무리하는 단락을 보라.
국가 간 힘의 우열은 분명히 존재한다. 적어도 자기 나라 안에서는 부유하고 힘 있는 나라 사람이 가난한 나라 사람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유하고 힘 있는 나라의 관리나 백성이 가난한 나라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다는 보장은 없다.
부유하고 힘 있는 나라에서 기죽지 말아야 하듯, 가난하고 힘 없는 나라를 깔보지 말아야 한다. 이 땅에서 더 이상 가와카미 순사 같은 운명을 맞는 외국인이 나타나서는 안되고, 우리나라 사람이 남의 나라에 가서 사와카미 순사 같은 운명을 맞아서도 안된다. 이웃이든 이웃 나라든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 (78~79쪽)
왜 이 사건을 생생하게 재현한 것인가? 이웃사랑 실천을 설파하기 위해? 빚쟁이 윤택영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단락은 어떤가?
오늘날 신용불량자의 숫자는 4백만에 달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대책 없이 빚을 진 사람도 적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화점과 술집에는 일단 긋고 보자는 '묻지마 카드족'이 넘쳐 난다. 돈이 필요한데 없으면 빌려야 한다. 하지만 빌리기 전에 먼저 갚을 궁리부터 해야 한다. '빚진 돈'은 분명 '내 돈'이 아니다.
현재의 쾌락을 위해 미래를 좀벅지 말자. 명품 가방이 눈앞에 어른거리거든 '황제의 장인' 윤택영 후작의 비참한 도주 행각과 쓸쓸한 최후를 생각하자. 지금 당장 빚을 줄이자. (219쪽)
이쯤되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왜 이렇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역사'와 '인문학'을 들먹거리며 이야기하게 되는 걸까?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왜?'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왜 이 사건, 이 시대, 이 인물이 연구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마냥 사람냄새 난다고 달려들 일이라면, 굳이 보기도 힘든 옛 신문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저자의 말대로 살인 사건은 오늘 어디에서나 계속 일어나고, 빚쟁이는 여전히 넘쳐난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봐도 될 일이다. 살인사건을 살펴봤다면, 왜 일제강점기의 살인사건인 건지, 그것을 통해서 어떤 특수성과 보편성을 엿볼 수 있는지를 명확히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인문학'이 아니라 그냥 뒷담화일 뿐이다.
사소해보이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조명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독자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그것이 왜 사소하지 않고 눈여겨 볼만한 일인가를. 인문'학자'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수준 낮은 '훈계'를 하는 꼰대가 아니다. 우리가 그 훈계와 교훈을 몰라서 굳이 돈을 주고 책을 사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시대에 대한 '디테일'을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서'라는 타이틀과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디테일'은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든다. 대중서라고 해서 꼭 이렇게만 써야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