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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여기 대학살이 있다. 몇 명이 죽어야 '대'학살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몇 명이 죽어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수 있을까? 1915년부터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다룬 이 만화책 <메즈 예게른(대재앙)>은 이런 질문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150만 명. 자그마치 150만 명이 죽었다. 폭탄 하나가 뚝 떨어져 한 방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아니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한 명 한 명이 "지구 상의 모든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잔혹한 경험들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잊혀진다는 것조차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히틀러가 어찌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억하는가?"
파울로 코시는 이 참혹한 사건을 뛰어난 자제력으로 독자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얼핏 이상한 말일 수도 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자세히 묘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잔인함의 디테일'에 빠져버리면, 왜 이 참상을 기록하는지에 대한 것을 잊기가 쉽다. 비록 작가가 잊지 않았다 할지라도, 독자가 잊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애초에 그의 그림체가 잔혹함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하겠으나, 어쨌거나 '내가 왜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만화의 강점을 놓치지 않는다. 주제를 해치지 않는 플롯을 자연스레 연결시키고, 통계와 글자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 뜨거운 무엇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자, 이미지의 힘이다. 이런 힘을 굳이 역사서술에 연결시키자면, 현장감 넘치고 인상깊은 서술이 '역사학'에도 분명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여겨져야만 할 것이다.
미메시스에서 출판하는 책들은 원래 개인적으로 꽤 신뢰하는데다가, 번역자인 이현경 씨는 쁘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보여준 훌륭한 번역을 한 분으로 또 한 번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더해주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번역한 이 두 권의 책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또 결국은 자살이라는 슬픈 선택을 했던 쁘리모 레비의 고뇌도 이 두 책을 관통하고 있다. 과연 이 학살은 앞으로도 계속될 인간의 본능일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한 개인이 생각하기엔 너무나 큰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한 개인의 고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답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뇌를 위해서는 앎과 느낌이 필수다. 이 책은 그 두 가지를 제공한다. 매우 쉬운 방식으로.
앞으로 이런 일들이 '대재앙'으로 불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재앙'의 사전적 의미인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로 불려서는 안된다. 이것은 학살이다. 문제를 직시할 때만이 일말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