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보 세대가 지배한다 - 2040세대의 한국 사회 주류 선언
유창오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0월
평점 :
최근 '나꼼수'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용민이 '20대 개새끼론'을 이야기했던 것을 포함해, 나는 '세대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로 명확하게 증명되기가 힘들뿐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이로 폭력적인 규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많을수록 보수화된다는 일반론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특정 세대를 부각시키는 담론엔 거부감이 먼저 든다. 생각해보라. X세대, Y세대 등등. 그 수많은 세대들은 다 어디갔는가?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세대담론은 허무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이번 두 차례의 선거에서 보듯, 세대가 정치의 판도를 결정한 요인 중 하나임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그 이유다. 20~40대의 세대들이 '진보세대'로 규정될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저자는 우선 기존의 선거판도를 비교하며 이제까지 정치판을 좌지우지해온 지역주의가 와해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아직까지 유요하기는 하지만 지역주의의 프레임에 잘 대응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와해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역주의는 실제로 존재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보수 세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역 구도는 기본적으로 보수 진영에 유리한 전략으로 결코 보수 세력에 의해 해체될 리 없다. 게다가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지역주의를 만들어 낸 보수 세력이 의도한 틀에 갇히게 된다. (240쪽)
그와 더불어 젊은 세대들이 선거의 판도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부상하고 있는지도 증거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가 이런 설명과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진보가 소수파가 아닌 다수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스스로를 급진 진보 내지 좌파로 규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들 가운데는 진보적 신념 때문에 사회에서 소수파가 되는 것을 감수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소수파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소수파가 되기 위해 좀 더 진보적인 신념을 가지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소수파도 많았다. 그들에게 진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9쪽)
진보가 다수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프레임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것은 중도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대표적인 기준인 경제정책에서의 성장과 분배, 대북정책에서의 대화와 압박에 대한 답은 대체로 양분되어 있다. 중도가 무려 44%인데 왜 이런 모순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조사 방식의 차이다. 막연히 자신의 주관적 이념 성향을 선택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중도를 택하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반면에 특정 사안에 대해 입장을 물어보면 대체로 진보 아니면 보수의 답으로 양분되고, 중도층의 비율은 확연히 줄어든다. (246쪽)
실제로 중도는 조사되는 수치만큼 다수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중도가 많다고 '믿을 뿐'이다. 이 잘못된 믿음은 잘못된 정황판단이자 자기변명이다.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최장집의 지적이 정말 정확하다.
개혁적인 정치인 역시 막상 선거 국면을 앞두고는 중도 내지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것이 마치 합리적인 듯 행동한다. 그것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유권자는 어차피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이들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중도 내지 보수적 유권자층을 분할해 획득하는 것이 현명한 계산이라는 다운스 이론의 저급한 해석판을 신봉하는 것이자, 동시에 언론과 재벌을 중심으로 한 보수 헤게모니에 맞서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도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진지하게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비장함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252쪽)
즉,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잘 정돈된 상태로 주장하여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이나 분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1987년 체제를 극복해야할 체제이자 회복해야할 체제로 보고 있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1987년은 보수적 지역 구도에 기반한 체제이므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경제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분배와 성장이 가장 좋았던 시기이므로 회복해야할 1987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1987년 체제를 명확하게 둘로 나눠 평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접근인가? 1987년이 분배와 성장 면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는 평가도 일단 문제가 있지만, 정치와 사회/경제를 따로 본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론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기에 경제적/사회적으로 좋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소비적인 논쟁이 가능해지는 지점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세대담론이 '시대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으므로 세대의 특성도 변하고, 시대가 변했으므로 우위를 점하는 정치의 방향도 바뀐다는 말은 동의하기 참 쉬운 말이다. 하지만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대는 왜 변하는가?
'세대'가 정치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중심에 놓고 논하기 시작하면 이 논의는 허무하게도 운명론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세대'에 대한 정의나 분석도 헛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는 '계급'을 순간순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현재의 세대를 분석할 때에는 '계급'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과거에 형성된 세대에 대해서는 '계급'을 상기하지 않는 인상을 준다. 게대가 이 한국 사회에서는 계급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일찍 정해지는 사회가 아니던가?
민주화의 주역이요, 이후에도 계속해서 민주화 가치의 중심이었던 486세대는 역사 속에서는 계속 소수파였다. 그로 인해 몇몇은 민주화의 성과가 지역주의 정치 구도로 귀결되는 것을 보며 절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검토하면서 나를 포함한 486세대가 기존의 생각과는 좀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40대에 들어서면 보통 보수화되기 마련인데, 지금 486세대는 그렇지 않았다. ...(중략)...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2011년 현재의 분위기가 1987년 직전을 떠오르게 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청춘을 바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시절,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40대에게 1987년은 청춘의 기억 한가운데에 박혀 빛을 잃고 있는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259쪽)
486세대가 다른 세대와 비교하여 특징을 가진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른 시대를 다른 나이로 살아간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저자가 언급하는 486세대는 운동권 대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들의 정치적 역량과 사회적 역량은 결코 작지 않다.(사회의 엘리트이니까!)
하지만 그들만이 40대 세대로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운동권에 있지 않던 이들도 수두룩하고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다. 20대는 20대로 규정하면서 40대는 486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조금 더 공격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의 486들이 오늘날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고, 10대들에 대한 가해자다. 이 세대 전체를 진보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분당의 선거결과도 마찬가지. 표심이 진보적 가치 때문에 움직였다고 할 수 있는가?
부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하지만, 이렇기 때문에 세대 담론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꼼수가 유행하고 SNS가 유행하고 투표율이 높아져서 젊은 세대의 정치적 관심이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얼마간의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량과 가능성을 증폭시키려할 때 '세대담론'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세대담론에 대한 설득력은 미약하지만, 기존의 정치판세와 그 변화, 세계정세의 변화를 많은 도포를 이용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세대담론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