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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싸우는 사람들 ㅣ 우리시대의 논리 14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8월
평점 :
20여 년 동안 소송과 함께 살아온 68세 할머니.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면, '그만 좀 하지, 왜 저렇게 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법정 소송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조차도 '그런 일'은 피하는게 상책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답은 뻔하다. 소송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당신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살아"라는 말에 고개를 쉽게 끄덕일 수 있을까?
왜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싸우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법과 싸우지 않으면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양산하는 우리 사회의 사법 환경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앞서 '석궁테러'사건을 다룬 책 '부러진 화살'을 썼던 저자는 주인공을 바꿔서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게 '법'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라는 질문.
한 인물을 긴 시간 동안 밀착하여 관찰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법률용어들이 많이나옴에도 굉장히 실감이 나는 책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 할머니의 '재판기술'에 무릎을 치기도 하고, 한 편으론 "아니 이거 재판 기술 모음집이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그런 기술이 왜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런 기술이 없이는 '당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을 구속한 검사가 면전에서 "당신이 너무나 민사재판을 많이 해서 그걸 못하게 하려고 집어넣는 거야."라고 했다면?
그래도 당신은 법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런 기술 없이도?
그리고 돈도 빽도 기술도 없다면, 그냥 억울해도 참고 살아야 하는걸까? 그런 것이 '법의 논리'인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남 탓하지 말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불합리, 억울함을 감수하고 살라고 말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누가 인간의 완전함을 전제할 수 있단 말인가? 법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을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다. 악인에게도 공정해야 하는 게 법이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묻지 않고 그가 한 행동과 요구의 합리성 내지 합법성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한다.
전작 '부러진 화살'도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서평 신청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 리뷰도 출판사 서평 이벤트로 책을 받아서 작성했다)
그래서 블로그에 간단하게 리뷰를 해놓았는데, 리뷰를 작성한 몇 년 뒤인 최근에 어떤 댓글이 달렸다. 댓글의 내용은 이렇다.
김명호 교수의 폭력행위에 대해 처벌이 이루어진 재판에만 관심을 두고 그가 마치 탄압받는 것처럼 묘사하는 데에서 오는 가슴떨림을 십분 즐기는 분위기인 듯.
그러나 그가 당시 성균관대에서 더 이상 강의하기에 어떤 부적절한 사유들이 있었는가를 수십장에 걸쳐 상세히 써놓은 복직 소송의 판결문은 전혀 안 읽어보셨죠?
여러 진보언론들이 그의 곁에 섰지만, 끝내 그를 옹호하는 동료교수나 제자 한명 나서 인터뷰조차 하지 않은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셔야죠.
친일파 교수 비판했다가 연구실적 미비를 빌미로 쫓겨난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가 어떻게 법정투쟁으로 당당히 복직을 하게 됐는가 하는 그 과정도 김명호 교수의 치밀하교 교묘한 언론플레이 경력과 비교해서 조목조목 따져보시면 새로운 진실이 보일 겁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아는 게 적어 무지한 만큼 감동과 흥분은 훨씬 더 커지는 법입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니까요.
훈계조의 말투 등은 차치하더라도, 난 이 댓글이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나 '부러진 화살'에서 강조하는 점, 그리고 문제라고 지적하는 점은 기준이 부족한 법과 제도라고 생각했다.
김명호 교수나 이 책의 주인공인 임 할머니의 성격이나 인품 따위는 판결과 전혀 무관하다.
그를 옹호하는 동료교수나 제자 한 명 나서 인터뷰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유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린 그 사람의 평소 행실 따위를 들먹이며 그 사건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며 판단을 미리 내려버린다.
우리의 이런 인식이 현 법과 제도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법 앞에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그 고루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받는 한, 법과 싸우는 사람들은 계속 생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이 한 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서형의 이 작업들은 사소해보이지만 큰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