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굉장히 복잡한듯하지만 이야기의 줄기는 매우 간단한 소설. 소설의 첫 두 문장을 놓고 2시간을 넘는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이상하게 보르헤스가 연상되었고, 노인이 마지막 사냥을 나설 때에는 '노인과 바다'가 연상되었다. 혹은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 하지만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무언가를 극복하는 승리자이지만,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승리했으나 패배자일 뿐이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노인은 그 사실마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그때서야 노인은 눈앞의 현실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 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설사 그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도 미란다나 플라센시오를 물어 죽인 경우만 봐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였다. 다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노인의 뇌리에는 어떤 결론이 스쳐가고 있었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노인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이 짐승의 가슴을 열어 놓은 것을 보며 치를 떨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어찌보면 처절할 정도로 그 길을 걸어나간다는 점에서 김훈의 이순신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다분히 남성적인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김훈이 종종 보이는 자뻑 수준에 가까운 '남자의 고독'은 보이지 않는다. 괜히 이 노인이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인간을 품어주는 대자연'이라는 건방진 환상을 만들지 않는 특이한 환경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