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회색지대
윤해동 지음 / 역사비평사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학문에도 '유행'이란 것이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을 구입할 당시만해도 '근대성'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요즘도 자주 화두에 오르는 용어이긴하지만 이 당시만큼의 첨예함은 많이 사라진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성 특히 '식민지기'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어떠한 학문적 합의점을 찾았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단지 서로 지쳤거나, 아니면 대화 상대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종의 방향전환을 했을 뿐.

그만큼 이 문제는 민감하도고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이 주제에 천착해온 윤해동 선생의 논문집이다.

내가 책을 구입한 2003년에 비해 그 예리한 '날'을 느낄 수 없는 무뎌진 분위기 때문인지, 책에 줄을 그을 부분이 그리 많진 않았다.

하지만 '이분법식'의 구도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타당하고 유효하다.

 

  이런 방식으로 저항과 협력의 구조를 간단히 그려본다면, 일제의 동화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서 일제는 한국인 협력체제 구축을 다면적으로 시도하는데 이에 따라 한국인의 협력이 구조화하고 일상화한다. 이를 구조적 협력 또는 일상적 협력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역으로 협력체제가 구조화하고 일상화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동화체제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다양한 형식의 저항이 구조화하고 일상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지배체제에 동조하는 양태와 그 지배를 내면화하는 양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조화된 협력을 구조화된 저항으로부터 완전히 단절시켜버릴 수는 없다. 즉 동화 또는 체제내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겉으로는 협력 양태를 띠고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것이 지배를 내면화하는 것까지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피지배 민중들은,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협력하고 저항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가 바로 식민지인식의 회색지대가 발원하는 지점이다.

 

또한 식민지와 제국주의를 상호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구하느냐지만.

 

식민지 주민의 정체성이 지배자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지배자들 역시 식민지 종속민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갔다. 지배자와 종속민은 서로를 타자로서 인식하였지만 타자 없이는 자기를 인식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도 민족주의가 '보편성'을 주창하기 시작할 때 가장 공격적인 제국주의가 된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물론 논문집이라는 형식 때문인지, 뒤로 가면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게다가 메타비평이 아닌 1차 연구로 분류할 수 있는 논문에서는 메타비평에서의 날카로움이 무뎌지는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오히려 맨 뒤에 함께 수록된 인터뷰가 윤해동 선생의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자면.

 

  (식민지하에서) 일상의 영역 자체가 굉장히 이중화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촌락을 주제로 논문을 쓰면서도 느끼는 점인데,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상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가? 촌락 단위로 들어가면, 식민지 권력과 촌락이 만나는 접점이 구장이나 면장, 면서기인데...... 특히 구장을 두고 보면, 이 사람은 굉장히 이중적인 존재지요. 어떤 측면인가 하면, 식민지 권력 침투의 첨병이라는 점이 있고, 다른 점은 촌락민의 대변자라는 것이죠. 이 이중적인 측면이 '식민지 공공성'이랄까 이런 걸 잘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적 공공성의 특성을 보자고 한다면 그런 식민지적 공간에서 자기문제를 해결해나가려고 했던 노력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항의 영역 아니면 수탈의 영역 말하자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항대립의 구분법에 의해서 이쪽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저쪽으로 끌려가기도 하는 일반민들의 삶의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적 근대의 경로 자체를 우리가 하나의 틀로써 정립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친일문제에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고, 또 동아시아 각국이 우려하는 일본의 우경화나 일본의 또 하나의 측면인 전쟁책임과 연관된 것으로, 일본의 총력전체제에 대한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구분되어야 하는 건데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또는 태평양전쟁 발발의 책임문제는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상의 영역이 '이중화'되어 있다는 주장과 '이항대립'을 부정하는 주장은 일견 모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제기이긴 하지만, 일상의 영역이 이중화를 넘어 삼중화, 사중화, 다중화될 수는 없는 걸까?

'이중화'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이항대립을 기본으로 깔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계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일반민들의 삶의 세계가 단순히 이쪽 저쪽 '끌려다니는' 것에 불과할까?

끌려다는 것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속도의 차이가 있다면, 그 속에서도 나름의 전략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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