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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죽음에도 '과정'이 있다면,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병원의 하얀 침대 위에서 산소 호흡기를 대고 누워있는 환자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삐- 소리를 내는 의료기기도.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녀의 얼굴과 목에 가해진 타격은 혈액 공급을 차단했다. 그녀의 두뇌는 갑자기 줄어든 산소와 포도당을 벌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생명의 통로는 좁혀지고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두뇌가 보낸 조난 신호는 별이었다. 신화는 사실이었다. 대뇌 피질의 단절된 화학 작용 덕분에 그녀는 별들을 향해 돌진했다.
셀리스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조금씩 숨을 들이마시고 헐떡거리며 한바탕 아우성을 치다가, 말을 더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혈액 공급이 줄어들자 심장과 허파는 미친듯이 피와 산소를 공급하다가 갑자기 멈워 버렸다. 살아남기에는 너무 심하게 유린당한 그녀를 그녀의 심장과 허파가 포기해 버린 것이다. 흉근은 오르내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반사 능력도 사라졌다. 그녀는 기침을 할 수도 없었고, 피를 도로 삼킬 수도 없었다. 뇌세포막의 펌프가 멈춰 버렸다. 셀리스는 완전히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의술과 기적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호흡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을 하고 싶어, 죽음의 '다양성'을 보려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토요일 오후에 두 고객은 시체 공시소에 보관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들을 - 이제는 침묵 속에서 - 대충 훑어보고 시체의 발목에 매달린 꼬리표를 읽는 동안, 죽음에도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심장 마비는 살인 용의자 제1호였다. 이른 아침은 죽음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 다음은 한밤중과 폐렴. 세 번째 살인 용의자는 자동차였다. 그 다음이 암인데, 암의 원인은 대부분 술이나 담배, 또는 바람이 실어 온 소금 속에 함유된 바다 찌꺼기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숨을 쉬지 말 것. 운전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지 말 것. 길을 건너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 레스토랑에 가지 말 것. 그 지역에서 많이 나는 특산물, 게와 수에트 캐서롤, 돼지기름과 견과류로 만든 과자, 달걀을 넣은 리큐어, 푸른곰팡이 치즈 소스를 먹지 말 것.
또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노화의 결과'로만 생각하게 되고, 노화는 비난 받아야 할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조지프가 20년 동안 만나지 않은, 그래서 별로 좋아할 것도 없는 또 다른 사촌도 지난 봄에 죽었다. 셀리스와 동갑인 이웃집 아들도 지난 봄에 죽었다. 노총각 사이클 선수인 그는 야외 훈련을 하다가 심장 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십대 이후로는 담배도 술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몸은 자작나무처럼 호리호리하고 근육질이었다. 절대 죽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모친은 아들이 너무 일찍 죽었다고 말했다. 죽음이 마치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 연금이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일찍 신청하면 당연히 퇴짜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반쯤 감은 눈을 통해 두 번째로 부모를 보았을 때, 부모는 묘하게도 젊고 건강해 보였다. 피부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없었다. 어머니의 아래턱은 단단했다. 하지만 부모를 젊게 보이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비는 깨달았다. 부모가 죽은 방식 그 자체. 변사는 대개 젊은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느린 소모는 노인의 속성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게 전혀 없었다. 급속히 파괴된 부모는 정말 아름다웠다. 손상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개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양되어 있었고, 묘하게 침착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들은 자궁에서 줄곧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그 최후의 노인성 경련 - 발작은 지나치게 강한 표현이다 - 을 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기도 했다. 분노나 슬픔이나 절망의 징후는 전혀 없었다. 작별 인사도 없었다. 자해한 상처도 없었다. 유산으로 남긴 원한도 없었다. 마지막 회한도 없었다. 그들은 아직 희망찬 노년을 기대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할 때 세상을 떠났다. 실비는 부모가 이번만은 자기를 정말로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적어도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를 놀라게 한 것은 부모가 살해된 사실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알몸이라는 사실만도 아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실비의 가슴에 - 뒤늦게나마 - 사랑을 가득 채울 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목에 가볍게 닿아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이었다.
죽음을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구상시회권' 같은 부패해가는 한 인간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니까 죽음을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소설의 마카브르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죽음의 과정'일테니까. (책의 원제가 'Being dead'라는 점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소설이 놀라운 것은, 단순히 죽음을 새롭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굉장히 냉철하지만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것도 비비꼬지 않는 문체로.
날이 저물자마자 조문객들이 -여자들이 먼저- 찾아와 고인에 대한 덕담을 늘어놓고, 어깨가 들썩이게 흐느껴 울고, 구두와 지팡이로 마룻바닥을 쿵쿵 두드리고, 팔찌와 소맷부리를 달그락거린다. 삐걱거리는 의자나 느슨해진 마루청에서 삑삑 소리가 나게 하거나 가장 요란하게 곡한 여자는 누구나 자기가 가장 비탄에 빠져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소리가 클수록 슬픔도 깊은 법이니까. 백 년 전만 해도 죽음이 방 안에 있을 때면 아무도 요즘의 우리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백 년 전 사람들은 슬픔에 재갈을 물리지도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슬픔을 몰아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마치 나무처럼 물을 주고 돌보았다. 죽음 앞에서 낮은 소리로 속삭이거나 무언극을 연출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책의 곳곳에 넘치는 선언(혹은 아포리즘)이 쓸데 없는 폼잡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일기장은 아버지의 사적인 공간이다. 아버지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자식은 아무도 없다.
시제와 플롯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일상적인 것'에서 완전히 일탈해 있는 소설.
하지만 약간의 현기증에도 불구하고 한 번 책을 읽으면 놓을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휴양지에 가서 읽기엔 어울리지 않는 책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휴양지에서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잡생각을 버리고 이 소설에 깊이 발을 담갔다 나오면, 무엇인가 '진지함'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무신론자인 작가가 '구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자극적인 척하지만, 실은 담백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
아직 많이 이르기는 하지만, 올해 읽게 될 책 중 최고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